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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은 뒤 이 책을 집어든 것을 순전히 우연의 일치라 해야할지…… 집을 나서며 가장 얇은 책을 고른다는 것이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사건>. 이전에 읽다 만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사건Events>을 떠올리게 하는 책 제목 때문에, ‘사건의 반전(反轉)’이나 ‘인식의 환기(喚起)’가 압축적으로 담긴 글을 잠시 기대했던 것 같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책만큼 어떠한 인식을 환기시키는 글도 없지만. 임신 중절을 시도하는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과 매끄럽게 이어진다. 글에는 뱃속 아이의 아빠에 대한 부분이 사실상 도외시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화자의 행위와 감정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차우셰스쿠 독재통치 하 불법적으로 임신 중절을 시도하는 어느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루마니아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연상되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남에 따라 낙태를 처벌하는 현행법은 올해까지만 효력이 유지된다. 저자 아니 에르노 역시 프랑스 사회가 임신 중절을 더 이상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자 비로소 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밝힐 수 있었음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이 책은 사건의 공동책임자인 P.를 이야기의 바깥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자신 안에 뭉뭉하게 자리잡고 있던 사건 그 자체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때문에 P.라는 한 남성의 무책임함보다도, 오히려 그녀 자신과 동갑으로 보였던 외과의사의 계급의식이 더욱 명징하게 보이는 것이다. 위생지식을 결여한 중산층을 대하듯 박대하던 흰 가운 차림의 젊은 외과의사에 대한 기억은 사건의 개인사적인 측면뿐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맥락까지 짚어낸다. 아니 에르노는 지극히 내밀한 개인의 영역을 협소하게 조명하는 대신, 갓 인화된 사진처럼 중립적으로 사건을 베낀다. 때문에 사회적인 맥락으로 볼 때 20대의 길목에서 아니 에르노가 경험한 사건은 단지 낙태죄가 헌법불일치라는 사법기관의 판결만으로 종결되지는 않는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임신이라는 신체적 변화 이외에도 사회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제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 그밖에 뒤따르는 여러 육아 문제와 같이 여성에게 부담되는 여타 이슈들은 <사건>이라는 작품 안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짧은 글임에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괴로운 에세이 말고 잠시 다른 글을 읽고 싶기도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다른 글을 더 찾아보고 싶기도 하다.
시간은 내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괴해야만 했던,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p. 21
이야기가 나를 이끌고 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불행의 의미를 내게 강요하는 느낌이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고 단지 두터워지기만 하는 시간이 끝없이 지체되도록 온갖 방법으로 - 세부적인 요인들을 찾아 메모하고, 반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사건을 분석하는 일 - 노력해 가며, 나는 몇 날, 몇 주를 훌쩍 뛰어넘고 싶은 욕망에 맞서야만 한다.
-p.32
……17구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이미 어두웠다. 거리 안내판에는 ‘엥파스(impasse) 카르디네’가 아니라 ‘파사주(passage) 카르디네’라고 적혀 있었고, 그 표지를 보자 안심되었다.
-p. 50
내 다리 사이로 커튼이 내려진 창문과 길가 반대로 난 다른 창문들, P.-R. 부인의 흰머리가 보였다. 이런 곳에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에 학교에서 몸을 숙이고 책을 보는 여학생들을, 콧노래를 부르며 다림질을 하고 있을 엄마를, 보르도 거리를 거닐고 있을 P.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자기 주변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래 봐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은 이전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따름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계속 내게 ‘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라고 묻게 할뿐인데.
-p. 54
“나는 빌어먹을 배관공이 아니야!” 이 문장, 이 사건을 따라 늘어서 있는 다른 문장들처럼 지극히 평범할 뿐 아니라, 다들 생각 없이 큰 소리로 내뱉었다. 이 문장은 내 안에서 매번 폭발해서 터져 버린다. 아무리 반복해 봐도, 사회 정치학적 분석도 그 폭력성을 완화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빌어먹을 배관공이 아니야!”라고 고함을 퍼붓는 고무장갑을 끼고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를 순간적으로 본 듯싶다. 그리고 아마도 당시 프랑스 전체를 웃게 했던 페르낭 레이노의 촌극에서 따왔을 이 문장은 계속해서 세계와 나의 계급을 나누고, 마치 몽둥이라도 사용한 듯 의사들을 노동자들과 중절한 여자들에게서 분리시키고, 지배자들과 지배받는 이들을 분리한다.
-p. 68~69
루앙으로 돌아왔다. 춥지만 햇볕은 좋았던 2월이었다. 나는 똑같은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자동차들, 학생 식당 테이블 위의 식판들,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의미가 넘쳐 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넘쳐 난다는 바로 그 이유로 단 하나의 의미를 포착할 수 없었다. 한편에는 너무나 의미가 많은 존재와 사물이 있었고, 다른 편에는 아무 의미 없는 말들과 단어들이 있었다. 언어를 넘어서는 순수한 의식이 흥분된 상태 속에 있었다. 밤도 어쩌지 못했다. 깨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얕은 잠을 잤다. 내 앞에서 작고 하얀색의 아기 인형이 떠다녔다. 쥘 베른의 소설 속 우주 비행사들을 계속해서 쫓아다니며 하늘에 떠다니는 개의 시체 같았다.
-p. 74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 사건에 대해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유일한 죄책감을 지웠다. 재능을 받았지만 낭비해 버린 듯. 경험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모든 이유를 넘어서서 무엇보다 가장 확실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하나 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p.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