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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할둔의 두꺼운 아랍 역사서를 읽는 틈틈이 쏜살문고에서 나온 책을 읽고 있다. 책이 가볍고 얇아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앞서 <순례자 매>를 재미있게 읽어서, 여러 권의 문고본을 주문해 두었었는데, <자기만의 방>은 그 가운데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낚시를 통해 사유(思惟)를 건져 올린다는 도입부의 문장이 낯익은 걸 보면, 책을 읽기 전에 다른 글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접한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이 책이 페미니즘의 입문서 또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바이블쯤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사실 처음 책을 집어들 때에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제목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이 책은 그런 성격의 이야기와 거리가 멀다. 자기만의 방과 연간 오백 파운드의 수입.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로 자기 자신을 글로 나타내기 위해 필요하다고 버지니아 울프가 제시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 글은 아주 잠깐 등장할 뿐인 ‘존’이라는 청자를 위해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투의 화법을 활용하고 있다. 글이 담고 있는 ‘여성주의’라는 주제의식과 별개로 문장과 문체를 먼저 보자면 아주 훌륭하게 정제된 글이었다. (그리고 영문의 매력을 한글로 느낄 수 있다는 건 좋은 번역의 몫이 크다.) 여성에게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교구의 어느 잔디밭에서 사색에 잠긴 화자의 이야기와 함께 포문을 여는 글은, 뒤이어서 남학교에서 제공되는 오찬과 여학교에서 제공되는 만찬을 비교하는 대목으로 이어지는데, 이들 대비를 통해 여성이 처한 조야하고 열악한 상황을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글이 진열대를 번듯하게 정돈하듯 페미니즘을 가지런히 펼쳐 보이는 방식을 구경하기에 앞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뼈저리게도) 권리의 성차(性差), 부(富)의 성차, 지위의 성차에 대한 논의보다 ‘돈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명제에 마음이 더 크게 동요(動搖)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가 숙모로부터 매년 오백 파운드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을 때, 영국 여성들이 처음으로 참정권을 얻었던 것보다 더욱 안도감을 느꼈다는 글속의 회고처럼 말이다. 영국문학사를 통틀어 유복한 이들만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고, 평범한 계급이었지만 대가의 반열에 올랐던 키츠는 세상에 재능을 선보일 수 있었던 대신 요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녀의 지적은, (글쓰기가 아닌 어느 영역에서라도) 삶이 돈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쓰라린 현실을 적시하고 있다.
다시 이 글의 본론으로 되돌아와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해본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내 표현대로 풀어보자면, 세상을 바라보는 프리즘이 남성에 의해 굴욕적으로 굴절되고 오염되어야 했던 여성들은, 단단한 족쇄를 풀고 (또는 족쇄를 풀 수 없다면 족쇄를 매단 채 힘겹게 걸어서라도)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다만 이 글이 아주 잘 쓴 좋은 글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이 글을 읽기에 앞서 나는 사실 페미니즘을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성으로서 어느 정도는 방어기제도 작동했을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나로서는 여성이 처한 현실이 녹록치 않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에 공감을 표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성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불이익을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반면에 이런 질문은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남성이기에 배타적인 혜택을 누린 적이 있었나?’ (여기서는 혜택에만 초점을 맞추고, 군 복무처럼 의무에 관한 해묵은 이야기는 잠시 뒤로 접어두고 싶다.) 다시 질문을 고쳐서 ‘성별만으로 혜택을 받은 적이 있나?’ 이는 분명 그렇다. 희한하게도 고등교육을 시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부모들이 자녀의 성별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는데도, 정작 교육받은 젊은이들을 받아들여야 (채용해야) 할 관리계층의 여러 조직에서는 단지 성별만으로 남성을 선호하고 여성을 꺼린다. 어느 지점에서 가파른 절벽이 솟아오른 듯하다. 어떤 보수적인 조직에서는 여성을 늘상 ‘조심해야’ 할 대상, 그러니까 성공가도를 달리기 위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할 무언가라는 인식을 공유함으로써 마치 여성을 화기물 다루듯 대해야 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물론 남성은 이런 인식의 틀 안에서 손해 볼 일은 없지만, 불편한 궁금증은 하나 따라붙는다. ‘이 조직을 남성으로 채워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구성원 개개인의 자질이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친 조직은 집단최면에 빠지기 쉽다. 앞뒤 따지지 않는 상명하복의 마인드, 맷집, 마초이즘으로 지금껏 조직을 잘 꾸려 왔다는 간편한 자기인식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우리 사회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남성에게도 독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개선의 움직임이 꾸준히 점차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단적인 예로, 기업의 제반여건을 고려해가면서 순차적으로 육아휴직을 남녀 모두에게 의무화하는 방안도 충분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남성적인 여자, 여성적인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써, 남성성과 여성성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모두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지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남성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하향평준화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요새 성별 대립을 두고 동원되는 온갖 혐오 레토릭을 전혀 따라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꼭 성별이 아니더라도 사회 각 분야에서) 혐오문화가 싹트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런 면에서 갈등과 시기를 부추기지 않고, 합리적이고 차분한 톤으로 여성주의를 저울질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누구나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사색(실제 그 값어치보다 조금 더 당당한 이름으로 부르자면)이 그 낚싯대를 강물 속에 드리웠습니다. 그것은 몇 분간 물 위에 비친 그림자와 수초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물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지요. 마침내 (아시다시피 미약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지자) 낚싯줄 끝에 어떤 생각이 갑작스럽게 응결되었습니다. 그래 그것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살짝 펼쳐 놓았지요. 아아, 풀밭 위에 내려놓자 나의 이 사고는 얼마나 작고 하찮게 보였는지요. 사려 깊은 어부라면 언젠가 살이 더 붙여 요리해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라도록 다시 물속에 놓아줄 만한 정도의 물고기였습니다.
-p. 20
……그동안 노란색, 진홍색으로 빛나던 포도주 잔들을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지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등뼈의 절반쯤 내려간 곳, 영혼이 머무는 곳에서 점차 불이 켜졌지요. 그것은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할 때마다 우리가 빛나는 재기라고 부르는 단단하고 작은 전기 불빛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심오하고 섬세한 지하의 작열하는 불빛이며 합리적인 교제의 풍부한 노란 불꽃들입니다.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재치를 번뜩일 필요도 없지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
-p. 27~28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세계의 아름다움이 드러났다가 곧 사라지는 순간에 곧 사라질 세계의 아름다움에는 심장을 조각조각 잘라 내는 두 개의 날, 즉 웃음의 날과 번민의 날이 있지요. 봄의 황혼 속에서 펀엄의 정원은 거칠게 훤히 트여 있었으며 수선화와 초롱꽃들이 기다란 풀밭에 팽개쳐진 듯 무관심하게 산재해 있었습니다.
-p. 35
……여성은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 왔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만일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거울 속의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고 삶에 대한 적응력도 감소될 것입니다.
-p. 61
……픽션은 상상력에 의한 작업이긴 하지만 조약돌처럼 땅 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은 그러할지 모르지만요. 픽션은 거미집과 같아서 아주 미세하게라도 구석구석 현실의 삶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종종 그 부착된 상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지요. 일례를 들자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홀로 완벽하게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이지요. 그러나 거미집을 비스듬히 잡아당겨 가장자리에 갈고리를 걸고 중간을 찢어 보면, 이 거미집들은 형체 없는 생물이 공중에서 자아낸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 존재의 작업이며, 건강과 돈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집처럼 조잡한 물질에 부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p. 68~69
……상상에 있어서 여성은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p. 71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을 비교할 때, 그들은 두 작가의 마음이 모든 방해물을 다 태워 버렸다는 사실을 의식할 겁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제인 오스틴을 알지 못하고 또 셰익스피어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제인 오스틴은 그녀가 쓴 모든 단어에 스며들어 있고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제인 오스틴이 그녀의 상황에서 어떤 것으로든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녀에게 부과된 삶의 협소함이었을 겁니다. 여성이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그녀는 단 한 번도 여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런던 시내를 다닌 적도 없고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사 먹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제인 오스틴의 성격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녀의 재능과 그녀의 상황은 완벽하게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나 é제인 에어û를 펼쳐서 é오만과 편견û 옆에 놓으며 과연 그것이 샬럿 브론테에게도 해당될까, 나는 의심스러웠지요.
-p. 104~105
“인간이 평온한 삶에 안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들은 행동을 해야 한다. 할 일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들은 일거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나보다 더 고요한 삶을 살도록 저주받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기 운명에 조용히 반역을 일으키고 있다. 지상을 채운 숱한 생명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반역의 효소가 발효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여성은 평정을 지켜야 한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들이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끼며, 자신들이 남자 형제들처럼 자신의 능력을 훈련하기를 바라고, 자신의 노력을 기울일 활동 영역을 요구한다.”
-p. 106
그러나 소설을 쓰는 문제와 성이 소설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쩌면 좀 더 깊이 파고들 수 있겠지요. 만일 눈을 감고 소설 전반에 대해 생각해 보면, 소설이란 삶에 대한 어떤 거울 같은 유사성을 가진 창조물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물론 소설이 삶을 단순화하고 왜곡하는 측면이 무수히 많이 있지만요. 어쨌든 그것은 마음의 눈에 어떤 형체를 남기는 구조물인데, 그것은 때로 사각형 모양으로 형성되고, 때로 탑의 형태로 구성되며, 양옆으로 뻗어나가 주랑이 생기고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처럼 굳건한 구조에 둥근 지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체는, 몇몇 유명한 소설들을 회상하며 생각하건대, 그것에 적합한 감정을 내면에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이내 다른 감정들과 혼합되지요. 그 ‘형체’는 돌과 돌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소설은 우리의 내면에 서로 적대적이고 상반된 온갖 감정들을 야기합니다. 삶은 삶이 아닌 어떤 것과 갈등을 일으키지요. 그러므로 소설에 대한 어떤 합의에 이르기가 어렵고, 우리의 개인적인 편견이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지요.
-p. 108~109
……지도를 가리키면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콜럼버스는 여자였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또는 사과를 집어 들고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으며 뉴턴은 여자였다고 언급할 수도 없지요. 또는 하늘을 보면서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고 비행기는 여성이 발명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성의 정확한 크기를 잴 수 있는 벽 위의 눈금도 없습니다. 훌륭한 어머니의 자질이나 딸의 헌신, 누이의 신의, 또는 가정주부의 능력을 잴 수 있는 1인치보다 더 작은 눈금으로 세밀하게 구분된 야드 자도 없습니다.
-p.127~128
……어쩌면 내가 지난 이틀간 생각해 온 방식대로 한 성을 다른 성과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은 고역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마음의 통일성을 방해하지요. 이제 두 사람이 함께 만나서 택시에 올라타는 광경을 봄으로써 그 노력은 중단되었고 마음의 통일성이 회복되었습니다. 마음이란 확실히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전적으로 의존하는, 참으로 신비로운 기관입니다. 나는 창문에서 고개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몸이 명백한 원인들로 인해서 긴장하듯이, 마음에도 단절과 대립이 있다고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p. 142
……우리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최고의 만족과 가장 완벽한 행복을 이룬다는 이론을 선호하는, 비합리적일지라도 심오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택시에 올라탄 광경과 그것이 나에게 준 만족감으로 인해 나는 육체의 두 성에 상응하는 마음속의 두 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도 또한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결합되기를 요구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나는 서투르게 영혼의 윤곽을 그려 보았지요. 두 종류의 힘, 즉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우리 인간의 내면세계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남성의 두뇌에서는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보다 우세하고, 여성의 두뇌에서는 여성적인 것이 남성적인 것보다 우세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정신적으로 협력할 때 우리는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남성이라 하더라도 자기 두뇌의 여성적인 부분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성도 또한 자기 내면의 남성적인 부분과 교섭을 가져야 하지요.
-p. 143~144
……여기서 책상으로 가로질러 가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제목이 쓰인 종이를 들어 올리며 생각했습니다만, 내가 여기에 쓰게 될 첫 번째 문장은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
-p. 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