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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희곡은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시공사에서 나온 것을 한 번 읽었었다. (정확히는 중간에 읽다 말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근래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희곡선을 다시 읽어보았다. 4월 초에 보려고 예매해두었던 연극 한 편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모든 공연이 취소되면서, 아쉬움을 달랠 겸 체호프의 희곡들을 읽었다. 머릿속으로 무대의 모습과 조명, 인물들의 동작과 대사의 강약을 그려가면서.
나는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가할 수 있었던 남성작가로서의 톨스토이를 은연중에 비판하지만, 러시아 문학은 분명 투박하면서도 굵직하고 명료한 매력이 있다. 서구 열강에 비해 낙후된 사회문화(가령 지주와 농노의 대비)와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러시아 사람들의 품성과 삶의 방식은 차갑게 조명된다. 그래서인지 러시아 문학 속 인물들은 아주 투명하다.
작품 해설을 읽으며 알았지만, 체호프는 소설가로서 일찍 성공을 거둔 데 비해 희곡가로서 명성을 알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 희곡선에 수록된 유명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수백 편의 단편 희곡을 썼다고 한다. 모스크바 대학의 고학생으로서 작품활동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책에 소개된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마지막에 삽입된 <벚나무 동산>이다. 책의 네 개 희곡에는 공통적으로 무위도식하는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귀족이 등장한다. 유명 여배우에 귀족적인 취향을 지닌 <갈매기>의 아르카디나, 교수이지만 연구실적이라고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바냐 삼촌>의 세레브랴코프, 상속받은 유산으로 세 자매의 삶을 볼모로 재산을 저당잡는 <세 자매>의 안드레이, 파리에서 재산을 탕진한 뒤 귀향한 고옥(古屋)에서 현실감각을 결여한 채 살아가는 <벚나무 동산>의 라네프스카야까지.
앞의 세 작품에서는 구태의연한 이들 존재의 결말이 명료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벚나무 동산>에서 라네프스카야가 극의 마지막에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준엄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극한의 현실 앞에서 고통의 결말을 발견한다. 그리고 생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아예 파국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 <갈매기>, 비교적 결말을 열어두는 <바냐 삼촌>과 <세 자매>와 달리, <벚나무 동산>이 유달리 인상깊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다음에는 체호프의 단편선도 읽어보고, 내친김에 투르게네프의 글도 읽어보고 싶다.
니나 살아 있는 존재들의 몸은 먼지로 변해 사라지고, 영원한 물질은 이들을 바위로, 물로, 구름으로 만들어 버렸노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영혼은 하나로 합쳤노라. 합일된 우주 혼-그것은 나…… 나…… 내 속에 알렉산드로스의 영혼, 카이사르의 영혼, 셰익스피어의 영혼, 나폴레옹의 영혼, 그리고 가장 열등한 거머리의 영혼도 함께 있노라. 내 속에 인간들의 의식이 동물들의 본능과 합쳐 있으며, 나는 그 모든 것, 모든 것, 모든 것을 기억하노라. 그리하여 그 하나하나의 삶을 나 자신 속에서 또다시 겪도다.
……나는 고독하다. 백 년에 한 번 내가 입을 열어 말하노니. 내 목소리가 이 공허 속에서 음울하게 울리노라. 그러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 창백한 불빛이여. 그대 또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구나……. 아침 녘에 썩은 늪이 그대를 토해 내면 그대는 노을이 질 때까지 방황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의지도 없이, 생명의 떨림도 없이. 그대 안에서 생명이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영원한 물질의 아버지, 악마는, 마치 바위 안에서 그리고 물속에서 그러듯, 매 순간 그대 안에서 원자들을 교체하나니, 그대는 이로 인해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구나.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정신만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남도다.
-p. 23~24
아르카디나 ……나는 일을 하고, 느끼고, 항상 분주한데, 당신은 늘 한 자리에 앉아만 있잖아요. 그건 사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나에겐 원칙이 있어요. 미래를 곁눈질하지 말 것. 나는 절대로 노년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닥칠 일은 어차피 닥치는 거니까.
-p. 37~38
트리고린 ……그러나 웬걸, 머릿속에선 벌써 육중한 무쇠 포탄이 굴러다니고 있어요. 새로운 주제 말입니다. 그게 벌써 나를 책상으로 끌어당기고, 그러면 또다시 허겁지겁 쓰고 또 쓰는 겁니다. 항상 그런 식이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쉴 틈도 없고, 난 마치 자신의 삶을 먹어 치우는 기분이 들어요. 바깥에 있는 남들에게 내줄 꿀을 얻기 위해서, 나는 내가 가진 가장 훌륭한 꽃을 꺾고 꽃가루만 거둬들인 다음, 그 꽃을 뿌리까지 짓밟아 버리는 겁니다.
-p. 52~53
트리고린 (혼잣말로) 당신에게 내 생명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와서 가져가세요.
-p. 70
아스트로프 ……아무 생각 없는 야만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것들을 난로 속에서 불살라 버리고, 우리가 다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을 함부로 파괴해 버린단 말입니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늘려 나갈 수 있는 이성과 창조적 능력을 부여받았는데, 이제까지 창조보다는 파괴만 하고 있어요.
-p. 126
소냐 우리는 쉴 거예요! 우리는 천사들의 목소리를 듣고, 하늘을 채운 영롱한 별빛들을 볼 거예요. 지상의 모든 악이, 우리의 모든 고통이 자비의 바닷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그 자비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볼 거예요. 우리의 삶은 고요하고, 부드럽고, 애무처럼 달콤하게 될 거예요. 난 믿어요, 믿어요…….
-p. 200
솔료니 ……흥미로운 건, 나중에 무엇이 정말 고귀하고 소중하며 또한 무엇이 보잘것없고 우스꽝스럽게 될지를, 지금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나, 이를테면 콜럼버스의 발견 같은 것도 처음에는 쓸모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보였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어떤 얼간이가 쓴 헛소리가 진리처럼 보이기도 했지요. 어쩌면 우리가 그럭저럭 순응하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 생활도 나중에는 이상하고 불편하고 어리석고 불결한, 그래서 심지어 사악한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p. 219
쿨리긴 Feci, quod potui, faciant meliora potentes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누구든 더 잘할 수 있는 있다면 해 봐라) …… 우리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삶의 형식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형식을 잃게 되면 그걸로 끝나는 거지요. 우리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예요.
-p. 226~227
이리나 ……일을 해야 돼요, 일을. 우리가 울적한 이유는, 인생을 이토록 어둡게 보는 이유는 노동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노동을 업신여기는 사람들 속에서 태어났어요…….
-p. 230
안드레이 모스크바에서 레스토랑의 드넓은 홀 안에 앉아 있으면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 그러면서도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질 않거든. 그런데 여기서는 모두가 아는 사람이고 모두가 나를 알아보지. 그런데도 낯설어. 낯설어……. 낯설고 외로워.
-p. 240
베르쉬닌 (잠시 생각을 해 보고 나서) 어떻습니까? 내 생각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반드시 조금씩 변하게 되어 있고 이미 우리 눈앞에서 분명히 변하고 있어요. 2백 년, 3백 년 그리고 천 년 뒤에는 행복한 새 세상이 올 겁니다. 우리는 그 세상에 참여할 수 없어요. 물론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 세상을 위해 지금 살고 있고, 일을 하고,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리 존재의 유일한 의미, 어쩌면 우리 존재의 유일한 행복이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p. 248~249
이리나 ……(운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오, 내가 얼마나 사랑을 꿈꿔 왔는데, 벌써 오래전부터, 낮이나 밤이나……. 하지만 내 마음은 덮개가 잠긴 채 열쇠를 잃어버린 값비싼 피아노나 마찬가지예요.
-p. 310
투젠바흐 지나고 보면 우리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잘것없고 어리석은 일들이 이따금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 언제나처럼 그런 것들을 비웃으며 하찮다고 여기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일에 매달리고, 또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멈출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걸 느끼는 거야.
-p. 311
가예프 ……만약 어떤 병에 대해 너무 많은 처방이 내려진다면, 그건 말이지. 그 병이 불치병이란 뜻이야. 생각해보면, 머리를 쥐어짜면서 말이야. 나도 방법은 많아. 아주 많지. 한데 그건, 사실은 방법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거든.
-p. 354
트로피모프 영지가 오늘 팔리건 팔리지 않건 마찬가지 아닐까요? 영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이젠 다시 돌이킬 수가 없어요. 예전의 길은 잡초로 덮여 버렸습니다. 진정하세요, 부인. 자신을 기만하면 안 됩니다.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진실을 똑바로 보세요.
류보피 안드레예브나 무슨 진실? 당신은 어디에 진실이 있고 어디에 거짓이 있는지 보이겠지만 나는 시력을 잃어버렸는지 아무것도 안 보여요. 당신은 모든 중대한 문제들을 용감하게 결정하는 것 같지만, 이봐요 친구, 그건 어쩌면 당신이 아직 젊어서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겪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당신은 대담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지만, 그건 진짜 인생이 당신의 젊은 시선 너머에 감춰져 있어서 끔찍한 것들이 아직 제대로 안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p. 390~391
로파힌 그럼 잘 가게, 친구. 떠날 시간이야. 우리가 잘난 체하며 서로 뻗대는 동안에도 인생은 속절없이 흘러간다네. 쉬지 않고 한세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언젠가는 생각도 가벼워져서 나 또한 내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될지 모르지. 하지만 친구, 러시아에는 자기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뭐 어차피 마찬가지야. 이 세상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돌아가니까.
-p.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