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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필요악이라면, 그리고 그 자유를 매순간 낭비하고 있다면,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착각이라면. 근사한 책표지만큼이나 모든 문장을 통째로 머릿속에 새기고 싶은 책.
……그것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루시는 상황에 따라 극도로 맹렬하게 변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미동조차 않은 채 예의 바르고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인간은 지나치게 연극적인 존재라 열정도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 그렇기에 인간 생의 절반은 모호하고 격렬한 가장(假裝)이다.
―p. 27~28
하지만 루시의 가장 눈에 띄는 아름다움은 표정이었다. 작은 불꽃같아서 관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깜빡거리지 않았고 환하거나 따뜻함도 없었다. 욕구나 소명에 인생의 모든 순간을 집중하는 기운 넘치는 남자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선하지만 악하다고 오해받고, 반대로 악한데 선하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루시의 경우에 그 표정은 주로 눈에 나타났다. 루시의 눈은 검은색이 아니라 구슬픈 갈색이고 터무니없이 컸으며 평평한 머리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p. 29
의아했다. 나는 미국 위스콘신의 농장과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1922년에는 독일에서 가난하게 자랐지만 배고픔의 정확한 감각, 즉 배가 느끼는 감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비교적 잘 먹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인간의 배고픔이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른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문학 작가였다. 하지만 나에게 재능이 없다고 경고해 준 사람은 없었다. 결국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은 희망은 쓰고 뜨겁고 안절부절 못하는 경험이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질 터였다.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는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자존심과 괴로움 때문에 다시 날지 못하고 억눌린 영감을 안고 지루해서 죽을 것 같은 상태로 기다린다.……
―p. 32
성욕이 강한 남자들은 항복하고 결혼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않는 한, 굶어 죽는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나는 아직 젊었지만 다행히 사랑에 빠져 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초기의 다툼과 실패가 경고를 한다. 친구들이 털어놓는 비밀과 다른 남자들에 대한 뒷말을 통해 기대의 모호한 형태를 발견한다. 운이 다한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육체가 더 이상 젊지 않게 된 후에도 젊음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랑받을 가능성도, 사랑할 능력도 줄어드는데 사랑의 복통은 여전히 강렬하다. 노총각은 늙은 매와 같다.
―p. 33
……물론 진정한 사랑과 욕망은 동일하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도 아니며 분간하기 어렵지도 않다. 단지 그것들은 서로를 반영하고 모방하고 설명할 뿐이다.
―p. 34
……완벽한 야생의 생명체 매는 끔찍한 굶주림 속에서 조금씩 서서히 굴복한다. 하지만 굴복과 사육이 전부일 뿐, 길들여진 매는 절대로 편안해하지 않는다. 일 년 내내 수컷과 암컷을 나란히 놓아둔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언젠가 싸움은 멈추지만 계속 혼자 지낸다. 굴복한 상대에 대한 경멸 혹은 자기 경멸이 그들을 비탄에 잠기게 하는 듯하다. 절대로 둥지를 만들지도, 알을 낳지도 않는다. 속박된 상태에서 태어나는 매 새끼는 단 한 마리도 없다. 굴복 상태를 진정으로 수용하지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일도 없다.
―p. 37
……“L’individu seul est esclave; l’espèce est libre.”……매는 개인으로서만 노예일 뿐 종은 자유롭다…….
―p. 38
……얼마만큼의 자유가 진정한 인간의 동기인가, 얼마만큼이 낭비고 어리석다고 할 수 있는가?……
―p. 39
……나무들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무리 지어서 혹은 일렬로 늘어서거나 저 멀리 홀로 서 있는 모습은 공원의 미학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나무들이 서로한테 품은 감정을 표현해 주는 듯했다. 독특한 애정, 복종, 자부심 혹은 고통 같은 것. 다 함께 모여 있을 때의 인간과 달리 나무들은 많은 것을 약속하거나 위협하지도 않았다. 사건도 변화도 없었다.
―p. 42
하지만 판단력이 떨어지면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을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애통해했다. 과거의 사랑이 해로웠다면 사랑이 손에 들어와도 지킬 수 없다. 그것을 잡은 손이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연민 또는 자기 연민에 손이 무뎌져서 아무런 표시도 남지 못한다. 수치심과 좌절감을 안고 원래의 자리로 날아간다. 둥지도 없고 옆에 아무도 없다. 원래 앉아 있던 바위 혹은 같은 주인의 팔로 돌아간다. 열정은 너무 사소해서 다정하지 않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으려 애쓰며 꾸벅꾸벅 졸고 문제를 피해가는 꿈을 꾼다. 타인을 위해, 예의를 지키기 위해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것이다. 간지러운 손바닥, 추한 혀, 앞이 보이지 않는 눈, 텅 비고 불편한 온몸, 욕망의 외침, 귀에 울려 퍼지는 통증. 다른 이에게는 절대로 들리지 않는 그 울림이 너무 지겨워서 빨리 늙어 버리기를 바라게 된다.
―p. 50~51
……어쩌면 상상의 죽음과 절망적인 욕망은 언제나 인간의 머릿속에 나란히 같이 누워 있어서 어리석지만 둘을 서로 착각하는지도 몰랐다.
―p. 53
취기는 한 사람의 인간성에, 그리고 그 사람의 취하지 않은 평소 모습에 특유함과 고유의 불투명함을 더한다. 단조로운 얼굴색, 목소리의 높이, 불안한 씰룩거림.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투명성과 노출이다. 갑자기 작은 구멍이 생기기 때문이다. 해부학 같은 가르침을 준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가진 공통적인 영혼의 도관과 부비강과 방광을 보라! 취기의 속임수는 인간의 기본적인 특징일 뿐이다. 인간의 평범한 마음 상태는 이 병적인 아일랜드 남자의 주절거림과 절대로 완전히 다르지 않다. 나는 자신이 단순한 인간 형상의 점토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거북스러운 당혹감을 느꼈다. 오직 예술만이 인간에게 그런 느낌을 줄 권리가 있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싫어진다.
―p. 71~72
……어쩌면 나는 자유에 대한 신념이 없거나 자유가 인생의 단편적인 사건일 뿐이라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자유란 손에 넣었을 때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이득을 얻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말이다……
―p. 86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는 열정, 상황이나 실수 때문에 산산조각 나는 사랑, 사랑을 가장한 성욕은 모두 진정한 사랑이라는 먼 길, 특히 결혼에 비하자면 사소한 결과이자 자발적이고 일시적 불안에 불과했다. 결혼 생활에서는 모욕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고통을 견뎌야 할 뿐만 아니라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하는 놀라운 양의 용서가 필요하다. 사랑에 만족이 주어지면 남은 삶의 큰 부분은 그 만족을 위한 지불에 불과하다. 계속되는 분할식 지불. ……사랑의 가치를 깨닫기도 전에 사랑의 대가를 먼저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애석한 일이기에.
―p. 89
“어느 쪽인지 궁금하네……타인을 죽이고 싶어서 자살을 하니까.”
―p. 99
……타인에 대한 내 생각은 단순히 추측, 희화화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듯하다. 나는 정확하지 않고 복수심에 불타는 서정적 표현 같은 것에 계속 무너진다. 나에게 복수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p. 100
나는 관념이 나쁘고 무수히 많은 무한소(無限小)이며 성가시고, 양이 얼마나 되건 사소한 사실보다는 나쁘다는 사실을 진즉 깨달았다. 비록 계속 잊어버렸지만, 내 회상을 흐릿하게 하는 감정은 좋건 나쁘건 실제 있었던 일의 흥분감보다 따뜻하고 약하다. 퍼지고 뒤얽히고 부패한 결실 없는 초목 같다. 그 아래에서는 자아마저도 사라진다.
―p. 10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