-
w/Dugo Sodo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잠시 삶의 경계에 머물렀다 나온 느낌이 든다.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피카소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천재라고 하니 천재인가보다 하지만, 내가 그 천재성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큐비즘은 분명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지만 나의 취향은 아니고, 오히려 큐비즘 이전 피카소의 작품을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개념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언뜻 심오하다고 느끼지만, 일상에서는 뉴턴의 고전물리학만으로도 충분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문학에서는 작가의 천재성을 곧바로 느낄 때가 많다. 어떤 작가들은 내 삶의 일부분을 부지불식간에 짚어낸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이 그렇다. 이런 작가들은 삶의 ‘이면(裏面)’을 어디까지 들어가 보았는가, 갑자기 광막한 세상을 마주한 느낌이 든다. 허무함, 슬픔, 두려움, 외로움 따위의 외면하고 싶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엄습하는 느낌.
독특한 소설이다. 첫째 삼대에 걸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둘째 인도를 배경으로 한다. 그것도 벵골 지역의 캘커타를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바뀌던 시점의 복잡한 시대배경을 담고 있다. 또 20세기 후반 중부와 동부 인도를 휩쓸던 새로운 마오이즘 운동의 변모를 담고 있으면서도, 지구 반대편 미국의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펼쳐지는 초연한 자본주의의 풍경을 동시에 담고 있다. 내용은 방대하지만 글은 과하지 않다. 인도와 미국의 냄새가 물씬나는 지명과 인물의 이름이 상세하게 다뤄지니 매우 생생하다.
사건의 가장 큰 단초는 우다얀이라는 인물이 제공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수바시(우다얀의 쌍둥이 형), 가우리(수바시의 아내), 벨라를 중심축으로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 세 인물들의 공통점은 구세대―국가의 외관만 갖춘 인도의 후진적인 민주주의, 여기에 더해 전근대적인 혼인제도―에 미련없이 결별을 고했다는 점이다. 꽤 급진적인 이들 설정은 사실 이 인물들이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면서도 일반적인 인도인들은 꿈꾸기 어려운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부터 이미 차별화되어 가지를 뻗어나간다.
그들 자신이 택했지만 소외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풍경 안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인물은 가우리라는 여성일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가족 안에서의 부재(不在)를 택한 그녀를 보며 공감하기 어려웠고 화가 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후에 서술되듯 교집합이라곤 한 톨도 없어 보이는 이 가족(수바시, 가우리, 벨라)의 관점이 입체적으로 조망되면서, 그녀의 입장은 새로운 각도에서 해독되고 독자의 분노는 희석된다. 그녀의 세계 안에는 어두운 캘커타의 골목이 있고, 우다얀의 마지막을 지켜본 톨리건지의 저지대가 있고, 인도 학생운동의 후끈대는 열기가 있고, 보스턴의 소금기 축축한 바닷바람이 있고, 철학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고민케 한 대학의 강의실이 있고, 그녀가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캘리포니아의 건조하고 훈훈한 공기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방인으로서 지울 수 없는 꺼림직한 객쩍음.
그녀는 크고 작은 형태로 세계로부터 부정당해 왔고, 이는 수바시와 벨라를 비롯한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이들 존재들은 부정 당한만큼 다른 존재를 어떠한 형태로 부정한다. 물론 그들은 세상을 긍정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긍정과 부정은 함께 따라다니는 모양이다. 하나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부정해야 하고, 때로 긍정하는 하나를 뺀 모든 것을 부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생산적인 활동도 아니고 행복을 추구하는 활동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선택일 뿐이다.
때문에 소설의 끝은 극적이지도 않다. 우다얀의 걷잡을 수 없었던 열정과 신념이 무색할 만큼, 소설의 끝에는 원자화된 개개인의 비범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이 남는다. 영국 런던의 벵골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줌파 라히리는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방대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뒤따라오는 또 다른 질문. 21세기의 결말은 늘 이런 식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소설의 내용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모든 가치가 공동화(空洞化)된 세계 속에서 모든 나침반이 고장나버린 것에 뿔이 난 것은 아닌지. [終]
그녀의 가장 강한 이미지는 언제나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과거와 미래 둘 다였다. 그것은 눈앞에 펼쳐진 수평선 같은 것이었다. 끝없는 시간의 스펙트럼 위에 짧은 기간 동안 빌려 쓰는 그녀 자신의 생이 덧붙여졌다. 선의 오른쪽에는 가까운 과거가 있었다. 그녀가 우다얀을 만난 해가 있었고, 또한 우다얀을 모르고 살았던 그 이전의 모든 해가 있었다. 그녀가 태어난 1948년도 있었고, 본문이 시작되기 전 서문과도 같은 그 이전의 모든 세월이 있었다.
선의 왼쪽은 미래였는데,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그녀의 죽음이 종점인 곳이었다. 아홉 달 안에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기의 생명은 이미 시작되었고 심장은 이미 뛰고 있었다. 이는 살금살금 나아가는 별개의 선으로 표현되었다. 그녀는 우다얀의 삶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더 이상 그녀와 동반하지 않고 1971년 10월에 멈춰버린 것을 보았다. 이것은 그녀의 마음의 눈에 무덤을 만들었다.
어떠한 전망도 하기 힘든 현재의 순간만이 그녀의 이해의 범위를 벗어났다. 그것은 자신의 어깨 바로 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같은 것이었다. 시야에 생긴 공백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미래는 눈에 보였으며, 감긴 실이 풀어지듯 계속 풀려나갔다.
그녀는 그 미래에 눈을 감고 싶었다. 자기 앞에 놓인 날과 달들이 끝나버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의 남은 생애는 계속해서 현재가 되어 나타났고, 시간은 끊임없이 증식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미래를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어느 하루가 다음 날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날로 이어질 거라는 확신과 결합된 열망이었다. 그것은 숨을 참고 멈추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우다얀이 저지대 속에서 그렇게 하려고 애썼던 것처럼, 그럼에도 어떻게든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시간이 가만히 있으면서도 동시에 흐르는 것처럼, 그녀가 자각하지 못하는 몸의 다른 어떤 부분이 산소를 빨아들이며 그녀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p. 178~179
벨라에게 시간은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그저께를 ‘어제 다음날’이라고 종종 말했다.
꽃의 이름이기도 한 벨라의 이름을 조금 다르게 발음하면 그 자체가 시간의 한 범위, 하루의 일부를 뜻하는 단어였다. 샤칼 벨라는 아침을 의미했고 비켈 벨라는 오후, 라트리르 벨라는 밤을 의미했다.
벨라의 어제는 마음에 저장된 건 뭐든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이전에 일어난 어떤 경험이나 느낌도 어제로 나타냈다. 벨라의 기억은 짧았고 그 내용은 한정되었다. 시간의 순서가 뒤섞였고, 멋대로 재배열되었다.
―p. 238~239
힌두 철학에서는 신 안에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했다. 신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이지만, 시간은 죽음의 신으로 인격화되었다.
데카르트는 『세 번째 성찰』에서 신은 연속적인 매 순간마다 육신을 재창조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시간은 지속의 형식이다.
지구 상에서 시간을 특징짓는 것은 태양과 달이다. 태양과 달의 회전이 낮과 밤을 구분하며, 이는 시계와 달력으로 이어졌다. 현재는 계속해서 명멸하는 점이었다. 반짝이다 약해지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것이었다. 현재의 지속 시간은 얼마일까? 1초? 그 이하? 현재는 항상 변했다. 현재를 생각하는 동안 현재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대부분은 미래가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펼쳐질 거라고 여기며 미래를 신뢰했다. 맹목적으로 미래를 설계하며, 실상과는 다르게 앞일을 그렸다. 이것은 의지의 작용이었다. 세상에 목적과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 인들은 미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 미래란 결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일 해전이 있을 거라는 것을 결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무지와 희망 속에서 의도적으로 기대를 하는 것,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시부모님은 자식을 위해 증축한 집에서 수바시와 우다얀이 나이 들어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은 수바시가 톨리건지로 돌아와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우다얀은 사회 자체가 바뀌기를 바라며 미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가우리는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와 함께 결혼 생활을 꾸려가기를 바랐다. 수바시는 로드아일랜드에서 그와 가우리와 벨라가 한 가족으로 지내기를 바랐다. 가우리가 벨라의 엄마이자 그의 아내로 남기를 바랐다.
때때로 가우리는 벨라식 시간개념에서 위안을 얻었다. 벨라에 따르자면 우다얀은 전날에 여전히 살아 있었을 것이고 가우리는 여전히 그와 결혼한 상태였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가 죽은지 거의 5년이 지났고, 그녀가 수바시와 결혼한 지 거의 5년이 되었지만 말이다.
―p. 241~243
……가우리는 일자리를 제안 받을 때까지 기다렸고, 수바시가 캘커타로 돌아갈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벨라가 태어난 후 첫 몇 년 동안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되돌아가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기초가 거기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시도는 끊임없이 실패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감정이 자신을 괴롭혔고, 자신의 이기심과 어리석음만 조출했다. 자기 자신을 참아낼 능력이 없다는 것만 드러냈다.
수바시가 자신의 경쟁자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래서 벨라를 두고서 수바시와 경쟁했다. 모욕감이 느껴지는 부당한 경쟁이었다. 하지만 물론 경쟁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헛된 시도였을 뿐이다. 자신이 불가피하게 은밀히 물러난 것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한구석에 자신을 그려 넣고서, 그 그림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이다.
……자신의 내부에는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이 감행한 행동에서 비롯한 흥분감, 있는 힘을 다 써버린 듯한 기진맥진함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그동안의 모든 걸음이 로드아일랜드에서 탈출하기 위한 것이었던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p. 367~369
그녀의 이념은 실천과 괴리되었다. 대학에 오래 몸담은 탓에 실천력이 거세된 것이었다. 오래전에는 자신의 일이 우다얀의 뜻을 받드는 것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우다얀이 옳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배반하는 셈이 되고 말았다. 우다얀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감을 주었던 많은 것들을 그녀는 자신의 지적인 이익을 위해서 약삭빠르게 발전시켰다.
―p. 372
그것은 과거에 수차례 자신의 역할이 바뀌었던 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은 아내에서 과부로, 제수에서 아내로, 엄마에서 자식 없는 여자로 바뀌어갔다. 우다얀을 잃은 것은 예외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은 능동적으로 이런 길을 선택해왔다.
자신은 수바시와 결혼했고, 벨라를 포기했다. 자신은 또 다른 모습의 자기 자신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전환을 관철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의 삶을 켜켜이 쌓아왔지만 결과적으로 삶은 발가벗겨졌고, 결국 혼자가 되었다.
―p. 381~382
벨라가 그녀를 멀리하게 하려고 수바시는 벨라에게 무슨 얘기를 했을까? 아마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단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일 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내팽개치고 떠난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 자기 스스로 아이를 죽이는 행위였다. 자신이 관계를 잘라버린 것이고, 그 결과는 그들 둘에게만 적용되는 죽음이었다. 우다얀이 저지른 어떤 것보다도 더 나쁜 죄였다.
……수바시는 잘못한 게 없었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고,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그녀를 괴롭힌 적도 탓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수바시가 행복을 찾았기를 바랐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그렇지 않지만.
결혼이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톨리건지에서 벗아나게는 해주었다. 그는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왔고, 그런 다음에는 잠시 우리에 넣고 관찰했다가 풀어주는 동물처럼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는 그녀를 보호했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지금도 잼이 든 병을 새로 개봉할 때마다 그가 가르쳐준 방법을 써먹었다. 스푼으로 뚜껑 가장자리를 서너 번 두드려서 밀봉 상태를 약화시키는 방법이었다.
―p. 384~385
집을 둘러보고 나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서 있을 때조차도 그랬다. 그는 접근이 금지되었다. 과거가 그를 부인한 것이었다. 이 행사는 그가 정착하여 삶을 꾸려간 이 임의의 장소가 자신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줄 뿐이었다. 벨라와 마찬가지로 이곳은 그를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유지했다. 사람들과 나무들과 그가 연구하면서 좋아하게 된 이곳의 특이한 지형 속에서 그는 여전히 방문객이었다. 아마 가장 나쁜 형태의 방문객일 터였다. 떠나기를 거부해온 방문객이니까.
―p. 403
6월은 구름을 데려와서 해를 가렸고, 폭풍우를 데려와서 바다를 잿빛으로 만들었다. 대기는 차가워서 수바시는 발가락 사이로 끈을 끼워서 신는 슬리퍼 대신에 계속해서 코듀로이 슬리퍼를 신었고, 계속해서 침대 위의 전기담요를 예열했다. 빗방울의 리듬은 주로 밤에 들렸다. 밤새 지붕을 거칠게 두드려대다가 아침이면 빗줄기가 가늘어졌고, 중간중간에 멈추기는 했지만 하늘이 완전히 개지는 않았다. 세차게 내리다가 잦아드는가 싶으면 다시 거세졌다.
그는 집 옆쪽의 지붕널에 낀 비늘 같은 곰팡이를 벗겨냈다. 지하실에서는 흰곰팡이 냄새가 났고, 빨래를 세탁실에 넣을 때는 눈이 따끔거렸다. 채소밭의 흙은 너무 물기가 많아 경작할 수 없었고, 그가 심은 묘목의 뿌리는 빗물에 쓸려갔다. 철쭉의 자줏빛 꽃잎은 너무 일찍 져버렸고, 모란은 다 피기도 전에 줄기가 꺾였다. 짓이겨진 꽃잎들이 빗물을 흠뻑 머금은 땅에 널브러졌다. 습기를 잔뜩 품은 공기 냄새, 땅이 썩어가는 냄새에는 어딘지 모르게 육욕적인 데가 있었다.
―p. 415
오빠, 동생과 함께 그녀는 『우파니샤드』와 『리그베다』의 구절을 읽었다. 고대의 가르침이었다. 그녀가 할아버지와 처음으로 같이 공부한 신성한 경전이었다. “아트마 데바남 브후바나샤 가르브호.” 신들의 영혼, 이 모든 세상의 씨앗, 거미는 자신의 실로써 공간의 자유에 이른다.
―p. 466
그에게는 새로운 고대의 땅에서, 선사시대의 유적이 있는 외딴 지역의 드넓은 품 안에서 그의 신발은 진흙투성이가 된다. 그는 눈을 들어 땅 위에 넓게 펼쳐진 음울한 잿빛 하늘을 본다. 대기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구름은 낮게 떠다닌다.
잿빛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낮의 푸르름이 드러난다. 서쪽에서는 분홍빛 해가 이미 기울기 시작한다. 그 결과 세 개의 분리된 양상이, 뚜렷이 다른 별개의 국면이 하늘에 나타난다. 수평선 위에 흩뿌려진 그 모든 모습이 그의 시야에 담긴다.
우다얀이 그의 곁에 있다. 우다얀과 그는 함께 톨리건지를 걷고 있다. 부레옥잠 이파리를 밟으며 저지대를 건넌다. 그들은 퍼팅용 아이언을 들고 가며, 손에는 골프공 몇 개가 들려 있다.
아일랜드에서도 땅은 몹시 축축하고 고르지 않다. 그는 다시 이곳을 방문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서 마지막으로 풍경을 마음에 담는다. 또 다른 돌을 향해 걸어가다가 발을 헛디뎌 휘청인다. 돌에 손을 뻗어 몸을 지탱한다. 여정의 끝 무렵에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알려주는 표지물이다.
―p. 526
물속에는 소리를 들으려 애쓸 필요가 없는 자유가 있었다. 사람들의 얘기를 잘못 알아듣거나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좌절감에서 자유로웠다. 의사는 청력이 좋아질 거라고 했다. 말이 잘 안 들리는 증세와 귀울림 현상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거라고 했다. 기다리면서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물속의 정적은 완전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 발산되거나 증발하는 단조로운 소리가 그의 머리를 파고드는 듯했다. 그것은 폭발 사고 이후에 겪은 부분적인 난청과는 달랐다. 물은 공기보다 소리를 더 잘 전달하는 매질이었다.
이런 난청 현상은 모르는 언어를 쓰는 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그럴 것 같았다. 그는 다른 나라에 간 적이 없었다. 중국이나 쿠바도 가보지 못했다. 최근에 읽은 글 중에서 체 게바라가 자식들에게 쓴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혁명은 중요한 것이고, 우리들 개개인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아무것도 고치지 못했고,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번 경우에는 혁명이 없었다. 그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가 무가치하다면 왜 그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것일까? 왜 결국에는 몸이 정신에 복종하지 않는 것일까?
―p. 529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철왕국 프로이센 (0) 2020.11.19 구토 (0) 2020.10.31 경멸(Il disperezzo) (0) 2020.09.13 창백한 불꽃 (0) 2020.09.07 자크 데리다의 글을 읽고 (0) 2020.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