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다 읽기는 읽을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꾸준히 읽다보니 어떻게 다 읽기는 읽었다. 책에 대한 감상은 <구토>와 함께 이후에 하는 걸로..!!:D
......한 저명한 역사가는 나치즘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프로이센] 만성 질환의 급성 증상이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사람인 히틀러가 사고방식상으로는 “선택된 프로이센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듯 독일 역사는 근대에 들어와 비교적 자유롭고 안정적인 정치 풍토의 ‘정상적’인 (즉 영국이나 미국이나 서유럽 같은) 노선으로 나아가는 데 실패했다.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과 정치 세력이 프랑스나 영국, 네덜란드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무너진 데 비해 독일에서는 이런 혁명이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독일은 ‘특수노선’(Sonderweg)으로 나아갔고 이것이 12년간 나치 독재로 절정에 올랐다. 프로이센은 이 정치적 기형의 시나리오에서 주역을 맡았다. 바로 여기서 특수노선이 가장 전형적으로 명명백백히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융커들의 권력이 와해되지 않았다. 엘베강 동쪽 지역의 귀족 지주인 이들의 정부, 군대, 농촌 사회 장악이 유럽 혁명 기간에도 살아남았다. 그 결과 프로이센에서, 그리고 독일로 확대되어 반자유주의와 불관용으로 점철된 정치문화, 법적인 권리를 압도하는 권력 숭배 경향, 그리고 지속된 군국주의 전통 등의 참사를 낳았다. 특수노선에 대한 이 모든 진단에는 한쪽으로 기운, 또는 ‘불완전한’ 근대화 과정이라는 생각이 있다. 정치문화의 진보가 경제 영역의 발전과 혁신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프로이센은 근대 독일과 유럽의 역사에서 골칫거리였다. 프로이센 고유의 정치적 문화를 막 생겨난 독일 국민-국가에 덧씌우면서, 독일 남부의 더 자유로운 정치문화를 하찮게 만들고 숨막히게 했으며, 정치적 극단주의와 독재의 토대를 구축했다. 권위주의 습성, 굴종과 복종의 관습이 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 독재가 도래하는 길을 열였다는 것이다. —p. 18~19
메테르니히는 이탈리아가 ‘지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브란덴부르크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육지로 둘러싸인 이곳은 방어를 위한 어떤 종류의 자연경계선도 없었다. 이곳은 전적으로 정치적 단위였다. 중세에는 이교도 슬라브족이 점령했고 다른 독일 지역은 물론이고 프랑스, 네덜란드, 북이탈리아,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정착한 땅들의 조합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 때까지 베를린 부근 슈프레 숲의 마을에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벤드족’(Wenden)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슬라브적인 특징은 흐려졌다. 변경 지대라는 이 지역의 특징, 다시 말해 기독교가 독일에 정착하던 시기의 동쪽 경계라는 정체성은, 브란덴부르크 전체와 주변 다섯 개 지역 중 네 개 지역—베를린 근방의 미텔마르크, 서쪽의 알트마르크, 북쪽의 우커마르크, 동쪽의 노이마르크(다섯 번재는 북서쪽의 프리그니츠)—을 일컫는 ‘경계’라는 뜻의 ‘마르크’(Mark) 또는 ‘마르히’(March, 웨일스어의 마치스[marches])라는 단어에 남아 있다. —p. 34
가능하면 제국 내의 모든 선제후와 군주, 신분제의회와 상호 신뢰 및 우정 속에 지내며 그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하라. 그리고 그들이 나쁜 감정을 품을 빌미를 주지 말고 선린관계를 유지하라. 하늘의 은총으로 우리 가문에 넓은 영토가 생겼으니 그 땅을 보존하는 데만 노력을 기울이고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려고 시기심과 원한에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칫하다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마저 위태롭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기록에 초조함이 묻어난다는 점이다. 이 기록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외교정책에서 변치 않는 주제 한 가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즉, 베를린의 세계관의 기조는 항상 취약성에 대한 민감함이었다는 것. 프로이센 외교정책의 특징이 되는 초조한 행동주의는 30년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p. 116
1713년에 있었던 정권 교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을 문화혁명으로 묘사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행정과 재정 분야에서 연속성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표현과 문화 면에서는 가치와 양식의 포괄적인 전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프로이센 왕국 초기의 두 국왕 사이에는 양극단의 특징이 드러났고, 이들의 후계자들은 각각 그중 하나로 자신의 위치를 정하게 되었다.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서는 A형의 호엔촐레른 군주를 볼 수 있다. 이 유형은 포용력이 있고 사치스러우며 외형을 중시하고 국사를 멀리하면서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는 특징이 있다. 다른 한쪽 끝에 있는 B형은 이와는 정반대로 엄격하고 검소한 일벌레다.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시작된 왕실의 ‘바로크 양식’은 우리가 본 대로 왕조의 집단 기억 속에서 일정한 반향이 지속되었다. 기호와 유행의 시대적 변화를 거치면서도 아낌없는 지출은 주기적으로 되살아났다. 가령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치하에서는 왕실 비용이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해 연간 약 200만 탈러, 전체 국가예산의 8분의 1 수준에 달했다(그의 전임자인 프리드리히 대왕 때는 22만 탈러에 불과했다). 상대적인 긴축 기간 이후 19세기 후반 수십 년은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를 둘러싸고 궁정 문화가 다시 꽃핀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B형 친족도 왕조의 역사에서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눈에 거슬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메모는 유명한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더 위트 넘치는 형태로) 모방되었으며, 그 뒤의 후손인 빌헬름 2세 황제도 (위트는 적고 더 긴 형태로) 그것을 모방했다. 값비싼 민간 복장보다 군복을 즐겨 입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습관은 프리드리히 2세가 따라 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프로이센이 멸망할 때까지 호엔촐레른 황조를 표현하는 강력한 특징으로 남았다. B형의 역사적 힘은 훗날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융성과 결합되었을 뿐 아니라 신생 프로이센 대중의 가치와 기호 속에 친화력의 형태로 남았다. 프로이센 대중에게는 국가 봉사에 전념하는 검소하고 올바른 군주라는 이미지야말로 프로이센 왕의 전형이었다. —p. 140~141
브란덴부르크가 경건주의에 협력한 이유는 칼뱅파 가문에서 겪는 종파상의 독특한 난관 때문이었다. 루터파의 격렬한 비판을 억누르기 위한 거듭된 노력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두 종파가 자발적으로 통합할 가능성은 여전히 요원했다. 따라서 종파 간의 다툼에 대한 슈페너의 거리낌 없는 비난은 선제후와 그의 가족에게는 달콤한 선율처럼 들렸다. <경건한 소망>에 소개된 여섯 가지 제안 중 네 번째는 “신학 논쟁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슈페너는 각 개인의 마음속에 깃든 진실은 다툼보다 ‘하느님의 신성한 사랑’이므로 자신과 믿음이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는 논쟁의 정신이 아니라 신앙인의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페너가 신학자이자 성직자로서 쓴 교리상의 문제는 신앙과 계율에 대한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에 묻혀버렸다. 그는 이웃을 지켜보고 교화하고 ‘개종’시키면서 적극적으로 그들의 복지를 이끄는 ‘영적인 성직’의 삶을 실천하라고 신자들에게 촉구했다. ......슈페너는 언제나 기존의 프로테스탄트 교화와 성찬식이나 교리에서 전통을 존중했다. 그리고 절대 통합운동을 지지한 적이 없었다. —p. 191
전부 다 애국 물결에 휩쓸렸던 것은 아니다. 7년전쟁 기간에 서부 지방의 가톨릭 지역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보다 프로이센 노선에 대한 지지 열기가 훨씬 약했다. 프로이센의 애국심은 18세기 후반의 영국에서처럼 무엇보다 (동프로이센을 포함해) 프로테스탄트 핵심 지역의 현상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센의 교양 계층이 스스로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발견’하는 과정에 있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프로이센 정신은 안정적인 집단정체성 형성의 전제 조건이라고 할 ‘임계질량’(critical mass)을 얻은 것이다. 18세기 후반 수십 년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라는 합성어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단순히 프로이센 ‘안에 있는’ 왕이 아니라 (1722년 이후로) 프로이센’의’ 왕이었다. 당대 사람들은 (비록 프로이센이라는 명칭이 1807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호엔촐레른 영토를 집단적으로 지칭하는 공식 용어로 채택되기는 했지만) ‘프로이센의 땅’ 혹은 단순히 ‘프로이센’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18세기 후반 프로이센에 집단적인 충성심이 확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닥에 형성된 침전물이 표면으로 가시화된 것이었다. 바닥층에 가라앉아 있던 것은 근대 초기의 종파 연대, 의무감과 동시에 평등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노동윤리, 전투와 침공의 충격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프로이센의 열렬한 애국심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애국자들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들의 국가 혹은 국민을 위해 죽는 데 비해, 프로이센의 애국 담론은 무엇보다 프리드리히 대왕 개인에 초점을 맞췄다. 토마스 압트가 조국을 위한 죽음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실제로 의미한 것은 왕을 위한 죽음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어렵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이나 인쇄물에서 등장하듯 다양한 모습으로 굳어진 국민적 정체성의 고정관념이 프로이센에는 없었다. 프로이센의 애국심은 강렬했지만 초점의 폭은 좁았다. ‘유일한 프리드리히’의 죽음과 더불어 프로이센의 애국심에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추억과 노스탤지어의 맛이 생겼다. —p. 322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싸움은 이런 점에서 국내 및 영토 밖의 모든 권위에 앞서는 국가의 최고우선권에 기초한 ‘국가원칙’(Staatsprinzip)과 분산된 권위와 혼합된 통치권으로 이루어진 ‘제국원칙’(Reichsprinzip) 간의 갈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후자는 중세 이래 신성로마제국의 특징이었다. —p. 339
......칙령의 핵심 목표는 새로운 종교적 ‘정통성’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종파 구조를 통합, 정리하고 거기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다원적 타협 구조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여러 종파의 공존이라는 프로이센의 전통과 일치했다. 따라서 칙령은 이단적인 합리주의 사상의 대중 선전뿐 아니라 두 개 종파에 속한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도 금지했다. ......칙령을 둘러싼 논쟁을 ‘계몽주의’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정치적 ‘반동’ 사이의 충돌로 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진정한 싸움은 계몽주의를 둘러싼 노선 차이에 있었다. 한쪽에서는 종교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에 관심을 두고 “그들이 선택한 대중 종파가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국가의 합리적 실천으로 보고 칙령을 옹호한 계몽주의자들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 칙령이 개인의 양심을 억압한다고 주장하며 극렬하게 비판하는 진영이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으로서 간트학파의 법학교수인 고트프리트 후펠란트는 공공기관은 이 기관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합리적 신념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설령 개개의 신념에 맞는 개개의 많은 교회가 있어야 하더라도 말이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역사를 통해 현재까지 전해진 종파적 정체성은 과격한 비판 세력의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종교의 자유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개인의 양심에 부담을 주는 과거의 숨 막힐 것 같은 유산이기도 하다. 실제 문제는 합리적 행동의 현장에서 부각되었다. 푸펜도르프가 제안한 대로 이 문제를 국가가 관할해야 하는가, 아니면 좀 더 급진적인 칸트학파의 주장처럼 개인의 이성적인 문제 해결에 맡겨야 하는 것인가? 국가는 자연법의 원리에 기초한 합리적인 공공질서를 떠받치기에 더 적합한 위치에 있는가, 아니면 이것을 점점 역동적으로 떠오르는 시민사회 내의 정치세력 몫으로 남겨둬야 하는가? —p. 376~377
슈타인의 동료 테오도르 폰 쇤과 프리드리히 폰 슈뢰터, 이 두 사람은 농업 시스템 개혁의 얼개를 짜는 법률 초안 작성의 임무를 맡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때로 10월 칙령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1807년 10월 9일의 칙령으로서 개혁 시대 최초의 그리고 가장 유명한 기념비적 입법이라고 할 만하다. 수많은 개혁 법령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법 자체보다 의도를 선언하는 성격이 더 강했다. 이 칙령은 프로이센 시골의 사회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했지만, 그 형식에서 많은 부분이 지나치게 모호했다. 칙령이 추구하는 목표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잠재적인 경제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것으로서, 모든 개인은 자유롭게 “본인의 능력이 닿는 한 많은 번영을” 누려야 한다고 선언했다. 둘째는 모든 프로이센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한 ‘국가의 시민’이 되는 사회의 창조였다. 이런 목표는 특수한 세 가지 수단을 통해 달성될 터였다. 첫째, 귀족 토지의 구매에 대한 모든 제한을 없앴다. 드디어 국가가 특권 토지에 대한 귀족의 독점을 유지하지 위한 무익한 싸움을 포기하고 최초로 자유로운 토지 시장과 유사한 제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둘째, 모든 직업을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개방했다. 처음으로 길드를 비롯한 직업단체의 제약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길드 지배 제도의 폐지는 1790년대 초부터 관리총국과 베를린 공장부 간에 계속 논의되던 오래된 주제였다. 셋째, 모든 세습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지극히 암시적이고 갑갑할 정도로 부정확한 표현이기는 했지만, 칙령은 1810년 성 미르티누스 축일[11월 11일]부터 프로이센 왕국에는 오직 ‘자유민’만 존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p. 451~452
......훔볼트의 각급 교육제도에서 배출된 해방된 시민들은 프로이센 국가의 정치 생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한때 대부분, 길드 같은 법인단체의 특권회원으로 제한되었던 ‘시민’(Büger)은 집을 소유하거나(독신여성 포함) 시 경계 안에서 ‘생업’(Gewerbe)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으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일정한 재산상의 자격을 만족시키는 모든 남자시민은 시 선거의 투표권과 공직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소유’(Teilhabe)와 ‘참여’(Teilnahme) 사이에서 주장되는 등가관계는 19세기 자유주의 역사에서 지속적인 주제가 된다. —p. 457~458
프로이센 발전의 특이성을 파악하는 한 가지 방법은 나폴레옹 시대에 독일 지역 각국에서 진행된 광범위한 개혁 활동의 맥락에서 조명해보는 것이다.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3국 역시 이 무렵에 집중적인 행정개혁을 겪었는데, 거기서 빚어진 결과는 헌법개혁이라는 본질적으로 훨씬 더 파급력이 큰 것이었다. 3개국 모두 헌법과 전국 선거, 의회를 받아들였다.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런 배경으로 볼 때, 1823년 이후 프로이센에 새로 설치된 주의회(Landtag)는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한편, 프로이센 사람들은 경제 근대화에서 일관되게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뮌헨과 슈투트가르트의 개혁파가 구체제의 중상주의가 걸어왔던 보호주의 노선을 옹호한 데 비해, 프로이센 사람들은 무역과 제조업, 노동시장의 규제 철폐에 목표를 두었다. 이것은 이미 산업화가 완전히 궤도에 오른 영국의 시장과 프로이센이 문화적, 경제지정학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확실한 증좌였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남부 독일 3개국보다 덜 ‘근대적인’ 헌법 체계를 가진 채 나폴레옹 시대를 벗어났다. 대신 국민경제는 더 ‘근대적’이었다. —p. 466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런 개혁은 하르덴베르크의 본질적인 개혁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그가 중시한 것은 개방과 소통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르덴베르크는 자유주의자라기보다 계몽주의자였다. 그는 여론이 정부를 검증하거나 정부에 반대하는 역할을 하는 ‘자율적인’ 힘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비판적인 담론의 장으로서 ‘자유주의적인 공론장’을 강화할 의도가 없었다. 그는 소통을 위한 매체를 개방하고 교육받은 대중을 공익을 위한 조화로운 대화의 장으로 불러들임으로써 그런 반대는 필요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헤르덴베르크는 말이 경우에 따라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가 ‘대표기구’라는 말을 했을 때 속으로 생각한 것은 시골과 대도시 사이에서 정보와 생각을 전달하는 고분고분하고 성실한 협의회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단체의 이해, 의회 혹은 입헌군주국을 생각했다. 그가 ‘참여’라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은 선출과 협의를 의미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부를 감시하기 위한 공동결정과 권한으로 받아들었다. 그가 말하는 ‘국민’(Nation)은 정치적인 의식을 지닌 프로이센 사람을 가리켰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해관계와 운명이 반드시 프로이센 사람과 동일하다고 할 수 없는 넓은 의미의 민족(deutsche Nation)을 생각했다. 이것이 왜 개혁이 당장은 약속만 풍성하고 실적은 빈약한지를 말해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여기에 똑같이 역사적으로 사면초가에 몰렸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고르바초프가 원한 것은 혁명적인 변화가 아니라 개혁과 개방이었다. 고르바초프와 하르덴베르크의 목표는 현재의 요구에 국가체제를 맞추는 것이었다. 따라서 차후의 변화에 그가 기여한 몫까지 부인하는 것은 인색한 평가일 것이다. —p. 469~470
......해방전쟁은 정부 및 군주들끼리의 전쟁이었고 왕조 간의 동맹 전쟁이었으며 유럽에서 힘의 균형을 재정립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두고 권리는 주장하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해방전쟁에서는 민병대와 정치적인 동기에서 움직인 의용군도 참전했다. 프로이센에서 동원된 29만 명에 가까운 장교 및 사병 중에 향토방위군 부대에서 복무한 사람이 12만 565명이나 되었다. 일반적으로 프로이센 장교의 지휘를 받으며 복무한 향토방위군 연대 외에, 프로이센을 비롯한 여러 독일 군소국가에서 모집한 의용군 소총수 부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자유군단이 있었다. 정규군에 복무하는 군인들과 달리, 이들이 충성맹세를 한 대상은 프로이센 국왕이 아니라 독일 조국(das deutsche Vaterland)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출정을 놓고 왕조와 의용군 사이에 기억의 차이가 나는 것이 전적으로 혹은 기본적으로 입대 및 전투 경험이 다른 데 기인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전후의 애국자가 모두 의용군 군단에 복무한 것은 아니었다. 향토방위군이나 정규군 부대에서 복무한 사람도 많고 군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또 정규군 장교나 사병도 전쟁 시기의 애국적 열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1816년 1월의 베를린 주재 영국사절의 보고에 따르면, 정규군에는 거의 모든 연대마다 ‘혁명의 선동’에 ‘오염된’ 장교들이 있었다. 반면에 ‘의용군 소총수’(friewillige Jäger) 중에는 전후 시기의 정치 성향이 진보적이거나 민주적이라기보다 보수적이거나 귀족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후의 논쟁은 단순히 전시 경험에 대한 기억의 차이뿐만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억을 도구화하는 것에 의해서도 불이 붙었다. —p. 516~517
문제는 애국심이 때로 급진적인 정치와 손을 맞잡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약속과 직결되어 특수한 독일 왕조의 법통을 뒤흔들 만큼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민족’이란 말은 프로이센과 독일 양쪽에 사용되었다. 하르덴베르크와 요르크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은 프로이센의 충신들이었다. 그와 반대로 피히테와 보이엔, 그롤만, 슈타인은 명백한 독일 민족주의자였다. ......프로이센 애국주의와 독일 민족주의 사이의 은밀한 긴장에는 위험과 희망이 내포되어 있었다. 민족주의의 동요가 독일의 모든 국가에서 왕조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힘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구체제의 계급적 질서를 수평적인 충성과 친화력의 문화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에 독특한 역사와 의미를 부여했던 배타주의 유산이 일소될지도 몰랐다. 프로이센이 자체의 이익을 위해 민족적 열기를 이끌어내고 배타주의적인 정체성과 제도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민족주의의 흐름을 탈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는 희망이었다. 단기적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다른 군주들과 합동으로 민족주의적 ‘선동’을 억압하고 의용군의 공적인 전쟁 기억을 침묵시켰을 때는 위험이 희망을 압도했다. 하지만 우리가 보다시피 장기적인 측면에서 프로이센의 정치 지도자들은 민족주의적 열망과 영토 이익 사이에서 나오는 시너지들을 인식하고 개발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전후의 분열된 기억은 평화로운 통합을 위한 길을 닦았고 거기서 대중의 요소와 왕조의 요소가 나란히 가면서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였다. 정치적 보호성을 제거하면, 프로이센의 대나폴레옹 전쟁은 궁극적으로 독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신화적인 전쟁으로 재정립되기에 이른다. 체조, 철십자훈장, 루이제 왕비에 대한 숭배 열기, 심지어 예나 전투까지도 모두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 국가들의 공동체에서 프로이센이 정치적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정당화했고 독일의 민족적 상징으로 변모해갔다. —p. 524~526
......1815년 이후의 국제 시스템에서 프로이센은 주체라기보다 놀라울 정도로 객체로 남았다. 프로이센은 유럽 열강과 비교하면 여전히 차이가 크게 나는 군소 국가였다. 국제적으로는 물론이고 독일 지역 안에서조차 프로이센이 자율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프로이센이 차지한 위상은 진정한 강대국과 대륙의 군소 국가 중간쯤 된다고 생각할 근거가 많았다. 이런 사정으로 프로이센 지도자들과 프로이센 왕국은 소극적인 외교의 긴 단계로 들어갔다. 빈 협정과 크림전쟁 사이에 조성된 40년간 이어진 평화시기 내내, 베를린은 전력을 다해 최상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가능하면 언제 어디서나 합의를 추구했다. 반면에 국제적으로 주요 위기가 닥칠 때마다 방관함으로써 영국을 자극하는 일을 피했다. 오스트리아와 직접 갈등을 빚는 상황도 멀리했다. 1837년에 영국 사절이 보고한 대로, 화해를 통해 모든 당사국을 만족시키고 유럽의 평화를 보존하는 것이 베를린의 확고한 정책이었다. —p. 541
1831년에 프로이센 왕국의 인구는 1,315만 1,883명이었다. 이 중에서 약 543만 명(약 41퍼센트)이 작센과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지방에 살았는데, 이들 지역은 1815년 이후에야 프로이센 땅이 된 곳이었다. 여기에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에 따라 프로이센에 병합된 포젠 대공국의 주민들까지 더하면 새로 프로이센이 된 곳의 비율은 50퍼센트 가까이 올라간다. 따라서 이곳의 주민을 프로이센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과제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프로이센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바덴과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도 실질적으로 새로운 영토가 생긴 나폴레옹 시대의 격동기로부터 비롯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도 ㅈ역의회가 세워지고 일원화된 행정부와 사법조직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민을 통합하는 과제는 가속화되었다. 반면에 프로이센은 '전국적'인 의회와 '전국적'인 헌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따라서 프로이센 왕국은 행정적인 의미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진 형태로 남았다. 법적인 조직도 여전히 일원화되지 않았다. 베를린 행정부는 1820년대에 국가 체제를 하나씩 통일시켜나갔지만, 라인 지방의 (즉 나폴레옹의) 법은 서부 주에서 계속 유효했기 때문에 법관 지망생들은 라인란트나 베스트팔렌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아야 했다. 19세기 전반 내내 베를린 ‘추밀 대법원’(Geheime Obertribunal) 외에 라인란트와 포젠, 스웨덴령 포메른이었던 그라이프스발트까지 네 개의 대법원이 있었다. —p. 577
행정에 관한 발전적이고 실용적인 접근 태도는 은연중에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흐름과 궤를 같이했다. 19세기 초의 프로이센은 언어와 문화의 측면에서 조각보 같은 구조였다. 서프로이센과 포젠, 슐레지엔에 사는 폴란드인은 언어상으로 최대의 소수 집단을 형성했으며 동프로이센 남부에 거주하는 마주렌인은 농촌 지역의 폴란드어 방언을 사용했다. 단치히 오지의 카슈비아 사람들은 또 다른 방언을 사용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네덜란드어가 과거 클레베 공국의 학교에서 여전히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외펜 말메디의 왈롱지구에서는 1876년까지 학교와 법정, 행정부에서 계속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빌립보인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는데 이들 특유의 목조 교회를 오늘날에도 그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오버슐레지엔에는 체코 지역 사회가 있었고, 코트부스에는 소르브족이 살았으며, 베를린 부근의 크고 작은 슈프레발트 마을 일대에 흩어져 사는 벤드족은 옛 슬라브어 방언을 사용했다. 쿠로니아 사주로 알려진 발트 해안의 좁고 긴 땅에는 쿠렌족이 근근이 살고 있었다. 북유럽에서 풍경이 가장 황량하고 음산한 곳에 사는 주민들이었다. 거친 환경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이 억센 어부들은 라트비아어 방언을 사용했는데 이들은 단조로운 먹거리를 보충하기 위해 까마귀 고기를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까마귀를 잡을 때는 머리를 깨물어 죽였다고 한다. 동프로이센의 굼비넨 같은 곳은 사실상의 마주렌 주민과 리투아니아인, 독일인들이 서로 가까이 살면서 세 개 언어가 사용되는 지역이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센은 1840년대에 호엔촐레른 지방을 둘러본 한 스코틀랜드 여행자 새뮤얼 라잉의 말마따나, 여전히 “누더기와 조각보 같은 왕국”이었다. 그는 프로이센이 흔히 하는 말로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미가 아니라 프로이센 정부 혹은 그 정부가 다스리는 주를 나타내는, 지리적, 정치적 의미밖에 없다고 보았다. 프로이센이라는 국가는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결코 실현되지 못한 […] 사고의 조합”이라는 것이었다. —p. 578~580
국가는 모든 프로이센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한 유일한 기관이었다. 하필 이 시기에 국가의 개념을 둘러싼 담론이 전례 없이 활발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국가의 위엄은 적어도 대학이나 고위 공직자의 환경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공감을 얻었다. 1815년 이후 프로이센 국가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데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은 없다. 이 슈바벤의 철학자는 1818년에 피히테가 떠나고 비어 있던 신설 베를린 대학교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헤겔은 국가가 의지와 이성, 목적을 지닌 유기체라고 주장했다. 국가의 운명은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변화하고 성장하며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볼 때, 국가는 ‘스스로 의지를 실현하는 이성의 힘’(Macht der Vernunft)이었다. 국가는 소외된 채 경쟁을 벌이는 민간 사회의 ‘특수한 관심’이 응집력과 정체성으로 용해되는 초월적인 영역이었다. 국가는 신성해 보이는 목적을 가진다는 것이 헤겔의 국가관에 들어 있는 이론적 핵심이다. 국가는 ‘세계에 담긴 신의 자취’(Gang Gottes in der Welt)였다. 헤겔에 이르러 국가는 시민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주체에게 보편성을 되찾게 해주는 신성해 보이는 기구가 되었다. 이런 접근방식으로 헤겔은 푸펜도르프와 볼프 이래 프로이센 정치이론가들의 지배적인 관점, 즉 국가는 그것을 만든 사회의 내적, 외적 안전욕구를 충족시키도록 설계된 기계에 다름 아니라는 견해를 타파했다. 헤겔은 국가를 기계에 비유한 견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가 후기 계몽주의 이론가들이 선호한 국가론에 반대한 까닭은 그것이 ‘자유로운 인간’을 단순히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취급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헤겔 철학에서 보는 국가는 강제로 세운 구조물이 아니라 한 국민의 윤리적 실체에 대한 고도로 다듬어진 표현이자 초월적이고 합리적인 질서의 전개였으며 ‘자유의 실현’이었다. 그 결과 시민 사회와 국가의 관계는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호혜적인 것이었다. 그는 국가가 시민 사회 스스로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질서를 세울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국가의 활력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이해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것들이 “특수한 기능에 적극적인 시민 사회를 만들어내며 개별적 영역이 잘 갖춰져야 보편적인 것이 형성된다.” 헤겔의 국가론은 자유주의적인 관점이 아니었다. 프랑스 자코뱅당에서나 가능했던 단일한 국가 입법자를 옹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관점에 진보적인 성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코뱅당의 실험에 대한 온갖 불안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프랑스혁명을, ‘생각하는 모든 민중’으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은 ‘빛나는 일출’로 반겼다. 베를린의 헤겔 제자들은 혁명이 ‘되돌릴 수 없는 세계정신(Weltgeist)의 업적’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성을 중심에 놓고 발전을 파악하는 태도는 헤겔의 국가관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헤겔이 생각하는 국가에 특권 계급이나 사적인 관할권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헤겔은 국가를 당쟁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진보가 (정치사회적 질서의 유익한 합리화라는 의미에서) 프로이센 국가에서 구현되듯이, 단순히 역사 전개의 특징일 수도 있다는 신선한 가능성을 고려했다. —p. 582~583
어떡하다 이렇게 되었을까? 왜 3월에 그토록 강렬하게 전개된 혁명이 11월에 그토록 쉽게 좌절되었을까? 이와 관련해 흔히 지적되어온 것은, 베를린의 바리케이드에서 죽어간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투사들과 ‘2월 내각’의 장관 자리를 차지한 자유주의 노선의 부유층 사업가들이 전혀 다른 사회적 세계를 대표했고 그에 따라 상반되는 정치적 기대를 표출했다는 점이다. 그 여파로 빚어진 분열은 혁명 기간 내내 이어졌다. 예컨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무기력하게도 5월의 국민의회 선거를 위한 공동후보를 내세우지 못한 것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 우파 진영의 후보에게는 반대로 승리를 의미했다. 베를린의 국민의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은 급진적인 정책의 중심에 있는 사회 문제를 일관되게 과소평가하거나 비난했다. ……이밖에 혁명이 프로이센 왕국의 특정 지역에 제한되었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혁명은 무엇보다 도시의 사건이었다. 시골 지역의 저항도 분명히 널리 확산되었지만, 라인란트 일대를 제외하면 시골의 소요는 특정 지역에 심하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도시 정치인들은 시골에서 인민의 관심과 지지를 받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농촌 지역의 시위대가 원칙적으로 왕이나 국가 혹은 국가기관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드물었다. 시골은 대부분, 특히 엘베강 동부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왕을 지지했다. —p. 651~653
만일 민족주의가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정치적 해체를 의미한다면, 독일에서는 그것이 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독일 민족주의의 목표는 단일한 국가로 추정되는 조국 독일의 갈라진 땅을 굳게 결속하는 것이었다. 다만 실제의 새 독일이 정확하게 어떤 모습일지는 불확실했다. 통일된 새 국가는 전통적인 군주국의 권한 및 힘과 어떻게 화해를 하게 될 것인가? 중앙 정부에는 얼마나 많은 권한이 집중될 것인가? 새 통일 독일을 이끌 나라는 오스트리아인가, 프로이센인가? 국경선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이런 물음들은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 끝없는 다툼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였다. ......민족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프로이센 당국의 태도는 양면적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원칙적으로 독일 각 지역 군주들의 권위에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체제 전복적이고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전후 시기에 '선동정치가'들에 맞서 전개된 운동 배후의 논리였다.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센 정부는 독일 지역의 국가에서 더 탄탄하고 응집력이 있는 정치기구가 탄생하는 것에 대하여, 그 과정이 베를린 정치권력의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는 한 원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프로이센이 관세동맹을 지원하고 더 강력한 연방 안보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논리였다. 이렇게 일관되기 이기적으로 지역 간의 결집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전쟁 직후의 현실보다 1840년대에 들어 민족주의에 대한 반응이 좀 더 미묘하게 변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만일 민족적인 정서가 관리될 수 있는 것이라면, 또 그것이 프로이센 국가와 협력 가능한 체제로 흡수될 수 있는 것이라면, 민족적인 열기는 가꾸고 개발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이런 정책은 물론 주목받는 민족주의자들이 프로이센의 이익과 독일의 이익이 같은 것이라는 점을 납득하기만 한다면 결실을 맺을 수도 있었다. —p. 657
1848-50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무엇보다 프로이센 행정부가 여전히 얼마나 일관성이 없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왕이 여전히 (내각 전체나 각 부처보다) 의사결정 과정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 측근의 파벌주의와 경쟁심이 심각한 문제로 남았다. 사실 어떤 면에서 이런 경향은 혁명으로 더 강화된 측면도 있다. 혁명은 왕으로 하여금 궁정의 보수파 품 안으로 파고들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베를린 내각의 우유부단함은 다시 슈바르첸베르크의 결심을 굳혀주어 헤센-카셀 문제에서 프로이센을 심하게 압박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과격한 리더십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안정적으로 독일 내의 권력을 공유할 수 있는 보수파와 합의를 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오스트리아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했던 것처럼 여전히 프로이센 내부의 분열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프로이센으로서는 오로지 강력한 수상이 국왕 측근을 억누르고 정부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발휘할 때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군소국들의 개별주의는 또 다른 장애물이었다.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의 통일 프로젝트를 거부했다. 바덴과 작센도 연합 체제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이런 반응은 3개국 전체의 왕권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프로이센이 흘린 피의 대가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것이었다. ……프로이센이 관세동맹과 독일의 안보정책, 혁명 진압을 통해 쌓아온 그간의 온갖 공로에 대한 대가는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이런 아이러니를 놓치지 않고 꿰뚫어본 사람은 당시에 통찰력이 있는 두 명의 프로이센인이라고 할,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이들은 1850년 런던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프로이센 곳곳에서 반동 세력의 통치가 되살아났다. 이 세력이 재기하면 할수록 군소국의 군주들은 프로이센을 버리고 오스트리아의 품에 안길 것이다. [1848년] 3월 이전의 방식대로 통치를 할 수 있게 된 지금, 절대주의 오스트리아는 반동 세력에 가깝다. 절대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자유주의자이고자 하는 권력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 프로이센 통치자들이 왕조 역사의 고비마다 배워야만 했던 또 다른 교훈이 있었다. 즉 독일 문제는 궁극적으로 유럽 문제라는 것이다. —p. 671~673
프로이센은 언제나 누군가에 의지하는 사람 같았다. 언제나 자신을 도와줄 상대를 찾으면서 결코 자립할 의지가 없는 사람, […] 회의에는 참석하지만 전투에는 빠지는 사람, 얼마가 되었든 이상이나 감성은 있지만 현실 앞에서는 수줍음을 타는 사람 같았다. 프로이센은 대군을 거느렸지만 그 군대는 전투의지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 어떤 나라도 프로이센을 우방으로 여기지 않으며, 어떤 나라도 프로이센을 적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프로이센이 강대국이 되었는지는 역사가 말해주지만, 왜 프로이센이 아직도 강대국인지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 687
“원칙이라는 잣대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긴 막대를 가로로 입에 물고 좁은 숲길을 달리는 것과 같다.” —p. 701
......1866년의 승리로, 독일 각국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벌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긴 경쟁의 역사는 끝이 났다. 단단히 결속된 프로이센 영토는 이제 서쪽으로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의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러시아령 리투아니아의 평지까지 뻗어 있었다. 프로이센은 새로 창설된 북독일 연방의 인구 중에 5분의 4 이상을 차지했고 베를린을 중심으로 북독일의 23개국이 연방을 구성하게 되었다. 헤센-다름슈타트,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등 남독일 국가는 합병을 면했지만 프로이센의 영향권에 들도록 한 동맹협정에 서명해야 했다. 북독일 연방이 어쩌면 조금은 구독일 연방의 연장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로이센의 지배 체제를 숨기려는 눈가림에 지나지 않았다. 프로이센이 군사 및 외교 분야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북독일 연방은 빌헬름 왕 자신이 말했듯, ‘프로이센의 늘어난 팔’(der verlängerte Arm Preußens)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신연방은 1866년에 정착된 권력 정치에 반(半)민주적 정통성을 부여한 측면이 있다. 헌법의 테두리에서 볼 때 프로이센 역사 혹은 독일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실험적인 체제였다. 북독일 연방에는 가맹국의 전체 시민(남자)을 대표하는 의회가 있었고 그 대표자는 1849년의 혁명가들이 기초한 제국선거법의 토대에서 선출되었다.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권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일체 없었다. 25세 이상의 남자라면 누구나 보통, 평등,비밀투포에 대한 권리가 있었다. 북독일 연방은 이처럼 혁명 이후 통합 국면의 뒤늦은 결실 중 하나였다. 그것은 군주 내각의 구정치적 요소에 국민의회의 대표성에서 나오는 새롭고 전례 없는 논리가 혼합된 형태였다. —p. 732~733
아마 새로 생긴 정치적 질서에서 (헌법이 규정하는) 가장 두드러진 면모는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하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이런 면모는 1848~1849년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의 자유주의 성향의 법률가들이 준비했다가 폐기된 제국헌법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헌법은 모든 개별 국가가 참여하는 정부의 단일한 정치 원칙을 규정했으나 새 제국의 헌법은 그렇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헌법이 각 구성국의 위상과 구별되는 ‘제국의 권능’(Reichsgewalt)을 세우기로 한 데 비해, 1871년 4월 16일의 헌법은 독일의 통치기관이 ‘연방 구성국의 대표로’ 구성되는 연방상원(Bundesrat)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헌법은 정치 현실과 무관할 때가 많다. 1845년 이후 소비에트 연방 국가들의 ‘헌법’이 실현 가능성 없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언급한 것을 생각해보라. 1871년의 ‘제국헌법’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후 수십 년간 독일 정치는 연방상원에 부여된 권위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갔다. 비록 비스마르크 수상은 언제까지나 독일이 ‘영주 동맹’으로 남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헌법에서 보장한 연방상원의 권한은 결코 충족되지 못했다. 그렇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단순히 군사적으로나 영토의 크기로나 프로이센의 위상이 지나치게 앞선다는 현실이었다. —p. 749~750
......프로이센의 선거제도는 강력한 농업 로비가 뿌리내리는 데 유리했다. 이것은 또 선거구 절대 다수의 요구를 대변하는 농촌 인구의 상당수가 3계급 시스템을 농촌 이익을 보장하는 최선의 제도로 보았음을 의미했다. 프로이센에 도입된 직접, 비밀, 보통 선거제도가 보수당과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의 기반을 잠식하고, 특혜세율과 수입 식품에 대한 보호관세로 혜택을 보는 농업 분야의 재정적인 특권을 위태롭게 했다고 보는 데는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사회민주당(die Sozialdemokraten, 사민당)이 독일 제국의회 선거에서 다수당이 된 1890년 이후, 3계급 시스템이 혁명적인 사회주의에 맞서 프로이센을 지키고 프로이센의 제도와 전통을 보호하는 유일한 보루라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비단 보수파뿐만 아니라 많은 자유주의 우파와 일부 시골의 가톨릭 신도까지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3계급 선거제도는 시골에서 보수파가 영향력을 강화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광범위한 제도개혁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였다. ......프로이센 체제는 스스로 발목을 잡았다. 헌법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바로 비스마르크가 의도했던 대로 독일이라는 체제 안에 있는 보수파의 닻이 되었다. 지주계급의 이기적인 정치는 특별히 나쁠 것이 없었다. 자유당 좌파가 친기업적 저세율 정책을 노골적으로 선호하는 것이나 사민당이 오로지 미래의 ‘독재’가 보장된 독일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하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관심사와 정치문화까지 어느 정도 체제 자체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지주와 그들의 보수파 동맹 세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독특하고 독립적인 프로이센이라는 바로 그 생각의 소유자라고 주장했다. 1899년부터 1911년까지 거의 모든 독일 영토에서 실질적인 선거개혁이 이루어지는 동안, 프로이센은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선거방식에 묶여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프로이센 시민들에게는 평등, 직접, 비밀 선거의 기회가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17년 여름에 가서 전쟁의 압박을 받고 국내의 반대여론이 커지자 프로이센 정부는 구선거제도에 대한 방침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좀 더 진보적인 선거방식하에서 군주제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전에, 1918년의 패전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 의제는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p. 753~754
아마 비스마르크의 실패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프로이센의 가톨릭 정당이라고 할 가톨릭중앙당(Zentrumspartei)의 눈부신 성장일 것이다. 물론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의회 내에서 이들을 고립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국의회 선거에서 독일 유권자의 가톨릭중앙당 지지가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871년에 프로이센 가톨릭 신도들은 23퍼센트만 중앙당을 지지했지만, 1874년에는 이 비율이 45퍼센트로 늘어났다.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이 밎은 참화에 상당 부분 덕을 본 중앙당은 사회 환경에 깊이 뿌리박은 상태에서 이때까지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던 가톨릭 신도들을 동원하고 당파 정치의 전선을 확대하면서 “일찌감치 세력을 떨쳤다.” ......프로이센이 종파 분쟁에 따른 긴장에 익숙하다고는 해도 비스마르크가 벌인 반가톨릭 운동의 규모와 잔인함은 이 나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1830년대 후반에 이교혼을 둘러싸고 극적인 논쟁이 벌어졌던 것은 부분적으로 이 문제의 정서적 특성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제도적 갈등이었다. 이 경우엔 행정적 회색 지대 내 권한의 경계를 설정하는 게 관건이었다. 이와 반대로 ‘문화투쟁’은 ‘문화적인 전쟁’으로서 새로운 국가의 정체성이 위태로워 보이는 그런 싸움이었다. —p. 769~770
......국가가 헌법 조문을 더 강력하게 집행하기를 주저하는 것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대인의 태도에도 확실히 근거가 있었다. 한편으로, 프로테스탄트 농촌 지배층은 정부 관직 임명권 가운데 자신들의 몫에 대단히 집착했고, 다른 한편으로 더 나쁘게 정부 당국이 ‘주민들의 분위기’ 운운하며 헌법 이행이나 평등한 행정 원칙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하면서 정부 당국은 반유대주의 논란에 빌미를 제공했다. 유대인이 국가와 가장 가까운 우호 세력인 데 비해, 반유대주의는 의문의 여지 없이 가장 화해하기 어려운 국가의 적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였다. 반유대주의자들에게는 ‘국가’(Staat)라는 말 자체가 인공물이나 기계 같은 비인강성을 함축하는 의미라면, 반대로 ‘민족’(Volk)은 유기적이고 자연스러운 속성을 지닌 말이었다. 그들이 국가라는 조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형태는 국가기구가 (정치적이 아니라 종족적인 동일체로서) ‘민족’의 자율적 권한을 위한 도구로 강등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폴란드인에 대한 정책과의 유사성이 있다. 폴란드인과 유대인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 집단이기는 했지만, 양 집단 모두 프로이센을 경영하는 보수 엘리트들의 정책 영역이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차별 없는 법적 권한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는 근대 국가의 정치 논리가 민족이라는 종족 논리와 충돌했다. 여기서 한 발 양보하는 쪽이 (프로이센) 국가의 생각이라면 큰 목소리를 내는 쪽이 (독일) 민족의 이데올로기였다. —p. 784
1848~50년에 나온 프로이센 헌법에서 결정적인 흠 가운데 하나는 민간 부문과 군사 부문의 권한을 통합하는 데 실패한 것이었다. 우리가 보았듯이, 1848년의 혁명은 프로이센 왕정 체제에서 군사적 요소를 제거하지 않은 채 프로이센 정치를 합법화했다. 이것은 신독일제국이 구프로이센 국가로부터 물려받은 결함이었다. 그리하여 군비 통제에 대한 문제가 미결 상태로 남게 되었다. 1871년의 헌법은 한편으로 “황제는 제국 군대의 효과적인 병력과 분할, 평성을 결정한다”(63조)라고 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평시의 효율적인 군사력은 제국의회의 입법에 의해 결정된다”(60조)라고 규정했다. 이같이 불확실한 규정은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에 주기적으로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국이 존속한 동안에 있었던 제국의회를 해산시킨 네 차례 칙령(1878, 1887, 1893, 1907년) 중에 세 번은 군비 통제와 관련한 이유로 나온 것이었다. —p. 804~805
......보수파가 때때로 생각한 것과 달리 그들만이 프로이센에 충성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성장해온’ 공동체의 독특한 성격이 아니라 비인격적이고 초역사적인 변화의 도구로서 국가에 애착을 가진 대안의 전통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통일 이후 역사관을 확신시킨 ‘프로이센 학파’가 첫 개화기에 찬양한 프로이센이었다, ‘보루시아’(Borussia) 역사가들의 웅장한 서술 속에서 국가는 상석을 차지했다. 그것은 신성로마제국의 산만한 구조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치밀한 답변이었다. 그것은 혼미하고 편협한 지방주의에 대한 대응책이자 그곳을 다스린 자들의 권위에 대한 균형추이기도 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역사 서술이, 모든 역사는 왕조 국가와 대조적으로 자유의 매개체로서 시민 사회의 융성이라는 휘그당의 목적론적 인상을 전한 데 비해, 프로이센에서는 그 명제가 반대였다. 여기서는 국가가 구귀족의 자의적이고 개인화된 정권을 대신하여 점점 합리적인 질서를 전개하면서 융성하기 시작했다. —p. 819
1930년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프로이센에서 가장 중요한 우파 정치조직은 독일국가인민당(Deutschnationale Volkspartei)이었다. 1918년 11월 29일에 창당된 국가 인민당은 공식적으로 전전 시대의 프로이센 보수정당을 계승하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국가인민당은 프로이센 정치에서 새로운 세력을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엘베강 동부 지역의 지주계층은 이제 이들의 지지 그룹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무원, 비서, 사무보조원에서 중간 및 고위급 관리자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화이트칼라 직장인 다수가 똑같이 이 당에서 관리해야 할 유권자였기 때문이다. ......이 당은 실용적인 온건부수주의자에서 열광적인 왕정복고파, 극렬 민족주의자, ‘보수적 혁명가’, 인종차별적인 ‘민족적’ 급진주의 옹호자 등 잡다한 정파가 뒤섞인 연대였다. 이 점에서 국가인민당은 ‘구’프로이센 보수주의와 독일 ‘뉴라이트’ 극단주의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서 불안한 상태를 유지했다. 옛 엘베강 동부 지역의 보수주의라는 정치, 문화적 기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1890년대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다가 1918년 이후 완전히 해체되었다. 보수 네트워크가 최초로 피해를 입은 것은 1918~19년 혁명에 의해서였다. 사실상 농업의 정치적 로비를 도맡았던 전면적인 특권조직이 사라진 것이다. 황제가 퇴위하고 공화국이 선포됨으로써 지주 귀족의 영향력을 위해 비할 데 없는 지렛대 역할을 해온 특권과 후원으로 이루어진 구시스템이 관료 사회에서 허물어졌다. 그리고 3계급 선거권의 폐지는 보수파의 정치적 주도권을 위한 선거 기반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과거 보수적인 환경의 잔재가 해체되는 과정에는 종교적 요인도 있었다. 엘베강 동부 지역의 주민 다수를 구성하는프로이센 연합교회의 프로테스탄트에게, 국왕을 잃었다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연합교회는 언제나 특별한 의미를 띠는 왕실기관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국왕은 ‘직권상’ 연합교회 최구의 감독이자 후원자로서 종교 생활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별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면 한때 엘베강 동부 지역을 좌지우지했던 구프로이센 엘리트 계층, 즉 융커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들은 패전과 혁명으로 촉발된 변혁에 가장 많이 노출된 사회 집단이었다. 프로이센 군부 귀족 중에 나이가 좀 든 세대에게 패전과 혁명은 충격적인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p. 846~850
브뤼닝이 이탈함으로써 근근이 유지되던 바이마르 민주주의는 마지막 외형마저 무너졌다. 브뤼닝의 자리를 채운 것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공화 체제를 해체한 극보수주의 내각이었다. 1932년 6월 1일, 힌덴부르크는 신임 총리로 프란츠 폰 파펜을 임명했다. 베스트팔렌의 귀족 지주 출신으로 대통령의 옛 친구이기도 한 파펜은 진정으로 반동적인 본능을 가진 남자였다. 대통령에게 파펜을 임명하도록 설득한 사람은 노련한 모사가로서 내각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국방장관 쿠르트 폰 슐라이허였다. 핵심 역할을 한 또 다른 인물은 내무장관인 빌헬름 폰 가일이었다. 가일과 파펜, 슐라이허 세 사름은 숱한 전술적인 문제에서는 의견이 달랐지만, 모두 정당을 해산하고 곳곳에서 선출된 의회권력을 억누르고 보수적인 ‘새 나라’를 건설하자고 열광적으로 주창했다. 또한 그들은 공화제를 끌어내릴 때가 되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첫 단계는 나치를 달래고 보수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에서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회를 다시 해산할 것을 요구했는데, 폰 파펜은 6월 4일 총리에 임명되고 불과 3일 만에 의회 해산에 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을 받아냈다. 이로부터 열흘 뒤에 그는 나치 친위대(SS)와 나치 돌격대에 대한 전국적인 금지령을 보류했다. 원내에서 나치당이 그의 청리직 잔류와 긴급명령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히틀러의 약속에 대한 답례 차원에서 내린 조치였다. 이리하여 ‘우파 통합’이 시작되었다. —p. 857~858
나치에 권력을 헌납한 음모의 타래는 프로이센의 유산에서 빠져나온 실가닥으로 두툼하게 짜였다. 이것은 1930년 이후 공화국과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다가 직접 개입한 군부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술수는 엘베강 동부 지역 지주의 이익에 민감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브뤼닝 총리와 슐라이허 두 사람은 엘베강 동부 지역의 분할이 포함된 토지개혁 운동을 지지한 직후에 대통력의 신임을 잃었다. 구프로이센 지역에서 보수파가 주도권을 행사했던 시절의 생생한 기억은 공화국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반동 세력의 정치적 환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프로이센 귀족이라는 오만함과 주도권을 쥐려는 태도는 무엇보다 자신과 ‘남작들의 내각’이 히틀러를 ‘고용했다’라고 허풍을 떠는 프란츠 폰 파펜의 태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나치 지도자가 시간제로 근무하는 정원사나 거리를 떠도는 음유시인이라도 된다는 투였다. 힌덴부르크에게도 지위와 위엄의 차이에 따른 엄청난 거리감이 있었다. 프로이센군의 원수인 그 자신과 오스트리아의 일개 병장 출신인 히틀러 사이에 놓인 격차는 히틀러의 진정한 면모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차이는 히틀러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그가 얼마나 쉽게 전통과 정치 질서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p. 864~865
많은 분석의 공통점은 사실상 두 개의 독일이 있다고 보았다는 데 있다. 자유롭고 푸근한 인상에 평화로운 남부 및 서부의 독일과 반동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북부 및 동부의 독일이다. 이 두 개의 독일 사이에 감돌던 긴장이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세워진 제국에서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는 것이다. 일찍이 이 문제를 파고든 미국의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가장 정교하고 영향력이 큰 분석가 중 한 명이다. 1915년에 출간되는 1939년에 재발간된 독일 산업사회에 대한 연구에서 베블런은 한쪽으로 치우친 근대화 과정이 독일의 정치문화를 일그러트렸다고 주장했다. ‘모더니즘’이 산업조직의 영역을 변화시키기는 했지만 국가조직에 강력하고 지속적인 거점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베블런은 그 이유를 근대 이전의 프로이센에 본질적이라고 할 ‘영방국가’(territorial state)가 살아남은 데 있다고 진단하고, 이런 국가는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공격적인 역사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 결과 극단적 굴종이라는 정치문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전쟁 추구는 지도자에 대한 추종 훈련이자 자의적인 명령의 집행이고, 그것은 열광적인 굴종과 권위에 대한 맹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에서 국민의 충성심은 ‘끊임없는 적응’과 ‘그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기민하고 지칠 줄 모르는 단련’ 그리고 ‘관료 사회의 감시와 국민의 사생활에 대한 지속적인 간섭’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그의 이론적 근거에는 ‘근대’(modern)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이 개념에 비춰볼 때 프로이센은 과거의 낡은 티를 못 벗어났고 시대착오적이며 부분적으로만 근대화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의 독일 역사 서술에 많은 영향을 준 ‘특수노선’이라는 논제가 이미 베블런의 설명에서 충분히 예견된 것은 놀랍기만 하다. —p. 891~892
이런 충격적인 조치는 점령 지역에서 연합군이 실시한 독일인 재교육정책의 일환이었다. 여기서 목표는 독일인의 사고를 대상으로 ‘탈프로이센화’를 실시하고 ‘심리 구조’로서 프로이센을 머리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연합군 사이에 합의된 적도 없고 개별 점령 정부에 의해서 그 의미가 규정된 적도 없었지만, 이런 발상은 영향력이 있었다. 전후 독일의 역사교육에서 프로이센은 가볍게 취급되었다. ......게다가 이런 노력은 1949년에 두 개의 독일이 건국된 이후, 독일 정치를 좌우한 세계의 지정학적 규범으로 강화되었다. 이제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동독)이 철의 장막 양쪽에 포진한 상태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세계를 가르고 있었다.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가 무조건적인 친서방정책을 추구했다면, 공산주의 동독은 ‘소련이라는 시험관에서 나온 아기’라는 말처럼 모스크바의 정치적 속국이 되었다. 전후 세계의 영구적인 특징으로 보이게 된 이런 억압적인 분단 구조에서 프로이센이라는 과거는 대중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p. 903~904
......고국(Heimat)이라는 전통적인 근대의 이데올로기는 단일한 독일 국민이라는 문화적, 민족적 개념과 매끄럽게 하나로 이어졌지만 새로 부가된 프로이센 주(Preußen Staat)라는 비유기적인 구조는 피해 갔다. 프로이센이라는 정체성은 위로부터의 요인(민족주의)과 아래로부터의 요인(경쟁적 지역주의)에 의해 동시에 침식되었다. 오로지 마르크 브란덴부르크에서만 (그리고 포메른에서는 좀 더 좁은 범위에서) 지역주의 정체성이 발전하여 프로이센 및 그 독일적인 사명에 대한 충성심을 직접 자극했다. 하지만 폰타네의 예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서도 지방의 재발견과 그곳 주민들의 정서에 대한 주장은 프로이센을 등진 것일 수 있다. 흔히 ‘프로이센 정신’의 옹호자로 간주되는 폰타네조차 프로이센 주에 대해서는 사실상 극히 양면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는 1848년 혁명 기간에 발표된 신랄한 비평의 첫 문장에서 “프로이센은 거짓말이었다”(Preußen war eine Lüge)라고 선언하며 덧붙였다. “오늘날의 프로이센에는 역사가 없다.” —p. 909~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