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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상과 아랍 문명일상/book 2020. 11. 28. 13:02
영미권 문화는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접하는 경우가 많아서 혼자서 시간을 보낼 때는 다른 문화권에 관한 글들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보통 대륙유럽—그 가운데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의 문화에 관심이 많고, 접하기 쉽지는 않지만 중동 문화에도 관심이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인도를 여행했던 것도 조금이라도 덜 알려진 이들 지역들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동국가들은 전쟁과 치안, 이란의 경우 국제적인 제재 조치로 인해 여행에 여러 제약이 따른다)
중동과 이슬람, 아랍 각각의 개념에 대해 한 번 소개한 적은 있지만(유진 로건의 <아랍: 오스만 제국과 아랍 혁명까지>) 어쨌든 쉽게 혼용되어 쓰이기 쉬운 이 지리적 공간, 종교 공동체, 문화권에 각별히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또 하나 더 있다. ‘-포비아(-phobia)’. 다른 말로 “혐오”. 오늘날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듯한 각종 혐오—또는 혐오감정—와 여기에 뒤따르는 갈등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의 또 다른 관심사 중 하나인데, 2001년도에 있었던 911 테러 이후 이슬람은 정말이지 포비아의 큰 축을 세웠다. 시리아 내전, 난민 문제, 연이은 극단주의 테러로 이들에 대한 국제적인 낙인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이러한 의제들을 민첩하게 정치 공간에 끌어들이는 정치인들도 많았다. 이민자 문제가 아직까지 사회적 화두가 아닌 우리나라에서조차 한때 제주도를 통해 난민 신청을 한 중동사람들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기도 했다.
두 개의 커다란 반도(소아시아 반도와 아라비아 반도)와 두 개의 커다란 만(홍해와 페르시아 만), 더 넓게는 네 개의 크고 작은 바다(지중해와 인도양+흑해와 카스피해)를 끼고 있는 지역에는 역사적으로 유달리 큰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오밀조밀한 유럽의 지리적 환경이나, 대륙과 반도 그리고 섬의 경계가 분명한 동아시아, 크고 작은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동남아시아와 달리, 지리적으로 완결성이 떨어져 보이는 이 지역에는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각 지역을 매개하는 강력한 제국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역사는 그간 큰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이 책은 8세기부터 압바스 왕조에서 시작해 약 2세기에 걸쳐 진행된 번역운동—저자는 이를 서양의 르네상스에 비견한다—을 소개하는데, 이들이 번역을 통해 탐구하려고 했던 대상들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까지 매우 다양하다)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글에서 느끼고 배운 점은 크게 두 가지다.
1. 패러다임 또는 범주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성급한 일반화를 부른다.
저자 디미트리 구타스 스스로 카테고리의 함정에 빠져서 일반화와 도식화를 택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멀리하기 위해, 번역운동이 이루었던 시간과 공간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소개하려고 노력한다. 반비잔틴적이면서도 친그리스적인 번역운동의 큰 갈래 안에는 크고 작은 지류들이 흐르고 있었고 그 속도나 세기, 방향이 조금씩 달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역사를 고대-중세-근대-현대의 순서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친숙하지만, 사실 근대사회에서도 중세의 특성이 남아 있는 영역이 있을 수 있고, 어느 국가는 이미 근대에 진입했을 때 선사 시대에 머물러 있던 부족도 있다. 단지 ‘편리’하기 때문에 대략적인 틀을 만들었을 뿐이지, 이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특정 시간과 공간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 디미트리 구타스가 이야기하는 바다. 극단주의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흔히 ‘정통 이슬람주의’나 ‘반동적인 이슬람 성향’에 대해 질타가 이루어지고는 하지만, 정말로 무슬림 사회가 “정통이 무엇인지” 규정하기는 했었는지, 그러한 규정은 어떤 형태인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우회적으로 역사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반대한다. 글도 논리적인데 불필요한 표현을 절제하고 분량도 200 페이지 정도여서 좋은 글이라는 생각을 했다.
2. 다른 문화의 수용에는 정책적인 전략이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
압바스 왕조의 초대 칼리프인 알-만수르가 그리스 사상을 치세에 활용한 의도는 전혀 순수하지 않다. 오히려 매우 정략적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기둥을 유지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지위를 강등시키고 기독교 세계로 편입되기 이전의 그리스 사상을 이슬람 안에 완벽하게 전용[轉用]했다. 정권을 공고히 하고자 추진했던 리더의 강력한 모멘텀은 실제로 순기능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문헌 안에서 자구의 의미를 헤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이슬람 사회 안에서 자체적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전수하는 순환이 생긴 것이다.
이후에 알-마문이 폐왕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흐나[재판 제도]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 사상을 전용하는데 이 또한 매우 전략적이다. 칼리프가 종교 문제의 최종 결정권자라고 천명하기는 했지만, 그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변증법적 신학 논쟁을 도입하는 것이 불가피했는데, 처음에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그리스의 논리학에서 빌려왔다. 때문에 압바스 왕조에서 낯설지 않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름이 수시로 거론되고, 설득력이 있고 옳은 의견이라면 종교에 대한 비판도 받아들였다.
오히려 근래에 이와 반대되는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사우디의 와하비 왕조가 그러하다. 와하비 왕조는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대하는 세력을 포섭하기보다 제거하고 제압하는 것을 택했는데,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양문물은 해롭다는 선전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 역시 전략적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압바스 왕조와 같은 포용 정책이 아닌 폐쇄 정책으로 등을 돌렸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그런 사우디에서는 여성이 운전할 수 있게 된 게 불과 2년 전부터이고 외국인들은 원칙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여행을 할 수 없는데, 압바스 왕조의 번역운동과 비교해서 이들이 내놓을 수 있는 문화적 성과가 많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국가의 정책 방향에 따라 문화의 흥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終]
......나는 그런 법칙들을 만들고 또 다루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이 무익하다고 본다. 문화를 규정한다고 하는 “법칙”이나 “주요 개념”은 하나의 예외만 나타나면 무효가 되고 마는데, 나는 그런 예외를 엄청나게 많이 만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어쩌면 그보다 위험하다고도 할 수 있을 테지만, “관념”과 “법칙”을 규정하는 이론적 관점에서 작게 한 걸음만 내디디면 그 성격상 본질주의적이고 물신적인 문화에 관한 가정들—예를 들어 “그리스 정신”이나 “아랍 기질” 같은-을 채택하는 길로 가고 만다.
—p. 22
종이의 도입에 덧붙여, 아랍 정복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동서 장벽 제거 또한 의도한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매웅 유익한 문화적 결과를 낳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1000년 동안 그리스화되어온 지역과 민족들을 통일시키고, 비잔틴 사람들—그리스어를 하는 칼케돈파 그리스 정교도 기독교인들을—을 정치적・지리적으로 고립시킨 것이다. ......이제는 이슬람 정치 조직(Dar al-Islam)에서 이런 논쟁과 분열의 근원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고 전체가 이슬람 국가라는 비당파적인 대군주 밑에 통합되면서, 더 큰 문화적 협력과 교류의 길이 열린 것이다. 둘째로 비잔틴이 정치적・지리적으로 고립된 덕분에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는 기독교 공동체들, 나아가 이슬람 국가 내의 다른 모든 그리스화된 민족은 비잔티움이 7, 8세기에 빠져들었던 암흑시대와 헬레니즘 혐오를 피할 수 있었다.
—p. 30
압바스 혁명, 바그다드 건설, 칼리프 소재지의 이라크 이전 등이 이루어지면서 문화적 지향과 관련하여 아랍 제국의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비잔틴의 영향 아래 있는 다마스쿠스에서 멀리 떨어진 바그다드에서는 이라크의 완전히 다른 인구 구성에 기초한 새로운 다문화 사회가 발전했다. 이 사회의 구성 요소로는 우선 정착 주민의 다수를 이루는 아람어 사용자, 기독교도, 유대인이 있었고, 그다음으로는 주로 도시에 집중해 있는 페르시아어 사용자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아랍인이 있었는데...... 이 모든 집단이 이런저런 자격으로 새로운 수도의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생활에 참여했으며, 이른바 고전 시대 이슬람 문명은 이들의 다양한 배경, 믿음, 관행, 가치가 제공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발효한 결과였다.
—p. 37~38
압바스 왕조가 750년에 우마이야 왕조에게 승리를 거두는 데는 페르시아 사람들, 특히 호라산(이란 북동부와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사람들에게는 크든 작든 종교에서 세속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사산 왕조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그들의 엘리트는 압바스 왕조 행정부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엘리트가 유지하던 사산 왕조 문화에는 압바스 왕조의 대의를 공고하게 다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알-만수르에게 큰 의미가 있는 두 구성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조로아스터교의 제국 이데올로기이고, 또 하나는 정치적 점성학이었다. 이 두 요소가 융합되어 알-만수르가 제시한 압바스 왕조 이데올로기의 초석을 이루었다.
—p. 56~57
......반란들이 압바스 왕조의 생존에 얼마나 심각한 위협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경우마다 달랐다. 그러나 알-만수르는 모든 반역에 단호하게 대처했을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흡수 정책을 채택했다. 즉 조로아스터교의 호소력과 의미를 선점하기 위해 아부-무슬림 지지 운동이 표명했던 조로아스터교 이데올로기를 압바스 왕조의 것으로 전유했다. 알-만수르가 반압바스 왕조 운동을 정치적으로 탄압함과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흡수하겠다는 실용적인 결정을 내린 이유는 어떤 반란에서나 실제로 무기를 든 사람은 상대적으로 소수일지라도 동조하는 사람은 많다는 분명한 사실 때문이다.
—p. 75~76
왕의 권위와 종교는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두 형제라는 것을 알라. 어느 한쪽은 다른 쪽 없이는 살 수 없다. 종교는 왕의 권위의 기초이고, 왕의 권위는 종교의 수호자가 되기 때문이다. 왕의 권위는 기초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종교는 수호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내가 너에게 걱정하는 첫 번째 것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종교 공부에서, 해석에서, 또 그것을 배우는 데서 너를 앞서고, 너는 왕의 권위가 주는 힘만 믿고 그들을 과소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종교 영역에서 네가 한때 부당하게 대하고, 학대하고, 소유를 빼앗고, 위협하고, 모욕을 주었던 하층 계급 신민과 보잘것없는 평민 사이에 감추어진 지도자가 생기는 것이다.
하나의 나라에서 감추어진 종교 지도자와 공개된 정치 지도자가 함께 존재하면 반드시 종교 지도자가 정치 지도자의 권력을 탈취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의 통치는 신민의 몸에만 국한되며, 왕이라도 마음은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백성의 힘을 누를 수는 있어도 그들의 마음을 누르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소유를 빼앗긴 똑똑한 자는 너에 대항하여 자신의 혀를 뽑아들 것인즉, 이 혀가 검보다 날카로워 종교 쪽으로 그 혀를 휘두르면 너에게 가장 심각한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p. 117
칼리프에게 집중된 권한을 재확립하고, 나아가 그 범위를 확대하려는 노력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하여, 알-마문은 두 가지를 축으로 삼아 강력한 선전활동에 돌입했다. 하나는 그가 진실로 이슬람의 옹호자이자 국가의 기초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가 이슬람의 진정한 해석에서 최종 결정권자이고 다른 모든 사람은 부차적이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알-마문은 불신자, 즉 비잔틴 사람들을 상대로 제국주의 전쟁을 시작했다.
두 번째 목적은 그의 시대까지 최고의 자리에서 지배해온 종교학자들로부터 종교적 권위의 기준을 박탈하고, 그것을 조직적인 지식인 엘리트의 뒷받침을 받는 칼리프에게 집중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함께 종교를 책임질 계급을 위에서부터 만들고자 했다. “감추어진 지도자”를 갖춘 대중이 아래로부터 통제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p. 118~119
......그가 시작한 비잔틴에 대한 전면전에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구성 요소가 있었다. 비잔틴은 이교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슬람교도는 물론이고 비잔틴인 자신의 조상인 고대 그리스인보다 문화적으로 미개하고 열등하기 때문에 이슬람교도의 공격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슬람교도는 이슬람이기 때문에 우월할 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 과학과 지혜를 높이 평가하여 그 책들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했기 때문에 우월하기도 했다. 이런 우월성은 심지어 하나의 종교로서 이슬람 자체에도 전이되었다. 비잔틴은 기독교 때문에 고대 과학에 등을 돌린 반면, 이슬람교도는 이슬람 때문에 그것을 환영했다. 따라서 반비잔틴은 친그리스가 되었다. 번역운동은 이슬람교도에게 비잔틴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울 이데올로기적 도구를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번역운동과 그것이 대표하는 모든 것이 이슬람 사회에서 더 높이 평가되었다.
—p. 122
라이(개인적 판단)를 아클(지성, ‘aql)로 대체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해가 없을지 모르나, 그 의미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것은 대가다운 일격으로 모든 분제에서 정치적 고려(대중)만이 아니라 종교적 권위(범, sari’a)에 대한 이성의 절대적 우위를 확립하며, 따라서 이성을 연구하는 학문인 철학의 우위를 확립한다. 보편적이고 언어를 초월했다는 점에서 논리학이 문법보다 우위인 것처럼 이성을 이용하는 철학이 보편적이고 민족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철학은 종교보다 우위에 있다. 따라서 야흐야는 알’마문의 꿈에 대한 자신의 판본으로 고대인의 번역서가 그 분야의 정전임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의미 있는 선배임을, 칼리프의 권위 부여가 그 연구의 승인임을 확인한 것이다.
—p. 147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지식인 세계와 압바스 왕조 사회 전체 내부의 반발은 다양한 방면에서 나타났으며, 서로 독립적이었고 이유도 달랐다. 번역운동 시기 바그다드의 아주 복잡한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려면 주의를 해야 하고 왜곡되고 시대착오적인 역사적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우선 논의되는 시기에는 일반적 의미에서 “이슬람 정통”리나느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 가지 이데올로기적 정책 가운데 알-만수르의 정책은 그 자체로는 가장 “종교적”이지 않았고, 알-마흐디의 정책은 논쟁적인 의미에서만 종교적(이슬람적)이었다. 즉 논쟁에서나 박해를 통해서나 비이슬람교도와 대립하며 이슬람을 옹호했지만, “이슬람”이 무엇인지 규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알-마문의 정책만이 특정한 교리를 강요한다는 의미에서 종교적이었다. ......맨 위에서 내려오는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밑에서부터 바라보는 압바스 왕조 사회는 아주 다양한 이데올로기, 종교적 믿음, 관행들을 가진 경쟁하는 집단들의 거대한 융합체였으며, 이들 또한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관점을 정통으로 투사하고, 사회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따라서 이 당시 번역운동은 형성기로서, 아직 어떤 종교적 견해도 정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p. 220~221
설사 진리가 우리와 먼 종족이나 우리와 다른 민족에게서 온다 해도, 우리는 그 진리를 평가하고 또 얻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진리에 앞서는 것이 없어, 진리를 헐뜯지도 않으며,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을 얕잡아보지도 않는다. 진리는 어떤 사람의 지위도 낮추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를 고귀하게 만든다.
......다신교도의 입에서 나온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증오를 품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해도 그것이 충고라면,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아름다운 여자는 초라한 옷을 입어도 아름답고, 진주는 조개껍질에 싸여 있어도 진주이며, 순금은 흙에서 나왔어도 금이다.
—p. 222~223
번역은 늘 문화적으로 창조적인 활동이며, 이 점에서는 “원작”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번역과 관계 있는 모든 일은 주는 쪽의 문화와는 다른 받아들이는 문화와 관련을 맺고 그 문화에 의미를 가진다. 뭔가를 언제 번역하겠다고 결정하는 일, 무엇을 어떻게 번역하겠다고 결정하는 일, 번역된 것을 수용하는 일은 받아들이는 문화에 의해 결정되며, 따라서 그 문화에 의미를 가진다.
—p. 256
20세기 말이면 내가 본서의 제사로 가져온 “한편으로는 제구구 때문에 모든 문화는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어떤 것도 순수하게 단독인 것은 없다”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받아들일 만큼 역사적 이해가 바로 잡히기를 기대해본다. ......핵심은 디테일에 있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융합이 일어난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거꾸로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요소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는 왜 그런 융합이 없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비잔틴 사회는 그리스어를 사용할 뿐 아니라 그리스 문화의 직접적 상속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초기 압바스 왕조의 과학적 발전 수준에 결코 이르지 못하고 나중에 결국은 고전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사상들을 아라비아어에서 번역해왔는가 하는 오랜 수수께끼가 좋은 예일 것이다.
—p. 257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관한 한 그들 모두가 알고 있던 이슬람에는 압바스 왕조 엘리트가 장려한 아랍 문화의 더 큰 세계관과 양립하지 못할 것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신앙이나 공동체의 정당한 지도자의 기준에 관해서는 그들 사이에 아주 큰 견해차가 있었음에도, 그 점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번역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목격된 반응들은 모두 동기가 사회적・정치적・지성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는 교조적인 내용이 전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비율로 보아 지식인들 사이의 규범은 친그리스적 태도이거나 번역된 학문에 대한 무관심 둘 가운데 하나였다.
—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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