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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조각글로만 접해왔던 <파우스트>를 완본으로 읽었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여러모로 제약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그 동안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스치듯 봐왔던 것을 제대로 살펴보는 시간으로 삼자. 틈틈이 독서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잘 살펴보면 <파우스트>처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고전(古典)이 많다. 이밖에 <신곡>, <악의 꽃>, <좁은 문> 같은 고전들도 읽어보고 싶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취미를 붙인 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라, 고전으로 불리는 영화들 중 안 본 것이 많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현기증>, <이창>처럼 여러 히치콕의 영화가 그러하다. 여행도 똑같다. 해외의 이곳저곳을 욕심내어 다녀보았지만, 정작 국내 여행은 그만큼 다니지 않았다. 최근에는 청송의 주왕산을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안동의 도산서원이라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까지만 하고 아직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늘 새로운 것을 탐하지만 가끔 그것들을 탐하면서도 사상누각(沙上樓閣)을 쌓아올리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들 때가 있다. 발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은 도외시하고 너무 먼 곳에서 지식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
파우스트는 변용이 많이 되는 작품 중 하나다. 연극, 영화, 회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의 소재가 된다. 때문에 이제서 파우스트를 읽은 것은 분명 때늦은 감이 있다. 나는 파우스트에서 고전다운 심오함 또는 진중함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철학적인 깊이는 차치하고 마치 박지원의 <허생전>을 읽는 것처럼 풍자적인 묘사에 빠졌다.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의 옛 문학도 탐구하고 소개하기에 따라 얼마든 여러 나라에 훌륭한 문헌으로 알려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특히 더욱 그러한 생각을 했던 것은, <파우스트>라는 작품 자체가 순수하게 괴테의 착상에서 배태(胚胎)된 것이 아니라, 하이델베르크의 오래된 설화가 구전되어 오던 것을 다듬고 다듬은 결과 탄생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글도 그렇고 완벽하게 창의적인 것은 없다. 몇 가지의 모방을 콜라주하고 여기에 영감 몇 방울을 더해 세계적인 고전이 탄생하는 것이다. 다만 숱한 모방과 창작의 혼재 속에서 어떤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보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기존의 다기망양한 설화들을 총화(總和)하여, 악마와의 거래 속에서도 굳건한 인간의지를 돋을새김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범한 인물 파우스트는 지식의 통달(通達) 안에서도 인생의 적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와 모종의 결탁을 한다. 사랑, 정치, 전쟁을 거듭하면서 그는 악마의 속삭임 속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지만, 불굴의 의지와 극기(克己)를 향한 무한한 열망은 마침내 신에게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종교가 지배하던 시기에 인본주의를 긍정하는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괴테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괴테가 살던 시기나 장소와는 달리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와 비종교 간의 갈등이 첨예해지고―인본주의에 대한 인식의 무게중심이 탈종교에서 다원화로 옮겨가는 오늘날에 <파우스트>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는 좀 더 고민해야 할 문제다.
파우스트 우리의 정신이 획득한 가장 훌륭한 것에까지도, 점점 더 이상스런 물질이 끊임없이 달라붙는구나. 우리가 이 세상의 선(善)에 도달한다 해도, 보다 더 선한 것이 이를 허위와 환상이라고 부르는도다.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해준 화려한 감정들도, 어수선한 속세의 혼잡 속에서 마비되고 마는구나.
공상이란 평상시에는 대담한 날개를 펴고 희망에 부풀어 영원한 것으로까지 확대되다가, 기대했던 행복이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연달아 파멸하면, 이젠 조그마한 공간으로도 만족해버리고 만다. 근심은 곧 마음속 깊은 곳에 둥지를 틀게 되고, 거기에 남모르는 고통을 움트게 하고, 불안스레 흔들거리며 기쁨과 안식을 방해하는도다. 근심은 끊임없이 새로운 가면을 뒤집어쓰니, 집과 농장으로, 아내와 자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불과 물, 비수와 독약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온갖 상관없는 일들 때문에 떨게 되고, 잃지도 않은 일 때문에 항상 눈물을 지어야만 하는 것이다.
난 신들을 닮지는 않았다! 이것이 뼈저리게 느껴지는구나. 나는 쓰레기 속을 파헤치고 있는 벌레를 닮았도다. 쓰레기 속에서 영양분을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동안, 나그네의 발길에 짓밟혀 매장돼버리는 그런 벌레를.
―634~655행
파우스트 그래 좋다. 대체 자넨 누군가?
메피스토펠레스 언제나 악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신을 창조하는 힘의 일부분이지요.
파우스트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은 무슨 뜻인가?
메피스토펠레스 나는 항상 부정(否定)하는 정령이외다! 그것도 당연한 일인즉, 생성하는 일체의 것은 필히 소멸하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간단히 말해서 악(惡)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내 본래의 특성이랍니다.
파우스트 자넨 일부분이라 하면서, 완전한 존재로 서 있지 않은가?
메피스토펠레스 당신에게 약간의 진리를 말씀드리지요. 조그마한 바보들의 세계의 인간이란 보통, 자기 자신을 전체라고 생각하고 있소만―나는 처음에는 전체였던 한 부분의 일부분이라오. 저 빛을 탄생시킨 암흑의 일부분이지요. 그런데 저 오만스런 빛은 그 모체인 밤을 상대로 옛날의 지위, 즉 공간을 빼앗으려 다투고 있지만,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지요. 빛이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빛은 결국 물체에 달라붙어 있으니까요. 빛은 물체에서 흘러나와 물체를 아름답게 하지만, 물체는 또한 빛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지요. 그러기에 내 바라는 대로, 오래지 않아서 빛은 물체와 더불어 멸망하고 말 것이오.
―1334~1353행
메피스토펠레스 악아와 도깨비들에겐 한 가지 법칙이 있답니다. 반드시 숨어들어온 곳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첫 번째는 자유이지만, 두 번째 것에는 노예가 되지요.
―1410~1413행
메피스토펠레스 우린 다시 또 지혜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오. 당신네 인간들은 정신을 잃고 실성하게 될 것이외다. 끝가지 해낼 수도 없으면서,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와 손을 잡았소이까? 날고는 싶지만 현기증이 나서 자신이 없다는 것이오? 우리가 당신에게 달라붙었소, 아니면 당신이 우리에게 달라붙었소?
파우스트 위를 쳐다보라!―거인처럼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이 벌써 지극히 장엄한 시간을 알려주고 있구나, 봉우리들은 영원한 빛을 먼저 향유할 수 있지만, 그 빛은 이어서 이곳 우리에게로 내려오게 된다. 이제 알프스의 푸르게 구릉진 초원 위에 새로운 광채와 명백한 빛이 비쳐들더니, 단계적으로 차츰 더 아래로 뻗치는 구나―태양이 솟는다!―한데 슬프게도 벌써 눈이 부시고, 눈에 스미는 아픔으로 나는 몸을 돌리고 마는구나.
애달프게 그리던 희망이 최고 소망을 향해 끈질기게 치닫다가, 그 성취의 문이 활짝 열렸음을 발견하게 되면, 이런 기분리리라. 그러나 저 영원한 밑바닥으로부터 거대한 불길이 터져나오면, 우리는 당황하여 발길을 멈추게 된다. 우린 다만 생명의 횃불을 불붙이려 했는데, 불바다가 우릴 휘감아버리니, 이 어찌 된 불이란 말인가? 우릴 둘러싸고 타오르는 저 불길은 사랑일까? 증오일까?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며 무시무시하게 엄습하니, 우리는 다시금 지상으로 눈길을 돌려, 싱싱한 속세의 베일 속에 몸을 숨기려 하노라.
그러니 태양은 내 등뒤에 그냥 머물러다오! 바위틈 사이로 굉굉히 쏟아져내리는 폭포수를, 나는 점점 커지는 황홀감에 젖어 바라보노라. 줄지어 떨어지는 폭포수는 이젠 수천 갈래로, 다음엔 다시 수만 갈래로 흩어져 쏟아지며, 하늘 높이 공중으로 끝없는 물거품 되어 튀어 오른다. 그러나 이 폭포수에서 생겨나는 오색찬란한 무지개는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무지개다리 그려내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때로는 그 모습이 또려샇다가 때로는 공중으로 흩어지며, 사방으로 향기롭고 시원한 비를 뿌려주기도 한다. 무지개는 인간의 노력을 반영해주고 있구나. 그것을 보고 생각하면,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려니, 우리 인생은 채색된 영상(映像)에서 파악될 뿐이라도.
―4695~4727행
재상 인간의 정신에 이성이, 마음에 선량함이, 그리고 손에 열성이 다 무슨 소용 있겠나이까? 누구라도 이 높은 대궐에서 넓은 나라 안을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나쁜 흉몽처럼 여겨질 것이며, 괴물들이 흉측한 모습으로 맹위를 떨치고, 불법이 합법적으로 날개를 펴고, 오류에 찬 세상이 눈앞에 전개될 것이옵니다.
가축을 훔치고 부녀자를 약탈하고, 제단에서 성배, 십자가, 촛대를 훔쳐간 놈도 여러 해 동안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이, 건전하게 제가 한 짓을 자랑하고 있사옵니다. 이제는 고소인들이 법정으로 몰려오는데, 재판관들은 높은 보료 위에 앉아 거드름만 피우고 있으며, 그러는 동안에 어지러운 폭동은 점점 커져서 성난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나이다. 권세 있는 공범자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놈은 극악무도한 짓을 하고서도 큰소리를 치고 있사오며, 죄 없는 자가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게 된다면, 유죄! 라는 언도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은 산산이 조각나고, 당연한 것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으니, 우리를 오로지 올바른 길로 인도할 판단력이 어찌 전개될 수 있겠습니까? 올바르고 착한 사람도 결국에는 아첨하고 뇌물이나 쓰는 인간으로 기울어지고, 법대로 처벌할 수 없는 재판관은 결국엔 범법자와 한 패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소인이 검게만 말씀드린 것 같사옵니다만, 차라리 두꺼운 포장으로 그 그림을 덮어버리고 싶나이다. (잠시 쉬었다가) 이젠 결단을 내리심이 불가피하게 되었사온즉, 모두가 가해자가 되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날이면, 폐하의 엄위(嚴威)마저 도둑맞게 될 것이옵니다.
―4780~4811행
파우스트 그 길이 어디냐?
메피스토펠레스 길은 없소이다! 아직 가본 적도 없고,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는 길이죠. 부탁받은 일도 없고, 부탁할 수도 없는 길이오.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이까?―열어젖혀야 할 자물쇠도 없고 빗장도 없으며, 그저 온갖 적막함에 시달림을 당하게 될 것이외다. 황량함이나 고적함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이까?
파우스트 그런 틀에 박힌 말은 안 해도 되리라 생각한다. 여기에서도 마녀의 부엌 같은 냄새가 풍기는데, 이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지난날의 냄새로다. 이제까지 나도 세상과 교제하지 않았더냐? 공허함을 배우고, 공허를 가르치지 않았더냐? 내가 관조한 바를 이치에 맞게 말할라치면, 그 반대의 소리가 갑절이나 드높에 울려왔었지. 그리하여 그 귀찮은 세상일들을 피하여, 고적한 곳으로, 황량한 곳으로 도망쳐야만 했었다. 그런데 완전히 버림받은 채 홀로 살지 않으려고, 결국엔 악마에게 내 몸을 맡기고 말았노라.
메피스토펠레스 그런데 당신이 망망대해를 헤엄쳐 다니면서, 끝없이 아득한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다고 하신다면, 물 속에 빠져죽을까봐 두렵긴 하겠지만, 거기에선 그래도 계속 밀려오는 파도를 볼 수 있었을 것이오. 아무튼 무엇이든 볼 수가 있지요. 고요한 바다의 푸른 물 속을 지나가는 돌고래라도 볼 테지요. 흘러가는 구름이나 해와 달과 별들이라도 보겠지요―그러나 영원토록 공허한 저 먼 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당신이 걷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몸을 쉬려 해도 견고한 자리조차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6222~6248행
학사 이것이 젊은이들의 가장 고귀한 사명이올시다! 세계는 내가 창조해내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태양은 내가 바다에서 끌어올린 것이며, 달도 그 교차하는 운행을 나와 더불어 시작하였고, 하루하루는 내가 가는 길을 장식해주고 있으며, 대지는 나를 맞아 푸르러지고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수많은 모든 별들도 저 첫날 밤에, 내 눈짓 하나로 찬란한 빛을 내게 되었지요. 속물적으로 편협한 사상의 굴레에서 당신네들을 해방시킨 것이 내가 아니고 누구였습니까? 그러나 나는 정신이 일러주는 대로 자유로이, 내 내면의 빛을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가며, 광명을 앞으로 하고 암흑을 뒤로 물리고서, 독자적인 황홀경에 젖어 재빠르게 나가고 있습니다. (퇴장)
―6793행
포르키아스 부끄러움과 아름다움이 손에 손을 잡고 나란히, 이 지상의 푸른 길을 함께 가는 일이 없다는 말은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는데, 여전히 고상하고 진실하단 말이야. 이 두 가지에는 옛날부터의 증오가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언제 어떤 길에서 만난다고 할지라도, 이 두 원수는 서로 등을 돌려댄단 말이야. 그러고는 격렬한 발걸음으로 서둘러 멀리 떠나가버리는데, 부끄러움은 슬픔에 잠기고 아름다움은 철면피한 생각을 하지. 만일 노년이 와서 그들을 미리 다스려놓지 않는다면, 결국 지옥의 공허한 암흑에 휩싸일 때까지 그럴 것이다.
―8754~8763행
파우스트 언덕이 있으면 그 모두를 피해 돌아가느니라. 파도가 그렇게 오만불손하게 날뛰고 있다 해도, 보잘것없는 언덕이라도 그에 도도하게 맞서며, 보잘것없는 웅덩이라도 그것을 힘차게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나는 마음속에서 급히 계획에 계획을 세웠노라. 저 광포한 바다를 해변에서 몰아내고, 습기찬 넓은 지역의 경계선을 좁히면서, 파도를 저 멀리 바다 속으로 밀어버림으로써 진정으로 값진 즐거움을 얻어보겠노라고. 나는 이 계획을 하나하나 검토해보았노라. 이것이 내 소망이니, 이 일을 추진하도록 하라!
―10223~10233행
파우스트 바로 이곳이 저주스럽도다! 바로 이곳이 참을 수 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만사에 능한 자네에게 말해두거니와, 내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이 있어, 나 그것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하자니, 나 자신이 부끄럽구나. 저 언덕 위의 노인들을 물러가도록 하고, 보리수 서 있는 곳을 내 자리로 삼고 싶다. 내 소유가 아닌 저 몇 그루의 나무들이 나의 세계소유권을 망치고 있단 말이다. 저곳에서 나는 멀리 사방을 살펴보기 위해, 이 가지 저 가지 위에 발판을 만들도록 하고, 멀리까지 시야가 확 트이도록 하여, 내가 이룩한 모든 사업을 바라보고, 현명한 뜻을 실천하여 백성들에게 넓은 땅을 마련해준, 인간 정신의 걸작품을 한눈에 둘러보고 싶단 말이다. 부유한 가운데 결핍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고통 중에 가장 혹독한 것이다. 저 작은 종소리, 저 보리수 향기가 교회나 무덤 속인 양 나를 휘감고 있다. 강력한 의지로 선택한 자유도 여기 이 모래에 부딪히면 산산이 부서져버린다. 어떻게든 저걸 내 마음에서 몰아내야겠다! 저 종소리가 울리면, 난 미칠 것만 같구나.
―11233~11258행
파우스트 넷이 오는 것을 보았는데, 셋만 떠나가는구나. 그들이 하는 말의 뜻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귓전에 남아 있는 여운은―곤궁(Not)이라 하는 듯한데, 뒤따르는 음산한 운자(韻字)는―죽음(Tod)이라는 것 같았다. 그 음조는 공허하고 유령처럼 둔탁하게 울렸지. 아직도 난 자유로운 경지를 싸워 얻지를 못했다. 어떻게 든지 내가 가는 길에서 마법을 제거하고, 주문 따위는 완전히 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자연이여, 내가 그대 앞에 한 사나이로 마주설 수 있다면, 한 인간으로 존재하려고 노력하려는 보람이 있으리라.
―11398~11407행
파우스트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줄달음쳐왔을 따름이다. 쾌락이라면 모조리 그 머리채를 움켜잡았고, 마음에서 흡족하지 않은 것은 놓아버려두고,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은 그대로 떠나가게 했다. 나는 오로지 갈망하고 그것을 이룩하였고, 또다시 소망을 품고서는 그다지고 기운차게 일생을 돌진해왔다. 처음에는 거대하고 과격했지만, 지금은 현명하고 신중하게 해나가고 있다. 이 지상의 일은 남김 없이 다 알고 있지만, 저 천상으로 향한 전망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두 눈을 깜박거리며 하늘을 향해 눈길을 돌리고서, 구름 위에도 자기 같은 자가 있기를 꿈꾸는 자는 바보로다! 이 땅에 굳건히 서서 이곳 주위를 돌아보도록 하라. 유능한 인간에게 이 세상은 결코 침묵하지 않으리라. 무엇 때문에 영원 속을 헤맬 필요가 있겠는가! 인식한 것은 모두 손아귀에 잡을 수가 있다. 이렇게 지상에서의 날들을 살아가도록 하라. 도깨비들이 날뛴다 해도 자기 갈 길만 가면 된다. 어떠한 순간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자, 그가 계속 가는 길에는 고통도 있고 행복도 있으리라!
―11433~11447행
근심 가야 할 것인가, 와야 할 것인가? 그런 자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지요. 훤하게 뚫린 길 한복판에서 멈칫멈칫 반걸음 내딛다가 흔들거려요. 점점 더 깊숙이 길을 잃고서, 온갖 사물을 비뚤어진 눈길로 바라보고, 자신에게나 남들에게 성가신 짐이 되어, 숨을 쉬면서도 질식할 지경이지요. 숨막혀 죽지는 않으나 생기가 없으며, 절망은 않는다 해도 몰두하지를 못해요. 이렇게 줄곧 이리저리 뒹궁기만 하고, 그만두자기 고통스럽고 억지로 하자기 불쾌하고, 때로는 해방이 되고, 때로는 억압을 받으며, 자는 듯 마는 듯 제대로 기운 차리지 못하고, 꼼짝없이 제자리에 달라붙은 체 지옥에 갈 준비나 하게 되지요.
―11471~11486행
파우스트 그렇다! 이런 뜻에 나 모든 걸 바치고 있으니,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란 이러하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여기에서는, 아기고 어른이고 노인이고 값진 세월을 보내게 되리라. 나는 이러한 인간의 무리를 바라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에다 대고 나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흔적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이러한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나는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 (파우스트, 뒤로 쓰러진다. 죽음의 영들이 그를 붙잡아 땅 위에 누인다.)
―11573~11586행
메피스토펠레스 지나가버렸다니! 바보 같은 소리. 어째서 지나갔단 말이냐? 지나갔다는 것과 전혀 없다는 것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영원히 창조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창조된 것은 무(無)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마련이다! “지나가버렸다?” 여기에 대체 무슨 뜻이 있느냐? 이거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런데도 마치 뭔가가 있는 것처럼 뱅뱅 맴돌고 있구나. 그래서 난 오히려 영원한 공허를 좋아한단 말이야.
―11595~11604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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