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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읽기 어렵지 않고 동화 같은 책이다. 직전에 읽었던 이탈로 칼비노의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처럼 소설의 관찰자 시점으로 꼬마가 등장한다. 소설은 변증법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선과 악 각각은 홀로는 완전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함께 있을 때라야 의미가 온전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악한 메다르도 자작[子爵]과 선한 메다르도 자작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꼭 선악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한 쌍을 이루는 모든 개념—음양, 좌우, 피아—에 <반쪽자리 자작>의 세계관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도그마(Dogma)는 어떠한 차이나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데, 이탈로 칼비노는 이러한 교조주의적 태도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선과 악 둘 모두를 긍정하는 팔메다, 세바스티아나 유모가 이탈로 칼비노가 바라는 모델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반대로 장인 피에트로키오도(기술만능주의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나 의사 트렐로니(자신의 역할을 외면하면서 명예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위그노파 에제키엘레(자신의 신앙이 가장 고결하다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모두 각자의 도그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한 가지 작가의 회의주의적인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은, 소설의 끝에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선악을 모두 겸비하게 된 메다르도 자작 역시 ‘이제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 혼자서는 행복한 시대를 만들 수 없었다’고 서술하는 구절이다. 다시 한 번 인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작가가 인정하는 대목이다. 어쨌든 되돌아와 핵심은 흑[黑]이 없이는 백[白]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도 저도 부정하고 회의하는 ‘회색[灰色]’이 되자는 것은 아니다. 그 모양은 오히려 체스판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완전함을 바라겠지만 동시에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아주 조금씩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fin]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둔감해서 모르고 있는 자신들의 완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나는 완전해. 그리고 내게는 모든 것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막연하고 어리석어 보여.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건 껍질에 지나지 않았어. 우연히 네가 반쪽이 된다면 난 너를 축하하겠다. 얘야, 넌 온전한 두뇌들이 아는 일반적인 지식 외의 사실들을 알게 될 거야. 나는 너 자신과 세계의 반쪽을 잃어버리겠지만 나머지 반쪽은 더욱 깊고 값어치 있는 수천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지. 그리고 너는 모든 것을 반쪽으로 만들고 너의 이미지에 맞춰 파괴해 버리고 싶을 거야. 아름다움과 지혜와 정당성은 바로 조각난 것들 속에만 있으니까.”
—p. 56~57
“아, 파멜라. 이건 반쪽자리 인간의 선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과 사물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사람이든 사물이든 각각 그들 나름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이지. 내가 성한 사람이었을 때 난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머거리처럼 움직였고 도처에 흩어진 고통과 상처들을 느낄 수 없었어. 성한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있지. 반쪼가리가 되었거나 뿌리가 뽑힌 존재는 나만이 아니야, 파멜라. 모든 사람들이 악으로 고통받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면서 너 자신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p. 84
“악한 반쪽보다 착한 반쪽이 더 나빠.”
......비인간적인 사악함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덕성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p. 103~104
그렇게 해서 외삼촌은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하면서도 선한 온전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아마도 우리는 자작이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옴으로써 놀랄 만큼 행복한 시대가 열리리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아주 복잡해져서 온전한 자작 혼자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p.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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