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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 편, 역사 한 편일상/book 2020. 11. 20. 23:29
장 폴 사르트르는 철학가이기도 하지만 여러 문학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의 실존주의 철학을 접하기에 앞서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망설여졌다. 사실 사르트르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이 뭔지도 잘 몰랐고, 어떤 책부터 시작해야 그의 세계관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막연히 그의 작품을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하던 중, <구토>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로캉탱이라는 한 남성이 관찰하는 일상을 그린 이 글은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달리 말하면 주인공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종잡을 수 없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단어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막연하기도 하다.
바닷가에서 집어올린 조약돌 하나가 주인공 자신에게 구토감을 일으킨다는 소설의 첫 대목은 퍽 인상적이다. 로캉탱의 시야에 들어온 사물들은 하나하나 껍질이 벗겨지고 맨살을 드러낸다. 조약돌, 길거리, 가로수, 벽돌, 심지어는 시간까지도 그러하다. 그렇게 까발려진 사물에게 남겨지는 것은 ‘존재’이다. 울퉁불퉁한 나무의 껍질, 누렇게 얼룩이 낀 벽돌, 넝마가 나뒹구는 쓸쓸한 길가의 속성들을 제거해보면 나무와 건물, 거리라는 존재만이 남는다. 따라서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명제다.
한층 난해해지는 대목은 존재로 가득한 이 세계 안에서 이 존재와 저 존재와의 만남은 지극히 우연적이라는 점이다. 존재들은 예정된 의도에 따라서 조우(遭遇)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의 스침처럼 어쩌다가 마주치는 것이고 때문에 무상(無常)하다. 이러한 주인공(로캉탱)의 시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면, 로캉탱이 도서관에서 만난 남성과 레스토랑의 테라스에 앉아 휴머니즘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휴머니즘과 연대(solidarité)를 강조하는 남성에게, 로캉탱은 정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냐고 빈정거린다. 사람과 사람을 잇고 타인을 위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로캉탱의 일갈은, 매정하기도 하고 (그의 화법을 보면) 비열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일리가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가벼운 동기에 의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로캉탱은 존재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그 남성이 쉽게 휴머니즘과 연대를 운운하는 것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여분’. 이 책에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단어다. ‘여분’이라는 건 필요한 만큼 쓰고도 남는 것을 뜻한다. 거꾸로 말하면 불필요함 또는 과잉이다. 로캉탱은 다른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 ‘여분’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물을 인식할 때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분’을 느낀다는 것은, 인식 안에서 형성된 관계가 사치스럽고 덧없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그렇다면 사르트르는 완벽히 허무주의자인가. 적어도 이 책으로만 봐서는 그렇다. 사물의 궁극에는 존재가 있다는 것 말고, 존재들 속에서 어떠한 가능성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책의 말미에 옮긴이가 글을 남긴 것처럼, 사르트르는 ‘실존’이라는 주제에서 인간이 떠안을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모색했다고 한다. 인간이야말로 헐벗은 존재에 본질을 부여하고 이를 구별하며 질서를 매길 수 있는 능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그만큼 조화로운 역량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존재의 바닥에 도달하려는 사르트르의 시도는 신선하다.
이 책은 본문만 9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이전에 읽었던 <독일 현대사>와 견주어 가며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책은 한 번 빠져들면 손에서 책을 놓기가 어렵다. <독일 현대사>가 비스마르크의 등장부터 독일 통일의 현대 독일사까지 다루는 반면, 이 책은 길게는 16세기의 호엔촐레른 가문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프로이센이 소멸되는 2차 세계대전 즈음까지 다루기 때문에 시간적인 스펙트럼이 다르다. 따라서 군주국가로서 프로이센이 지녔던 색채가 크게 다뤄지지 않는 <독일 현대사>에 비해, 이 책에서는 프로이센이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프로이센의 유산이 이른바 독일의 ‘특수노선’—경제적으로는 근대화에 성공했지만 정치문화적인 근대화에 뒤처짐으로써 독일에서 발흥한 군국주의를 설명하는 방식—에 어떠한 방식으로 결부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나아간다.
비슷한듯 다른 두 책의 또 다른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내용의 범위에 있다. <독일 현대사>는 대체로 정치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독일의 정당정치, 정치전략, 제도와 법규, 정치가의 행적을 살펴볼 때 유익하다. 반면, <강철왕국 프로이센>은 문화사, 경제사, 사회사를 보다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독일 현대사>보다 세밀함은 적지만 거시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그렇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프로이센’이라는 테마가 있기 때문에, 적어도 비스마르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프로이센에 대해서는 각각의 왕마다 상세하게 개인적인 면모와 리더십, 정책이 다뤄지는 편이다.
<독일 현대사>와 <강철왕국 프로이센>이라는 책을 읽었다고 해서 오늘날의 독일을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지금의 독일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는지 어렴풋하게 윤곽을 잡을 수는 있을 것 같다. 현시점을 살아가는 우리는 흔히 ‘냉전으로 인해 분단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독일과 우리나라가 공통점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독일의 역사가 걸어온 시간의 융단을 쭉 펼쳐보면 독일과 우리나라는 분단에 이르기전까지 거쳐온 역사적 경로가 매우 다르다. 달리 말하면 분단—만약 그것이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한다면—을 해소하기 위한 접근법에서 독일과 우리나라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물론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분단이 발생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나 현재의 환경이 서로 너무 다르다.
가장 큰 차이라 한다면 ‘연방주의’에 대한 경험의 유무일 것이다. 독일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통일을 이룩한다. 그 이전까지는 책의 표현처럼 ‘누더기’ 또는 ‘조각보’처럼 매우 복잡한 국경을 맞댄 크고 작은 국가들이 얽히고 설킨 집합체였다. 게다가 독일은 유럽 안에서도 이렇다할 자연적 경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정치적인 경계에 의존해야 했다. 물론 프로이센이라는 압도적 우위를 띤 국가를 중심으로 연방이 운영되기는 했지만,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연방체를 만들기 위해 독일은 숱한 시행착오를 거쳤다. 마찬가지로 책에 언급되는 것처럼, 독일로서는 주변국의 눈엣가시가 되지 않으면서 국가를 규합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생존이 걸린 문제였고, 신교와 구교의 갈등은 독일의 결집을 강화하기도 하고 약화하기도 하는 변화무쌍한 변수로 작용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연방에 대한 경험이 없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600년 가까이 중앙집권적인 국가였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분단 상황처럼 리더십이 대립되거나 지자체별로 성질이 크게 다른 제도를 운영한 적이 없다. 사실 거꾸로 얘기해보면 오늘날 ‘독일’이라는 꼴로 국가를 만든 ‘도이칠란드’라는 국가야말로 신기하기도 하다. 호엔촐레른가의 역사가 등장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라인란트, 작센,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 등 색채가 너무나도 다른 지역들이 프로이센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언뜻 정돈되지 않은 듯한 좌충우돌 형태의 국가에서 칸트가 나오고 헤겔이 나왔으며 베토벤이 탄생했다는 것도 새삼 놀랍다. 또 통일의 과정이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이탈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쌓아나가는 와중에 이루졌다는 것도 무척 신기하고, 이러한 부조화 속에서도 착실히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는 것도 신기하다. 신기한 것 투성이다.
다만 유럽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강대국으로 거듭나기까지 독일이 감수해야 했던 결함은 있었다. <현대 독일사>에서도 누누이 언급되듯이 삼계급 투표제도로 인해 융커(지주)들의 의사가 과잉 대표되었고, 이들의 의사라는 것은 곧 보수적이고 반동적이며 군국적인 성향을 띠므로 독일이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말하듯 독일이 양차 대전에 함몰되었던 이유를 모두 프로이센의 유산에서 찾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가 되겠지만, 분명 독일은 짧은 시기에 기형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을 마주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은—<독일 현대사>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뛰어난 전술가 정도로 생각했었지만—비판적으로 평가될 필요가 있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전쟁 상황을 통해 국왕에게 으름장을 놓던 힌덴부르크가 이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결국 당시 독일 국민들의 의식도 어느 정도 군국주의적인 성향에 경도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비슷한 부분과 다른 부분을 비교할 수 있고, 비교를 하다보면 우리나라의 강점은 무엇이고 문제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웃국가 일본에게도 이런 ‘특수노선’ 같은 게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 사실 생각해보면 독일의 대외적인 여건이 우리나라 못지 않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독일은 서베를린이라는 자유주의 진영의 선봉이 있었다), 어째서 우리의 분단상황이 더욱 견고하고 삼엄해 보이는 건지 아리송하기도 했고, 멋있는 독일 정치인은 <독일 현대사>에 나오는 전후 시대의 서독에서 많이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ND]'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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