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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II :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일상/book 2020. 12. 29. 22:36
두 번째 “로마사”는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1. 왕정 철폐 이후 라티움의 정치제도(호민관 제도) 2. 라티움의 대내 전쟁(vs. 에트루리아, 삼니움) 3. 라티움의 대외 전쟁(vs. 대희랍 동맹)
이 가운데 두 번째 내용은 개인적으로 지루했다. 지루했다기보다는 읽기 힘들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의 세 나라(고구려, 신라, 백제)뿐만 아니라 다른 연맹국가들—부여, 옥저, 동예, 가야—같은 국가들도 함께 다루는 파트다. 그런데 지명이나 인명이 매우 많이 등장하는 데 비해 앞에 실린 지도에는 지명이 1권만큼 상세하게 소개돼 있지 않아서 조금 읽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두고 각국이 대외 세력—켈트족이나 그리스, 카르타고—을 끌어들이며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며, 나제 동맹이나 나당 연합을 결성하던 우리의 고대사가 떠올라서 흥미로운 면도 있었다.
단연 가장 인상깊은 파트는 첫 번째 정치제도에 대한 대목이다. 로마는 그 세력과 영토가 점점 커짐에 따라—라티움 연맹체에서 주변국가, 나아가 반도 전체에까지—불가피하게 구시민과 영주민—쉬운 말로 토박이와 외래인—의 구별이 생겨난다. 마치 현대사회처럼 자본가와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한 부의 독점이 심화되고, 자연히 상민(구시민이 아닌 자)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도 늘어간다. 그렇게 해서 도입된 것이 호민관제도.
최초에 호민관은 로마의 법과 제도에 내재된 문제점들을 해소하기 위해 이루어진 정치적인 혁신이었다. 상민들로부터 표출된 이른바 민주적 열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집정관 제도를 따라 2인으로 구성된 호민관 제도는 생래적인 한계를 지닌 관직이었다. “견제”라는 제도적 기능에는 충실했지만, 놀라우리만치 귀족정과 원로원 정치에 빠르게 흡수되어 갔던 것이다. 결국 피호민들이나 상민들이 열망했던 자본제도와 토지제도의 폐해를 혁파하는 데는 호민관의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 다만 견제 기능에서 비롯된 파행은 로마 건국 4~5세기 사이에 자주 목격된다. 그런 것을 보면 ‘새로운 권력’을 통해 ‘오래된 권력’을 다스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걸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한 가지 아주 재미있는 건 왕정 철폐를 이루고 이탈리아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로마인들이 “2인”이라는 구성을 아주 좋아했다는 것이다. 통상 단 한 명의 왕이나 여러 명으로 된 합의체를 구성한 나라들의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2명”으로 된 집정관-호민관-재무관-안찰관 제도를 운영한다는 것은 확실히 생소하다. 이런 경우 하나의 국가를 제대로 통솔할 수 있었을까 싶은데, 로마인들은 재주껏 국정을 운영해 간다. 군사적이고 검소하고 용감한 문화를 만들고 가꾸었다는 것이 로마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다른 한 편 퓌로스 전쟁의 ‘알렉산드로스의 서방 원정’으로 비유한 대목도 재미있었다. 다음 이야기를 더 들여다 봐야겠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화하면서도 로마 공동체는 최대한 옛것들을 그대로 유지했다. 어떤 국가적 격변이 도대체 이처럼 보수적일 수 있을까 하겠지만 로마의 격변이 바로 그러했으며 공동체의 전통적인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도 격변을 통해 폐기되지 않았다. 이것은 격변의 전 과정을 통틀어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라 하겠다. 타르퀴니우스 왕가의 축출은, 이들을 고발하기 위해 상당 정도 날조된 보고에서도 나타나는 것과 같이 연민과 자유에 대한 갈망에 도취된 민중이 벌인 일이 아니었으며, 이미 서로 경쟁하며 서로 간의 지속적인 갈등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던 커다란 두 정파, 다시 말해 구시민과 영주민이 대립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두 정파는 마치 영국의 토리당과 휘그당이 1688년 국가가 국왕의 전제정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을 때 잠시 힘을 합쳐 이를 물리치고 이내 다시 둘로 갈라져 싸운 것과 흡사한 일을 벌였다. 구시민들은 상민들 없이는 왕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상민들도 구시민들에게서 단번에 정치권력을 빼앗을 만큼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p. 22~23
집정관과 호민관은 상호 경합하는 형사재판권을 가졌다. 다만 집정관은 간접적으로, 호민관은 직접적으로 이를 행사했다. 집정관에게 2인의 재무관이 있듯이, 호민관은 2인의 안찰관이 보좌했다. 집정관은 반드시 귀족이어야 했고, 호민관은 반드시 상민이어야 했다. 집정관은 좀 더 포괄적인 권력을 가졌지만 호민관은 좀 더 무제약적 권력을 가졌는바, 호민관의 거부와 판결에 집정관이 복종했고 호민관은 집정관의 그것에 대해 복종하지 않았다. 이렇게 호민관과 집정관은 서로 닮았으면서도 다른 한편 서로 대립적이었다. 집정관의 권력은 본질적으로 통치였고 호민관의 권력은 본질적으로 거부였다. 집정관만이 로마 시민 전체의 정무관이었고 호민관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자는 시민 전체가 선출했고 후자는 상민만의 집회가 선출했기 때문이다.
—p. 48~49
호민관 제도를 통해 성취된 것은 무엇인가? 상민들이 공동체 관직을 획득하길 원했을 때, 호민관이 상민들의 손에 쥐어진 강력한 무기로서 신분 갈등의 정치적 조정에 직접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기여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호민관의 원래 목적은 이것, 즉 정치적인 특권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토지 소유자와 자본가에게 대항하는 것이었던바, 민중에게 사법의 공정성을 확보해주고 국가재정이 합리적으로 운영되게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법을 부당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법 그 자체에 있었다. 어떻게 호민관이 모든 정규적 사법 절차를 일일이 저지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하나의 기이한 관직을 창설했고, 그 관직의 역할은 하층민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에 필요한 경제 개혁은 추진할 수 없었다. 호민관은 정치적 지혜의 증거가 아니라 부유한 귀족과 지도자 없는 민중의 어정쩡한 타협이었다.
—p. 50~51
호민관은 이제 제2의 최고 행정기구가 되었으며, 시민들을 통제하고 무엇보다 정무관의 월권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정부 혹은 원로원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 정부기구의 하나가 되었다. 이로써 호민관직의 본래 성격은 정치적으로 소멸되었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은 실제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로마 귀족 통치의 결함이 적나라하게 세상에 노출되었다는 것, 우세한 귀족 권력의 지속적 성장이 호민관직의 사실적 폐지와 결정적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 등과 함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무산자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한 기말술책으로 만들어진 무의미한 관직을 옆에 두고, 또한 정무관 혹은 정부기관 자체를 통체한다는 본래 무정부적인 역할을 가진 다분히 초법적 관직을 옆에 두고 국가 통치가 지속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모든 순기능과 모든 역기능을 보여주었지만, 민주주의의 이념은 로마인들의 마음속에서 호민관직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설령 호민관이 인민 대중에게 가져다주는 이익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호민관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국가적 변란을 치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기 위해 콜라 리엔찌(Cola Rienzi)까지 상기할 필요는 없다.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귀족 통치는 호민관직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의 통치를 절대적이고 강력하며 완벽하게 작동시켰다. 이로써 원로원에 대항하는 호민관의 어떤 조직적 견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정부는 호민관의 허망한 개별적 반대에 대하여 늘 힘들이지 않고 호민관직 자체를 이용하여 통제했다.
—p. 105~106
국헌의 정신과 관행에 따르면, 순수한 군사 문제가 아닌 국가 간의 조약은 전적으로 민회 권한이며, 원로원과 시민의 인준 없이 맺은 지휘관의 조약은 명백한 월권행위이기 때문이다. 최후통첩을 과감하게 물리치지 못한 로마 사령관들보다, 로마 사령관들에게 월권을 해서라도 군대를 구하도록 선택을 강요한 삼니움 장군에게 더 큰 잘못이 있었다. 로마 원로원이 강화조약을 거부한 것은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위대한 민족은 상당한 필연성이 없는 한 자신이 가진 것을 양여하지 않는 법이다. 모든 양여조약은 이런 필연성이 인정될 때이지 도덕적 책임에서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민족이 무력에 의한 늑약의 파기를 정당한 명예로 여기는 것으로 볼 때, 카우디움에서처럼 도덕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 처한 불운한 사령관이 맺은 조약을 용인하고 수용하는 것은, 만약 당한 치욕이 아직도 생생하고 민족 역량이 여전히 건재하다면, 명예로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p. 188
군사적・행정적 통일성은 아이퓌기아곶과 레기온해협에까지 아펜니노산맥 남쪽에 사는 전체 민족들에게 관철되었으며, 그 결과 이들 모두를 통칭하는 새로운 명칭이 생겨났다. 국법에 따른 가장 오래된 로마식 명칭이었던 ‘토가 입은 사람들’(togati) 희랍인들이 애초에 사용하던 이름으로 이후 널리 사용된 명칭인 ‘이탈리아인’이 그것이다. 이탈리아 땅에 거주한 다양한 민족들은 한편으로 희랍과의 대립 가운데, 다른 한편 무엇보다 켈트족을 막는 공동 전선을 통해 어쩌면 최초로 스스로를 하나로 느끼고 하나 된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갈리아 농부’가 나중에까지 이탈리아 농부에 대한 적절한 대조가 되었던 것처럼 ‘토가 입은 남자’ 또한 켈트족의 ‘바지 입은 남자’(braccati)와 대조되었는데, 아마도 이는 이탈리아 방어 체제가 로마를 구심점으로 집중화되는 과정에서 켈트족에 대한 방어가 그 이유이자 빌미로 작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p. 282~283
사람들은 통상 로마인들이 법학에 특권을 가진 민족이라고 상찬하고 그들의 탁월한 법을 하늘이 준 신비한 천재성의 결과라고 경탄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특히, 자신들의 법 상황의 지리멸렬함에 대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한 국민은 건강한 법을 가지고 병든 국민은 병든 법을 가진다’는 원칙은 너무도 명백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유례없이 불안정하고 미숙했던 로마 형법을 본다면 로마에 대한 칭송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법학이 특히 의존하는 일반적인 국가의 상황을 논외로 한다면, 로마 민법이 우월성을 갖는 원인은 주로 두 가지다. 하나는 원고와 피고가 채권을 주장하고, 또 마찬가지로 그러한 주장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며, 정식화된 언어로 이를 표명하도록 강제되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법률의 제정으로 법을 발전시키기 위한 상설 기관을 창설하고 이러한 기관이 실무를 직접 담당했다는 사실이다. 로마인들은 전자로써 변호의 지나친 억지를, 후자로써 무능한 법률의 제정을 가능한 한 배제했다. 바로 이 두가지 사유로 인하여 로마인들은 법이 언제나 확실해야 한다는, 그리고 법이 언제나 시의적절해야 한다는 대립된 두 요구에 대처할 수 있었다.
—p. 293~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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