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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는 독서일상/book 2020. 11. 22. 23:39
내가 호주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거의 평생 동안 영국에서 살기는 했지만, 고향인 호주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갖고 있고 근래에 들어 조금씩 명성을 넓혀 나가고 있는 호주 작가들을 이 글을 통해 소개하기도 한다. 불치병을 선고받고 죽음을 예감하면서 작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유머러스하고 관조적인 글들이 많아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 안에서 탐독하고 의미를 곱씹고, 더 나아가 읽는 이가 어렵지 않고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글을 쓰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가 언급한 책들 가운데 올리비아 매닝의 소설에 호기심이 많이 갔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된 책은 없다는 점 정도이다. 비평가인 작가의 독서 범위가 워낙 방대에서 가벼운 책 안에 다루고 있는 장르 또한 매우 다양한데, 헤밍웨이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대목들이 기억에 남고, 그밖에 작가가 소개한 호주 작품들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당신이 책에 관해서 가장 먼저 의식하게 되는 것은 책이 가진 힘이고, 책의 힘이란 결국 생각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당신은 책을 집어 들 때 그 힘을 느낄 수 있다.
—p. 15
……대체로 매닝은 자신의 창작물을 확장해 앞으로 다가올 역사적 경향을 제시했고, 그런 점에서 프루스트가 포착한 것과 똑같은 기회를 포착했다는 점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프루스트가 포착한 기회란 그가 사랑한 상류 사회가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반유대주의 정서로 얼마나 똘똘 뭉쳐 있었는지 인식한 것이었고, 매닝이 포착한 기회란 유럽이 남유럽과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진행한 ‘문명화의 사명(mission of cvilisatrice)’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유럽 자체의 문명화가 덜 이루어져 있었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p. 37
평생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책을 읽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장군 데이비드 프레이저 경(General Sir David Fraser)이 쓴 전기 <앨런브룩(Alanbrooke)>을 읽을 시간은 내지 못했다. 그 책을 읽었어야 했다. 잘 쓰였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판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숨은 주인공이 처칠이기 때문이고, 영국의 관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비판적 식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처칠이 없었다면 영국은 버텨 내지 못했겠지만 처칠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았더라면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처칠에겐 많은 조련이 필요했다. 많은 조련을 받지 않았으면 그는 허구한 날 헛된 계획에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조련한 사람들은 특별한 유형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처칠의 정신을 존중해야 했지만 그의 무모한 계획들을 만류할 수 없다면 있을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p. 45
제발트에 따르면 전후 독일 문학은 폭격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거기까지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제발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폭격이라는 주제가 독일의 국민 의식에서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항상 국민 의식이라는 것이 진지한 글보다는 별로 진지하지 않은 글을 통해 형성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지금까지 제발트의 그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 하더라도 짚 없이 벽돌을 만들려고 하는 작가가 쓴 책을 읽는데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p. 51
사실 그들은 이상주의자다. 콘래드는 급진주의보다 이상주의를 훨씬 더 경계한다. 그가 볼 때 급진주의의 논리적 귀결점은 공포 정치이지만, 이상주의는 공포가 생겨나도록 길을 터 주는 정신 착란이다. 콘래드의 독창성은 낡은 전제 정치에 대한 자신들의 반란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전제 정치가 탄생할 수 있음을 꿰뚫어 본 데 있었다. 따라서 그의 글은 소련에서 벌어질 일에 대한 예언처럼 보인다. 그가 나치의 독재를 예측하지 못한 건 비이성이 스스로 정권을 조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나치 독재의 하수인들 말고는 그 누구도 나치의 독재를 예측하지 못했다.
—p. 64
그런 이야기는 읽는 사람을 빠져들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는 게 옳은 일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에 빠져드는 게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자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상류 사회에 대한 그러한 가십은 마치 인생에서 맛보는 최고의 음식처럼 느껴져서 에피타이저가 온전한 한 끼가 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철갑상어알과 블린으로도 충분히 한 끼가 된다면 왜 다른 걸 더 먹어야 하는가? 물론 미국의 열정적인 왕자가 일주일 동안 얼마나 많은 젊은 여성들과 사귈 수 있는지 안다고 해서 그가 어떻게 흐루쇼프에게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도록 설득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걸 알려면 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 하지만 훌륭한 평판에 걸맞게 우리의 저자는 큰 그림에 대해서도 알고, 케네디의 성적 에너지를 진정으로 역사적인 맥락 안에 배치할 줄도 안다. 따라서 결국 이 책은 미국 정치에 대한 중요한 책인 셈이다. 프랑수아 올랑드(Francois Hollande)와 매혹적인 줄리 가예(Juile Gayet)의 복잡한 관계를 다룬 이야기도 프랑스 정치에 대한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파장은 훨씬 덜했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일들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그러한 일들을 용납할 수 없다는 데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p. 88~89
……그가 쓴 모든 책은 독일어 공부에는 좋지만 당신의 정신에도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로서의 그는 문명인, 즉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결코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그는 히틀러라는 사이비 예술가가 꿈꾸던 망상의 세계에 사로잡혔다. 히틀러의 망상의 세계가 도저히 뿌리치기 힘든 미학적 기회들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당신이 슈페어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부인하고 싶다면, 당신은 당황하지 말고 그러한 주장이 허세같이 느껴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p. 99~100
그는 <로스커먼의 생애(Life of Roscommon)>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언어가 끊임없이 부패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슨 예방책이 있는가? 현재 이 나라의 태도라면 권위를 조롱할 것이다. 따라서 작가 스스로 자신을 비평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의 말에 더 보탤 말은 이 한마디뿐이다. 스스로 자신을 비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작가가 아니다.
—p. 106~107
……그는 짧게 끝나 버린 삶을 사는 내내 자신의 성적 본성을 의심했으면 그러한 의심은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이자 동물 사냥꾼인 척하는 태도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술 역시 치료제가 되지 못했다. 그의 음주는 사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다. 그런 식으로 퍼마시면 소금에 절인 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꽤 일찍부터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에 비하면 윌리엄 포크너 같은 단순한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희한하게도 우리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술고래로, 헤밍웨이는 절제력을 갖춘 남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헤밍웨이가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쓴 운명적인 세 단어, 즉 “가엾은 스콧 피츠제럴드(Poor Scott Fitzgerald)”는 자신의 경쟁자에 대한 다음 세대의 관심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것이 바로 사후에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이미지의 힘이다. 사실 헤밍웨이야 말로 구제할 길 없는 술꾼이었다. 하지만 재주가 비상했고, 자신의 사내다운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능수능란했기 때문에 그가 남긴 인상, 즉 자신을 통제하는 남자라는 인상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p. 155
안타깝게도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가면 시각화의 지속적인 힘 밑에는 치유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성적 본성에 들어 있는 이중성을 한 번도 정면으로 파헤치지 못하고 오로지 암시만 했다. 다른 모든 제약에 저항하는 작가에게도 자신의 내면만큼은 금기 사항이었다. 그에게 최고의 비극은, 그토록 오래도록 회자되며 그 자신의 위대한 주제가 될 수도 있었던 자신의 최후에 대해서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육체가 쇠락해 가는 시간은 어느 작가에게든 새로운 주제가 될 수 있다.
—p. 156
……즉 평화는 원칙이 아니다. 평화는 그저 우리가 바라는 상황에 불과하며, 적어도 위협적인 세력의 폭력에 버금가는 폭력을 쓰지 않고는 쟁취할 수 없다. 우리가 그렇듯이 콘래드도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본능은 초자연적이고 정신적인 위로에 반대한다는 증거였고, 우리의 예술적 본능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학살의 시대는 지적 사기꾼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세상에 일어난 일들을 해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솔직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p. 174
인터넷 시대라고 해서 모든 글이 반드시 짧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면 <전쟁과 평화>를 축약본으로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미 몇몇 문학잡지들은 마치 똑똑하지만 피곤한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쓴 것인 양 짧은 글을 가지고 야단법석을 떤다. 큰딸이 최근에 내게 <슬라이틀리 폭스드(Slightly Foxed)>라는 잡지를 소개해 주었다.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이 잡지는 사라지거나 좀 더 알려졌어야 하는 책들에 대한 짧은 글로 가득하다.
……이제 우리의 손가락은 그를 가리켜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비평의 의무는 그런 의무 어디쯤엔가 있다. 비평가는 “내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보라.”가 아니라 “이걸 보라.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말을 하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p. 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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