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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단수(一人称単数)일상/book 2020. 12. 26. 01:20
あれから長い歳月が過ぎ去ってちまった。ずいぶん不思議なことだが、瞬く間に人は老いてしまう。僕らの身体は後戻りすることなく一刻一刻、滅びへと向かっていく。目を閉じ、しばらくしてもう一度目を開けたとき、多くのものが既に消え去っていることがわかる。夜半の強い風に吹かれて、それらは痕跡ひとつ残さずどこかに吹き飛ばされてしまったのだ。あとに残されているのはささやかな記憶だけだ。いや、記憶だってそれほど当てにはなるものではない。僕らは身にそのとき本当に何が起こったのか、そんなことが誰に明確に断言できよう?
—p. 22~23
「僕らの人生にはときとしてそういうことが持ち上がる。説明もつかないし筋も通らない、しかし心だけは深くかき乱されるような出来事が。そんなときは何も思わず何も考えず、ただ目を閉じてやり過ごしていくしかないんじゃないかな。大きな波の下をくぐり抜けるときのように。」
—p. 46
「人生を行き始めたばかりだった。しかしふと気がついたとき、そしてあたりを見回したとき、全ては既に終わっていた」。「死はもちろんいつだって唐突なものだ。」 「しかし同時にひどく緩慢なものでもある。君の頭の中に浮かぶ美しいフレーズと同じだ。それは瞬く間に出来事でなりながら、同時にどこまでも長く引き延ばすことができる。東海岸から西海岸くらいまで長く—或いは永遠に至るほど長くね。そこでは時間という観念は失われてしまう。そういう意味では、私は日々生きながら死んでいたのかもしれないな。しかしそれでも、実際の本物の死はどこまでも重いものだ。その時まで存在していたものが唐突にそっくり消えてしまう。まるっきりの無に消してしまう。そして私の場合、その存在とは私自身のことだった」
—p. 66~67
夢が死ぬというのは、ある意味では実際の生命が死を迎えるよりも、もっと悲しいことなのかもしれない。時としてそれは、ずいぶん公正ではないことのようにさえ感じられる。
—p. 74
でもそれはずっとあとのことだ。そこに至るまでの、一九六八年から七七年にかけての十年間、僕は実に膨大な、ほとんど天文学的な数の負け試合を目撃し続けてきた。言い換えれば「今日もまた負けた」という世界のあり方に、自分の身体を徐々にsらしていったわけだ。潜水夫が時間を欠けて注意深く、水圧に身体を慣らしていくみたいに。そう、人生は勝つことより、負けることの方が数多いのだ。そして人生の本当の知恵は「どのように相手に勝つか」よりはむしろ、「どのように上手く負けるか」というところから育っていく。
—p. 131
「私たちは誰しも、多かれ少なかれ仮面を被って生きている。全く仮面を被らずにこの熾烈な世界を生きていくことはとてもできないから。悪霊の仮面の下には天使の素顔があり、天使の仮面の下には悪霊の素顔がある。どちらか一方だけということはあり得ない。それが私たちなのよ。それがカルナヴァル。そしてシューマンは、人々のそのような複数の顔を同時に目にすることができた—仮面と素顔の両面を。なぜなら彼自身が魂を深く分裂させた人間だったから。仮面と素顔との息詰まる狭間に生きた人だったから」
—p.171
「私の考えるのですが、愛というのは、我々がこうして生き続けていくために欠かすことのできない燃料であります。その愛はいつか終わるかもしれません。あるいはうまく結実しな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たとえ愛は消えても、愛が叶わなくても、自分が誰かを愛した、誰かに恋したという記憶をそのまま抱き続けることはできます。それもまた、我々にとっての貴重な熱源となります。もしそのような熱源を持たなければ、人の心は酷寒の不毛の荒野となり果ててしまうでしょう。その大地には日がな陽光も差さず、安寧という草花も、希望という樹木も育ちはしないでしょう。」
—p. 205
私のこれまでの人生にはいくつかの大事な分岐点があった。右と左、どちらにでも行くことができた。そして私はその度に右を選んだり、左を選んだりした。そして私は今ここにいる。ここにこうして、一人称単数の私として実在する。もしひとつでも違う方向を選んでいたら、この私はたぶんここにいなかったはずだ。でもこの鏡に映っているのはいったい誰なのだろう?
—p. 225
「편의점 인간」 이후 올해 들어 두 번째로 읽는 일본 원서다. 얼마전 서점에 갔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이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고 고민 없이 원서를 샀다. 「1Q84」 이후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은 번역되기 전에 원서를 찾아보곤 했는데, 「일인칭단수」는 번역되어 나오기 전까지 출간되었는지도 몰랐다. 일본소설은 현대소설보다는 근대소설을 좋아하고, 굳이 따지자면 허무주의 가득한 일본 현대소설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꼬박꼬박 원서를 찾아 읽는 편이다. 현시점에서 해외에 가장 잘 알려진 일본작가이기 때문에 일본어를 연습할 목적으로 글을 읽기에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하루키가 선호하는 표현들에 외국어가 유난히 많기 때문에—예를 들면 ‘보조개(笑窪)’라는 일본말을 두고 굳이 딤플(dimple)이라는 영어를 섞어 쓴다—정말 일본어 공부가 되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 하지만 하루키 본인이 젊은 시절 영문학에 심취했었다고 하니, 그런 배경에서 나왔겠거니 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벌써 여러 편 접하다보니 하루키의 문체도 점점 익숙해진다. 다만 가끔 노골적인 음담패설이 아닌가 싶은 몇몇 대목들에서는 다시 아리송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단편집이다. 그것도 자전적인 단편집이다. 이 작품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허구도 실화처럼 쓰고 실화를 허구처럼 쓰기도 해서 어디까지가 본인의 이야기인지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개인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구절은 대체로 사실대로 담았으리라 생각한다. 처음에 나오는 네 개의 에피소드—<돌베개에>, <크림>,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위드 더 비틀즈>—까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지면을 많이 할애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도 ‘나이듦’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고베(神戸)라는 무대가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어쩐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이 여덟 편의 단편들은 나름의 시간 순서를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앞의 네 편은 유년기를 그리고 있고,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청년기를, <사육제>와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중장년기를, 그리고 마지막 단편 <일인칭단수>는 가장 최근의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 또 그러한 시간의 흐름에 걸맞게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에 이르러서는 하루키의 아이덴티티라고도 할 수 있는 ‘성(性)’에 대한 분방한 문장도 버무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에피소드는 바로 이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이었다. 혹자가 스케베(すけべ; 호색한) 같다고 한 표현이 섞여 있기도 하지만, 내용으로만 봤을 때는 (청년기에 해당하기 때문이어서인지)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산다는 것은 결국 이기는 일보다 지는 일이 많기에, 어떡해야만 이기느냐보다 어떻게 질 것인가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되돌아보건대 젊은 시절 지는 것에 익숙해져가는 삶을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지금은 이름이 알려진 작가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모르는, 그만이 보낸 인고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가장 짧으면서도 단연 독특하다. 굉장히 불쾌한 만남을 다루고 있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부끄러운 줄 알라(恥を知りなさい)’는 단골 표현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지만, 부끄러운 줄 알라니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네 번째 에피소드인 <위드 더 비틀즈>에서는 젊은 나이에 자살한 아쿠타가와라는 작가의 이야기가 잠시 등장하는데, 전후 시기 일본문학에서 이러한 부끄러움이나 자조 섞인 정서는 자주 등장한다. 이는 대개 패전 후에 찾아온 인간성 상실에 대한 깊의 회의감에서 나온 반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나 다자이 오사무의 글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2020년도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무엇일까?
하루키에 대해 가지는 아쉬움은 때로 그의 글들이 피상적이라는 점이다. 하루키는 한일 역사 문제에 관해서도 일본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일인칭단수>라는 마지막 에피소드 자체도 누군가에게 가했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잊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이 정확히 어디서 왜 비롯되는 건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고 난해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것이다. <일인칭단수>는 노년에 가까워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인 성격을 띤 글이기 때문에, 하루키가 평생을 살아오며 느꼈던 어떤 '개인적'인 반성과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유추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겠지만 작가가 왜 부끄러움에 대해 언급을 하는지 미스터리 소설 속 퀴즈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하루키의 기발한 착상이 반영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전작 「기사단장 죽이기」의 판타지적인 요소가 잘 드러난다. <크림>도 '기만'이라는 인간적 행위에 대해 개성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번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은 아마 누군가는 읽기에 조금 꺼림칙한 문장들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진솔하게 쓰인 글이다.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져 가는 요미가나를 반복해가며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던 (하지만 주제 자체는 결코 가볍지 않았던) 글이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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