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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는 것을 좋아하니까 이런 류의 책은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최근에 누벨바그 작품들도 몇 편 보고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도 찾아보면서 영화의 '기술적인 면'과 '철학적인 면'을 동시에 다루는 책을 찾아보곤 했다. 이 책은 꽤 오랫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던 책인데, 막상 알프레도 히치콕도 훑지 않을 만큼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영화까지만 다루고 있다. 또한 저자가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인 만큼, 대체로 유럽영화―그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 영화―를 주로 다루는데 유럽 영화들을 좋아하는 만큼 (비록 아는 영화들은 아니더라도) 거리감이 드는 제재(題材)는 아니었다.
정작 독서를 가로막았던 것은, 옮긴이가 역자의 말을 빌려 번역의 어려움에 관해 몇 번 언급을 한 것처럼, 번역된 문장들이 너무 퍽퍽하고 심지어 오탈자도 많아 힘들었다는 점이다. 시중에 출간된 영화비평서가 턱없이 적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이러한 책에 이와 같은 흠결이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1. 영화의 출현
확실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영화는 너무나 당연하고 접근하기 쉬운 시청물이지만 영화의 역사는 기껏해야 한 세기에 반 세기를 더한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영화가 모든 것이 서툰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 대하여, 앙드레 바쟁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환기한다. "영화는 사진기술의 발전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다. 기술적 진보가 있기에 앞서 영화에 대한 인간의 미적 욕구와 미적 이상이 있었던 것이다" 닭과 달걀의 문제만큼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마치 나중에 타임머신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타임머신 덕분에 시간여행이 가능해졌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넘나들고자 하는 인간의 끈질긴 욕망이 시간여행을 가능케 했다고 할 것인가? 영화 촬영기법의 발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바타>라는 영화가 있기 전까지 2D가 아닌 3D로 만들어진 영화는 생각해보지 못했으니까. 다만 이런 방법적인 것들을 영화의 본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의 플롯과 시놉시스, 대사를 이루는 것들은 이러한 도구들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솜씨와 배우들의 표정 그리고 몸짓이기 때문이다.
2. 예술로서의 영화
이 또한 흥미로운 주제다! 영화는 예술인가? 다시 처음부터. 예술은 무엇인가? 영화가 소설과 희곡에서 모티브를 빌려온다면 자립된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 앙드레 바쟁이 글의 서문을 여는 것처럼 예술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방부(防腐)처리 하기 위한 인간의 오래된 욕구의 발현이라 전제하자. 영화는 그러한 시간의 박제(剝製)에 충실하고 있는가? 내 의견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많은 영화작품들이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소설이나 희곡, 연극과 같은 다른 장르의 예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예술로서의 영화가 모름지기 지녀야 할 순수성이 훼손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지 않을까? 영화라는 것을 거창하게 예술이라 일컫기에, 이 영화(film, cinema, kino)라는 것이 그저 기성예술의 파생된 한 형태인 것은 아닌가? 앙드레 바쟁은 이러한 문제인식에 관하여 영화의 오염(汚染)된 순수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전제 위에서 영화가 기성예술에 기생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영화와 영화가 아닌 다른 장르의 예술이 서로 영향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양자가 상승효과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질문은 예술의 장르를 불문하고 아직도 유효하다.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여러 종류의 대중문화는 점점 더 짧은 호흡으로 생산되고 있다. 예컨대 시리즈물로 선보이는 드라마는 영화와는 또 다른 소비자층(독자, 시청자)을 발굴해냈다. 한편 3~4분 가량을 길이로 공개되는 아이돌들의 대중음악은, 몇 시간에 걸쳐 진행되던 오페라나 협주곡에 비해 아주 간편하게 소비될 수 있다. 조금 빗나간 이야기들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클래식'한 문화예술과 거리가 있다고 해서 짧고 가볍고 유쾌한 이들 기호물(嗜好物)은 예술로 취급받을 수 없다고 할 것인가?
3. 리얼리즘이란...
뻔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현실에 충실하기만 한 것은 오히려 현실을 외면한다는 것이 앙드레 바쟁의 논지다. 단지 사건이 이뤄진 시간 그대로 러닝타임을 담았다고 해서,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무대로 삼는다고 해서 실재(實在)가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리얼리즘 (또는 네오리얼리즘)이라 하는 것은 결국 양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과 레지스탕스라는 맥락에서 떼어놓고 볼 수 없다. 때문에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Ladri di bicicletta>,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Roma città aperta> 정도는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비평에 관한 수작(秀作)이라 하는 책이지만, 독서를 마쳤을 때 갈증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산업사회를 해학적으로 풀어낸 찰리 채플린의 작품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고, 내가 친숙하게 느끼는 시대의 감독, 작품, 배우에 대한 설명은 앙드레 바쟁이 활동했던 시점이 시점이다보니 책에서 다루고 있지 못하다. 가볍게 즐기는 것도 영화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한 번쯤은 무언가를 알고서 영화를 보고 싶어 집은 책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는 홀가분하지만 궁금증은 끝나지 않는다!*-*
조형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을 해본다면 시체의 방부 보존 관습이 조형예술 발생의 기본 요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가 있다. 회화와 조각의 기원에는 미라 콤플렉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을 것이다. 이집트 종교는 죽음과 대항하여 생존이라는 것이 육신의 물질적 지속성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 이집트 종교는 인간 심리의 기본적인 욕구, 즉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방어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죽음은 시간의 승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신의 외관을 인위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말하자면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그것을 떼어 내는 것, 곧 그것을 생명권 내에 안치시키는 일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라고 하는 현실 자체에 직면하여 그 살과 뼈를 보존함으로써 이러한 외관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p. 29
니에프스와 뤼미에르는 그러한 원죄로부터의 구세주였다. 사진은 바로크 예술이 의도한 바를 완성시킴으로써 조형예술을 그 유사성의 집념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왜냐하면 회화는 우리를 착각하도록 노력했어도 실제로는 그것이 헛된 일이었는데, 이러한 착각이 예술에게는 충분한 것으로 여겨진 반면 사진과 영화는 리얼리즘에의 집념을 결정적으로, 그리고 그 본질 자체에 있어서 만족시켜 주는 발견물이었기 때문이다. 화가가 아무리 능란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언제나 불가피한 주관성에 의해 저당 잡혀 있다. 인간의 손이 개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상(畵像) 위에 어떤 의혹의 그림자를 던지게 한다. 실제로 바로크 회화로부터 사진에로의 이행에 있어 본질적인 현상은 (모방의) 단순한 물리적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인간을 배제한 기계적인 재현이라는 것에 의해 우리의 착각에의 욕구가 완전히 만족한다고 하는, 하나의 심리적 사실에 있는 것이다. 해결은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생기게 하는 과정 속에 있었다.―p. 34
사진에 있어서 이 같은 자동적인 형성은 화상의 심리학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사진의 객관성은 모든 회화 작품에는 결여되고 있는 신뢰성을 사진에 부여한다. 우리의 비평 정신이 어떠한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도, 우리는 표현된 것, 실제로 재현된 것re-présenté,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제시된 사물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사물로부터 실재성을 그 재현물로 전이시킴으로써 이득을 취한다. 가장 충실한 데생은 그 모델에 대한 정보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비평정신이 어떻게 움직인다 해도 우리의 신뢰를 담고 있는 저 사진의 불합리한 힘을 결코 지니지 못한다고 하겠다.―p. 36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그러한 것에 대해서까지도 기술이나 분석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움직이고 흐르며 모든 것을 청정하게 해주는 수면과 닿은 바다에 결부된 상징체계(Symbolisme)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중세계보다도 훨씬 해방시켜 주는 3차원의 세계, 이 우주의 또 다른 한 반쪽으로 생각되고 있는 해저의, 이 대양의 상징체계가 문제인 것이라고 함을 보이고자 할 따름인 것이다. 대지의 사슬로부터의 이러한 해방은 사실은 새에 의해서와 똑같이 또한 물고기에 의해서도 상징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리고 명백한 이유들로 해서, 인간의 꿈은 건조하고 태양이 빛나는, 공기로 가득 찬 창공에서만 주로 펼쳐졌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는 저 지중해의 시인에게는 비둘기들이 거니는 조용한 지붕, 바다표범이 아니라 삼각돛들이 떠다니는 하나의 지붕에 불과했다.
……그러나 저 높은 창공은 거의 비어있고 볼모의 것으로, 오직 별빛이나 죽은 천체의 비정함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을 뿐임에 반해, 저 아래의 해저 공간은 생명의 공간으로서, 거기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스런 플랑크톤의 성운(星雲)이 레이더의 메아리를 반사해준다. 그런 생명의 세계에서는 우리도 대양의 연안에 다른 모래알들과 같이 버려진……―p. 66~67
이 영상이라는 말로 내가 쓰는 것은, 매우 광범하게, 그 스크린 상에서의 표현이 거기에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에 덧붙여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영상이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바는 매우 복잡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을 다음의 두 가지 그룹으로 집약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그룹의 첫째 것은 영상의 조형성에 관련되는 것, 또 한 가지는 (시간 속에서의 영상의 구성에 다름 아닌) 몽타주의 기법에 관련되는 것이다. 영상의 조형성에 관련되는 것 중에는 무대장치와 분장의 양식이, 또 어느 정도까지는 연기의 양식까지도 포함되며, 거기엔 물론 조명과 결국 구도를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화면 구성이 당연히 첨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몽타주는 눈에 띄지 않게 사용될 수가 있는데, 전전(戰前)의 고전적인 미국 영화에서 이런 경우가 가장 잘 나타났다. ……그러나 이 눈에 띄지 않는 데쿠파주의 중립성은 몽타주의 모든 가능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몽타주의 가능성은 그런 것들이 일반적으로 평행 몽타주montage paralléle, 가속 몽타주montage accéleéreé, 그리고 견인 몽타주montage attraction라고 하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이 세가지 방식 속에서 완전히 파악되어지는 것이다.―p. 101~102
우리는 지금까지 무성영화의 미학적인 단일성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내실적으로는 적과 동지의 두 대립된 경향으로 구분했다. 이제는 최근 20년간의 역사를 재검토해보도록 하자.
1930년에서 1940년에 걸쳐 영화 언어상의 어떤 공통의 표현 형식이 세계 내에서, 특히 미국에서부터 시작해서 확립되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미국 영화의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케 한 것은 헐리우드에서의 대여섯 가지 중요한 영화 장르의 승리였다. 즉, 첫째는 미국 희극(<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 1936년), 둘째는 익살극(<막스 형제The Marx Brothers>), 셋째는 춤과 뮤직홀 영화(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젓, <지그필드 폴리이즈Ziegfield Follies>), 넷째는 탐정, 갱 영화(<스카페이스Scarface>, <도망자I am a Fugitive from a Chain Gang>, <밀고자The Informer>), 다섯째는 심리극과 풍속극(<뒤 거리Back Street>, <재즈벨Jezebel>), 여섯째는 공포 혹은 환상영화(<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Dr. Jekyll and Mr. Hyde>, <투명인간The Invisible Man>,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일곱째는 서부영화(<역마차Stagecoach>, 1939년) 등의 장르인 것이다.―p. 108~109
……몽타주는 이전에 영화의 재료 그 자체, 시나리오의 조직을 이루는 것이었었다. <시민 케인>에서는 이중인화의 연속이 이야기 전개의 명확히 추상적인 또 다른 하나의 양상에 다름 아니다. 원 쇼트만으로 표현되는 원 신의 연속과 대립되고 있다. 가속 몽타주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트릭을 쓰기도 하지만, 웰즈의 가속 몽타주는 그 반대로 우리를 속이려 하지를 않는다. 그것은 대조적으로, 스스로를 응축되어진 시간으로서, 예컨대 프랑스어의 반과거형이나 영어의 반복동사와 같은 것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해서 발성영화가 10년래 쓰지 않고 있던 가속 몽타주나 견인 몽타주, 이중인화 등이 몽타주 없는 영화에서의 시간상의 리얼리즘을 위해서도 가능한 사용법을 재발견해냈다.―p. 121
……만일 영화가 2, 3천년의 역사를 지녔다고 하면, 영화도 예술 진화상의 공통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좀 더 분명히 볼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나이는 겨우 60년인데 이미 그 역사적 시야는 놀랄 만큼 훼손되어 있는 것이다. 보통은 하나 내지 두 개의 문명의 지속 기간을 통해 펼쳐지는 바가 여기에서는 한 사람의 일생 동안에 포함되어 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잘못의 주원인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가속화된 진화는 다른 예술들의 진화와 동시대적이지를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젊다. 그렇지만 문학과 연극, 음악과 회화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었다. 아동교육이 그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어른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듯이, 영화의 진화는 필연적으로 신성화된 예술들의 실례를 따라 굴절 변화되어 왔다. 따라서 금세기 초두부터의 영화의 역사는 모든 예술의 진화에 특유한 결정인자와 이미 진화한 예술들에 의해 영화에 끼쳐진 영향력에서 나온 성과라고 할 것이다. 또한 이런 복잡한 미학의 착잡성은 사회학적인 우발 사건들에 의해 가중되었다. 영화는 사실상, 특히 사회적인 예술인 연극 그 자체가 교양과 경제력을 지닌 소수 특권층만을 상대하는 이 시대에 유일한 대중예술로서 대두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마도 영화의 최근 20년간은 그 전(全) 역사에 있어, 문학에서의 5세기 동안에 해당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 예술에 있어서 긴 기간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비평 감각을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인 것이다.―p. 133~134
작품의 문학적인 질이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면 것일수록, 각색은 그 작품의 균형을 뒤흔들어놓고, 그것은 또한 더욱더 동일한 균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옛 균형과 등가의, 새로운 균형에 의해, 작품을 재구성하기 위한, 창조적인 재능을 필요로 한다. 소설의 각색들, 그런 것을 통해 참다운 영화, 순수 영화가 하등 얻을 게 없는 태만한 행위라고 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비평가의 오해요, 이것이 오해임은 모든 탁월한 각색의 존재가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스크린의 요구라고 하는 미명하에 충실성을 전혀 고려치 않는 이들은 문학도 영화도 동시에 배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p. 152
……로트레아몽(Lautréamont)과 반 고흐(Van Gogh)는 그들의 시대로부터 이해되지 못하거나 무시된 가운데 자신들의 작품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최소한(그리고 이 최소한이라는 게 엄청난 것인데) 직접적인 관중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영화작가가 대중의 취향과 대립할 때조차도 그의 대담성은 관객이야말로 그들이 좋아해야 할 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어느 땐가는 반드시 좋아하게 될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인정될 수 있는 한에서밖에는 유효하지 못하다. 동시대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비교는 건축과의 비교이다. 왜냐하면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하등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도 역시 기능적인 예술이다. 다른 학설을 참고로 해서 말한다면, 영화에 대해서 그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평가는 가장 대담한 보편화를 행하는 경우에도 이와 같은 존재 자체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입증된 한 변화의 사실이 역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거의 꼭 같은 조심성을 지니고, 현실을 뛰어넘어 하나의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발성영화 쪽이 무성영화를 대치하여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이점이 있게 되었을 때에도, 발성영화를 그것이 생겨난 시점에서부터 매도한 이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p. 156~157
……이것은 곧 내용과 형식의 관계가 역전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게 아니라, 전혀 그 반대이다. 확실히 형식이 지금보다도 더 내용에 엄밀히 결정되고 지금보다도 더 필연적이고 더 미묘한 것으로 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그 같은 지식 일체가 오늘날 우리가 그 자체로서 평가하는 어떤 제재(題材), 우리가 점점 더 까다롭게 요구하게 되어 있는 그 제대를 앞에 두고서, 소멸과 투명성에로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하상(河床)을 결정적으로 깎아 내며 강둑에다가 단 한 알의 모래도 실어주지 못하면서 오직 강물을 바다로 운반할 힘밖엔 가지고 있지 못한 대하(大河)처럼, 영화는 자신의 평형단면(平衡斷面;profil d’équilibre)에로 다가가고 있다. 제7예술에 공헌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천연색 영화나 입체 영화가 잠정적으로 형식에다가 우위성을 돌려주고 미학적인 침식의 새로운 한 사이클을 만들어내기까지 영화는 더 이상 지표상(地表上)의 어떠한 것도 정복할 수는 없다. 영화에는 오직 자기의 하안(河岸)을 씻어 주는 일, 자기가 그렇게도 급속히 자신의 협곡을 파내려간 상대자가 되는, 예술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는 일, 그것들을 은연중에 둘러싸고 공략하는 일, 지하로 침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도를 파는 일밖엔 남아 있지 않다. 새롭게 솟아날, 즉 소설이나 연극으로부터 독립한 영화가 용솟음쳐 나올 시기가 아마도 또 다시 도래하리라.―p. 161
……브레송은 삭제는 해도 절대로 요약하는 일은 안 한다. 왜냐하면 삭제된 텍스트의 남아 있는 부분은 역시 원작의 한 단편이기 때문이다. 대리석 덩어리가 채석장에서 나오듯이 영화 속에서 발음되는 낱말들(paroles)도 소설의 말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들 낱말들이 의도적으로 강조된 문학적인 기교는 확실히 예술적인 양식화의 한 탐구로서, 즉 리얼리즘과는 정반대의 것으로서 해석될 수가 있겠지만, 사실은 여기서의 현실이란 텍스트의 도덕적, 또는 지적인 기술(記述) 내용인 것이 아니라 텍스트 그 자체,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문체라고 하는 것이다. 선행하는 작품의 이 같은 제2단계로 옮겨진 현실과 카메라가 직접 잡은 현실이 서로 꼭 맞지도 않고 함께 전개되지도 않으며 하나로 융합될 수도 없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일이다. 오히려 그것들을 접근해 대비시키는 그것이 그들 본질의 이질성을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 두 현실은 각기 자기 자신의 내용과 양식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역할을 병행적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p. 180
회화는 사진에, 사진에게는 미학적으로 보아 가장 본질적이지 않은 것, 즉 유사성과 일화(逸話)를 면제해주었다. 사진의 완전성과 경제성, 그리고 편리성은 결국 회화의 가치를 안정시키고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회화의 특질을 견지하도록 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와 똑같은 과정이 연극에도 적용된다. 좋지 못한 통조림된 연극은 진짜 연극이 자신의 법칙들을 의식하도록 도와주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연극에서의 연출 개념을 변혁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러한 것들이 금후 확고하게 획득된 성과인 것이다. 그러나 좋은 연극영화가 우리에게 예견하는 것을 가능케 하고 있는 세 번째 성과가 있다. 그 성과란, 대중의 연극적 교양의 내용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 확대에 있어서도 현저한 진보를 이루리라는 것이다.―p. 248
……그림의 프레임은 방향을 잃게 하는 공간 지대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의 공간, 그림의 바깥 한계에 테를 두르는 우리의 적극적인 경험 활동의 장(場)인 공간에 대하여 내부로 향해지는 공간, 오직 그림의 안쪽으로만 향해 열려져 있는 명상적인 공간을 대립시킨다.
스크린의 한계는, 기술용어가 종종 암시하고 있듯이, 영상의 프레임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분밖엔 드러내놓을 수 없는 까슈(Cache)인 것이다. 프레임은 공간을 내부로 향해서 편극화시키는 데에 비해, 스크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것은 반대로, 우주 안으로 무한히 연장되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프레임은 구심적이요, 스크린은 원심적이다. 만일, 이 회화적 과정을 역전시켜 스크린을 프레임 속에 끌어넣는다면, 그림의 공간은 그 방향과 한계를 잃고 무한한 것으로 우리의 상상력에 주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림은 예술로서의 다른 조형적 성격을 잃지 않고 영화의 공간적 특성의 영향을 받아 그곳으로부터 도처에서 넘쳐 나오는 잠재적인 회화적 우주에 흡사한 것이 된다.―p. 266~267
……꿈과 영화의 유사성은, 나로서는 한층 더 철저하게 논구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스크린 상에 나타낼 수 없는 것 속에 존재하고 있는 동시에, 우리가 스크린 상에서 보고 싶다고 열망하는 것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꿈이라고 하는 말을, 무언지 알 수 없는 상상력의 무질서한 분방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꿈만큼 명백한 것, 꿈만큼 엄격한 검열을 거치고 있는 것은 달리 없다. 그 검열이 이성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건 사실이며,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또 꿈의 특질은 검열을 통하여 나옴으로써 네거티브로밖에는 잡을 수 없다고 하는 것, 꿈의 적극적인 실재성(實在性)은 반대로 초자아의 금령(禁令)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위반 행위 속에만 존재한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또한 사회적, 법률적인 본질을 지닌 영화의 검열 성격과 꿈의 검열 성격의 차이를 분명히 인정한다. 나는 다만, 꿈에 있어서 검열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 영화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검열은 변증법적인 뜻에서 꿈의 구성 요소인 것이다.―p. 346
……스트립쇼는 구경거리이기는 하되 연극에 속하는 게 아니라는 거싱 인정될 것이며, 또 거기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주목되어야 할 점은 여성이 자기 스스로 옷을 벗는다고 하는 사실이다. 여성은 객석의 모든 남성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고통을 무릅쓰면서 상대역 남성에 의하여 옷이 벗겨진다는 걸 견뎌내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스트립쇼는 관객들의 욕망을 한 점으로 집중시켜 부추김으로써 성립되는 것인데, 관객은 자신의 육체를 제공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여성을 각자가 가상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무대 위로 돌진하기라도 한다면, 그는 린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은 (그때 전혀 다른 정신적 메커니즘에 속하는 성적 도착voyeurisme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관객의 욕망과 경쟁, 대립 관계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영화에서는 벌거벗은 여성에 대해서조차도 상대역의 남성은 접근하고, 분명히 욕망을 나타내며, 실제로 포옹하는 것조차도 허용된다. 왜냐하면, 영화는 연극과 달라서―연극은 관객과의 대치, 관객의 의식에 근거한 연기가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자리이다―관객의 참여와 일체화를 촉구하는 상상적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정복하는 배우는 관객 대신에 그 욕망을 채워준다. 배우의 매력, 미모, 대담성 등은 관객의 욕망과 서로 겨루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것이다.―p. 350
지난 2년에 걸쳐 레지스탕스와 해방은 주요 테마를 제공했다. 그러나 (유럽 영화라고 하는 말이 좋지 않다면) 프랑스 영화와는 달리 이탈리아의 영화는 이른바 레지스탕스의 행위를 묘사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는 곧 전설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시간상으로 아무리 가까운 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해방 다음 날로 이미 역사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인들이 떠나는 것과 더불어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에 반하여 이탈리아에서는 해방은 아주 가까이에 있던 이전의 자유에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혁명, 연합군에 의한 점령, 경제·사회적인 격변을 뜻하고 있었다. 요컨대 해방은 끝이 없는 몇 개월인가에 걸쳐서 천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이 나라의 경제적·사회적·도덕적인 생활에 대단히 깊은 영향을 주었다.―p. 362
……독자는 내가 <파이자>에서 로셀리니의 스타일과 <시민 케인>에서의 오슨 웰즈의 스타일을 거의 같은 말로써 특징지었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것이 틀림없다. 정반대의 기술적 수단에 의존하면서, 양자 모두 거의 꼭 같이 현실을 존중하는 데쿠파주에 이르고 있다. 즉 오슨 웰즈는 공간적 깊이를, 로셀리니는 리얼리즘에의 결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느 것에서나 우리는 배경에 대한 배우의 꼭 같은 의존 관계, 카메라의 시야 속에 나타나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그들의 극적 중요성이야 어떻든 간에 균등하게 부과되어 있는 연기의 리얼리즘이 발견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명히 매우 다른 스타일의 양상을 가지면서도, 이야기 그 자체는 <시민 케인>에 있어서나 <파이자>에 있어서나 근본에 있어 꼭 같은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로셀리니와 오슨 웰즈가 기법의 완전한 독립성 속에서 분명 서로에게 전혀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고도 서로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기질을 통하여, 결국은 같은 본질적인 미학적 목적을 추구했기 때문이며, 리얼리즘에 대해서 같은 미학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p. 392~393
……로셀리니의 연출은 그 대상을 바깥쪽으로부터 포위한다. 나는 물론 로셀리니의 연출이, 그 대상을 이해도 하지 않고, 느끼지도 않고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러한 외재성(外在性)이 세계와 우리 사이의 관계들의 본질적으로 윤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 영년>에서 아이들을 다룬 법과 <구두닦이>나 <자전거 도둑>에서 아이들을 다룬 법을 비교해보기만 하면 된다. 그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로셀리니의 사랑은, 인간들끼리의 교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적인 의식으로써 그들을 감싸는 반면, 데 시카의 그것은 등장인물들 자신으로부터 방사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그들이지만, 데 시카가 그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애정에 의해 내부로부터 비춰진다. 로셀리니의 연출은, 그의 소재와 우리와의 사이에, 물론 인위적인 장애물로서는 아니지만, 뛰어 넘을 수 없는 존재론적 거리로서, 미학적으로는 공간의 언어로, 형식으로, 또 연출의 구조로 번역되는, 인간 존재의 타고난 결함으로서 끼어드는 결과로 된다. 그와 같은 인간 존재의 타고난 결함이 하나의 결여로서, 하나의 거부, 사물로부터의 하나의 도주로서, 따라서 결국에는 하나의 고통으로 느껴짐으로써 그 결함을 의식하는 것이 보다 쉽고, 그것을 하나의 형식상의 방법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보다 용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셀리니는 먼저 개인적인 도덕 혁명을 행하는 일 없이는 그 결함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p. 429~430
……현실의 충실한 재현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선택이요, 해석이라는 말을 우리는 거듭 들어오고 있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영화에서의 사실주의적 경향들은 다른 예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오직 작품 속에 현실 이상의 것을 도입함으로써 성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현실의 보충은 여전히 전혀 추상적인 어떤 의도, 즉 극적이거나 도덕적인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의도에 봉사하기 위한―다소 유용한―한 수단임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자연주의는 바로 테마 소설과 테마극의 증가와 일치하고 있다. 선행하는 주요 리얼리즘 그룹과 또 소비에트 파에 비교해볼 때,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독창성 그것은 애초부터 현실을 몇몇 관점에 종속시키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눈Kino-glass의 이론조차도 실제로 살아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사용한 것은 단지 그것을 몽타주의 변증법적 스펙트럼 위에다 배열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연극은 사실적인 그것조차도 현실을 극적이고도 흥행적인 구조의 기능에 따라 처리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테제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건, 도덕적인 관념이나 또는 극적인 줄거리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건, 리얼리즘은 그 현실로부터의 차용물을 초월적인 요구들에 종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네오리얼리즘은 내재성밖엔 모른다. 그것이 인간 존재와 세계가 내포하는 교훈을 경험적으로 이끌어내는 법을 아는 것은 오직 그것들의 외관적 측면, 순수한 현상만으로부터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현상학이다.
그러므로 표현수단 면에서 말한다면, 네오리얼리즘은 우선, 여기에 관련해선 구경거리라는 전통적 범주에는 반한다. 연극에서 유래하는 고전적인 연기관에서는 배우가 뭔가 하나의 감정이라든가, 정념, 욕망이라든가 관념을 표현한다. 그의 태도와 무언의 몸짓·표정에 대해 관객들은 펼쳐진 책을 읽듯이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게 된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똑같은 심리적 원인은 똑같은 육체적 결과를 낳는다고 하는 묵계와 그리고 서로에게 명확히 가 닿을 수가 있다는 묵계가 관객과 배우 사이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연기=유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p. 432~433
……사랑하는 방식에는 종교 재판을 포함해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랑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최악의 이단사설(異端邪說)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증오 쪽이 종종 더 다정함을 갖는 수가 있다. 그러나 데 시카가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해 품는 애정은 그들에게 어떤 위험도 주지 않는다. 그것엔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나 도에 지나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정중하고도 사려 깊은 친절함, 너그러운 관대함이며, 아무 대가도 요구하고 있지를 않는다. 거기에선 가장 가난하거나 가장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경우라도 연민의 뒤섞임은 결코 없다. 왜냐하면, 연민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양심의 매수행위나 다름이 없다.―p. 442
……인간을 답답하게 만드는 기회를 늘리지 않는 사회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증오의 씨앗을 뿌리는 사회보다는 나은 사회이다. 그러나 가장 완전한 사회라고 해도, 역시 사랑을 창출하지는 못하리라. 사랑은 사람과 사람간의 사적인 문제로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유가 나오는 들판 위에다가 토끼장을 그대로 놓아 두려하는 나라가 이 세상 어디 있을 것인가? 어느 나라에서 행정서류 한 장의 분실이 자전거 한 대의 도난만큼 곤혹스럽지 않을 것인가? 개인 행복의 객관저긴 조건들에 관해 생각하고, 그것을 촉진시키는 것은, 정치의 범주에 속하는 일이지만, 그것의 주관적인 조건들을 존중하는 일은 정치의 본성 속에는 없다. 바로 이점에서 데 시카의 세계는 어던 염세주의, 피할 수 없는 염세주의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로 그에게 아무리 감사하더라도 결코 충분하지 않을 염세주의인데, 왜냐하면 그 염세주의 속에는 인간의 온갖 가능성에 대한 호소가 그 궁극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의 증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p. 449~450
극문학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물론 정확한 인식을 주었다. 그러나 그 인식은 인간에 대해 마치 고전물리학이 물질에 대해 지니는 것과 거의 같은 관계에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떤 규모의 현상에 대해서밖엔 유효하지를 않는, 학자들이 거시 물리학이라 부르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 확실히 소설은 그와 같은 인식을 극도로 구분했다. 프루스트 류의 감정물리학은 현미경적이다. 그러나 소설의 이러한 미시물리학적 물질은 내면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기억인 것이다. 영화는 인간에 대한 그 같은 탐구 방법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소설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소설보다는 어떤 우월성인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잊었다가 되찾은 시간>에는 자바티니의 <발견된 시간>이 어느 정도까지 대응한다. 자바티니는 현대 영화에 있어서 직설법 현재형의 프루스트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p. 456
……벽돌은 집의 한 요소입니다. 그 점은 벽돌의 겉모습에도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가령, 다리를 만드는 석재에 대해서도 같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석재는 서로 꽉 맞게 짜여져서 아치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강의 얕은 곳에 흩어져 있는 바위 덩어리는 그저 바위일 뿐이고, 그들 돌로서의 현실은 외관용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하나 건너 뛰어 강을 건너기 위해 바위를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바위가 내게 있어서 일시적으로 다리와 똑같은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아무렇게나 배치된 그 바위들에 창조적으로 보충 의미를 가할 줄 알았기 때문이고, 그들의 성질과 모양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잠정적으로 가져다주는 움직임을 거기에다가 덧붙일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도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그 영화가 우리의 의식으로 하여금 하나의 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현실의 한 단편에서 다음의 단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허용하는 한에서, 말하자면 뒤에 가서의a posteriori 일입니다. 이에 반하여 고전적인 예술적 구성에서는, 의미는 최초부터a priori 주어져 있고, 집은 이미 벽돌 속에 있는 것입니다.―p.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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