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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일상/book 2020. 11. 25. 17:57
해마다 전집을 하나 독파하고 원서로 된 책도 한 권쯤은 읽었는데, 원서는 한 권 읽었지만(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 12월을 앞둔 아직까지 전집은 한 권도 집어들지를 못했다. 이탈로 칼비노의 전집은 사실 초여름쯤 구입했으니 사놓은지는 오래되었는데, 다른 책들에 손이 먼저 가다보니 책장 한켠에서 가지런히 새 책의 깔끔한 모습만 뽐내고 있었다. 여담으로 전집의 모든 책 표지들이 매우 다채롭다. 사실 이 전집을 구입할 때 이탈로 칼비노라는 작가의 작품을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고, 막연하게 평소 좋아하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와 같은 작품세계를 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충동적인 구매를 했었다. 근래에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을 하나둘 읽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이탈로 칼비노의 전집에 손이 갔다. 동화 같은 소설의 제목과 달리,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핀’이라는 소년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대개 인간의 다듬어지지 않은 욕망, 추한 이기심, 앞으로 돌진하는 극단적 태도들로 가득 차 있다.
처음으로 접하는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이다보니 반드시 끝에 달린 옮긴이의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었다. 얼마전 읽었던 <경멸>의 알프레도 모라비아 만큼 전후 이탈리아 문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히는 이탈로 칼비노는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이라는 첫 글을 내기까지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한다. 시행착오 가운데에서 그가 깨달았던 것은 전쟁 직후 가라앉지 않은 승리의 도취감, 각양각색으로 분출되는 열기,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이 레지스탕스의 관점에서 윤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광기의 결정체로써의 전쟁 안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은 단지 영광스러운 정치작업이 아니었다. 레지스탕스라는 활동 안에서 또한 광란의 욕망, 방향을 알 수 없는 정치적 지향점, 식상할 만큼 반복되는 배신이 함께 했다. 한 마디로 전쟁과 그에 대한 반동으로써의 레지스탕스 모두 단순한 악(惡) 이상의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작품 안에서 그려지는 전쟁과 전쟁에 대항하는 전쟁은 모두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역설적이게도 ‘핀’이라는 무구한 소년이 관찰자 시점으로 동원되는 것은, 이탈로 칼비노 소설가 자신이 개인적인 경험을 개입시키자면 전쟁에 대한 해석이 오염되기 때문이다. 핀에게 어른들의 맹목적인 치정(癡情)이나 좌우를 넘나드는 정치적 스탠스, 다양한 사회적 지위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 소년은 어른도 아니고 또래의 아이들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고 방관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자신이 놓인 시간과 공간을 이해해 나간다. 승자의 입장에서 전쟁에 대해 일면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대신 훨씬 입체적이면서도 관조적인 관점을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여전히 광기 어린 이 시대에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이 갖는 힘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인간은 살면서 한번쯤은 "첫 작품"을 쓸 때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終]
“핀, 형법은 잘못된 거야. 한 사람이 인생살이에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잔뜩 쓰여 있지. 절도죄, 살인죄, 횡령죄 같은 것 말이야. 하지만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어. 핀, 내 말 듣고 있니?”
—p. 60
……사람들의 뒤에는 앞서 나가는 커다란 기계, 매일매일의 작운 행동들이 밀고 나가는 기계, 다른 행동들은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리는 기계인 역사가 있다. 모든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서처럼, 역사 속에서도 논리적이어야 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역사와 인간의 머리 사이는 엄청나게 괴리되기도 하고, 또 뜻밖에 결합되기도 해서, 총체적 이성이 개별적 이성이 되어 버리는 어두운 구역과 낭떠러지가 남아 있었다……
—p. 147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분노가 있어. 오른팔네 파견대를 한번 보라고. 좀도둑, 헌병, 암상인, 군인, 떠돌이들이 뒤섞여 있어. 그들은 상처받은 사회 속에서도 몸 편히 지내고 있고,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도 그럭저럭 살아 나가며, 지킬 것도 변화시킬 것도 가지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야. 아니면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편집광들이거나 광신자들이지. 마치 자신들을 산산조각 내는 수레바퀴에 얽매여 있기라도 한 듯, 그들 속에는 혁명 사상이 자라날 수 없어. 아니면 극단주의자 요리사의 장황한 연설에서처럼 분노와 굴욕의 자식으로서 비뚤어진 형태로 생겨나지. 그러면 그들은 왜 싸우는 것일까? 그들에게는 진실된 조국도, 상상 속의 조국도 없어. 그렇지만 그들 내면에는 용기도 있고 분노도 있다는 걸 자네도 알 거야. 그런 용기와 분노는 다름 아니라 모욕적으로 살아온 자신들의 삶, 자신들이 걸어온 어두운 길, 자신들의 더러운 집, 어릴 때부터 배운 말들과 약해질 수밖에 없게 만든 피곤한 노동으로부터 생겨난 거지.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혹은 발을 잘못 디디거나 생각이 잠깐 삐딱하게 나가기만 하면 다른 편이 되거나 펠레처럼 검은 여단이 되어서 똑같은 분노와 똑같은 증오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향해서 총을 쏘아 대지. 똑같은 거야.”
—p. 156
“똑같지만 완전히 반대야. 우리는 옳고 저쪽은 그렇지 않거든. 우리는 무엇인가를 풀어 가려고 하고 저 사람들은 쇠사슬로 더욱 조이려 하지. 오른팔네 부대원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가 총을 쏘거나 적들을 죽임으로써 분출되는 묵은 분노를 똑같이 지닌 채, 파시스트들도 총을 쏘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화와 해방이라는 목표로 적들을 죽이게 되는 거야.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있지.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해방의 편에 서 있고 저들은 그 반대편에 있는 거야. 우리 편에서는 비록 그들과 똑같다 하더라도 몸짓 하나, 총알 한 방을 잃을 게 없어. 내 말 알아듣겠어? 그들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게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자손들을 해방시키는 데 사용될 것이고 더 이상 분노가 섞이지 않은 맑은 인간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이용될 거야. 그러면서 그 속에서 사악해질 수는 없겠지. 하지만 저들은 쓸모없는 몸짓들, 무용한 분노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비록 승리했다 해도 그건 쓸모없고 무용한 것들이지. 그것들은 역사를 만들지 못하고, 자유를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분노와 증오를 되풀이하고 영속시키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이십 년 혹은 백 년, 천 년 후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서 우리와 그들은 영원히 이름도 알 수 없는 분노를 불태우며 눈을 마주하고 싸울 것이고, 아마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우리는 해방을 위해 싸우고 저들은 노예로 남아 있기 위해 싸울 거야. 이게 바로 투쟁의 의미야. 공식적이며 다양한 의미를 넘어선 진정하고 총체적인 의미지. 인간적이고 원초적이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해방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당하고 있는 온갖 굴욕, 그러니까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착취, 농민 입장에서는 무지, 프티부르주아 입장에서는 억압, 하층민 입장에서 보면 부패와 같은 굴욕에서 생겨난 거지. 난 우리의 정치 작업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믿어. 우리의 해방을 위해 굴욕에 대항해서 그것을 이용하는 거야. 마치 파시스트들이 굴욕을 영속시키기 위해 그 굴욕을 이요하고 인간과 인간을 싸우게 만들듯이 말이야.”
—p. 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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