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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믿어요. 그 정도가 아니라, 종교와 거의 대부분 국가의 법체계, 심지어 그 나라의 헌법도 동일하게 말하죠. 그러나 그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어요. 우리가 만들지도 않았고 얻은 것도 아닌 것에 무슨 권리가 있다는 말이지?라고 그는 말하곤 했어요. 그 누구도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혹은 예전에 이 세상에 있어본 적이 없다거나, 영원히 그 안에 있어본 적이 없다면서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 왜 죽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혹은 나중에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또는 영원히 그 안에 머무를 수 없다고 불평하나요? 그는 이런 두 가지 관점이 똑같이 황당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누구도 자기가 태어난 날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요. 그러나 자기가 죽는 날짜에 대해서도 불평을 하지 말아야 할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연에 의해 죽는 날짜도 그렇죠. 심지어 폭력적인 죽음, 그리고 자살도 우연의 작품이에요. 만일 우리가 이미 무(無) 속에, 혹은 부존재(不存在) 속에 있어본 적이 있다면, 그런 부존재를 무언가와 비교할 수 있고 과거의 것을 그리워할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더라도, 그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으며 터무니 없는 것도 아니에요.”
—p. 442~443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전에 썼던 하비에르 마리아스에 관한 포스팅—「새하얀 마음」과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솔직히 내가 읽은 글도 기억을 잘 못할 때가 있다.) 하비에르 마리에스의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그래서 종종 그의 글이 새로이 번역된 게 있나 찾아보곤 했었는데, 정작 두 포스팅에 내가 남긴 감상평에는 그런 평소 관심이나 호감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가졌던 호감이 기억이 그냥 최근에 갖게 된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사랑에 빠지기」에서 그런 조작・교배・간섭・윤색된 기억들을 다루기 대문에, 그런 내 착각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다시 확인하는 것은 그의 작품은 정말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여자 화자의 시선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냈을까? 빈틈이 없는데 버겁지가 않다)
작중에 디아스 바렐라는 ‘사랑하는 것(el amor)’과 ‘사랑에 빠지는 것(los enamoramientos)’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사랑보다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죽음도 똑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죽는 것’과 ‘죽어가는 것’은 다르다. 이때,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더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초월한 행위다. ‘이미’ 사랑을 형성한 단계에는 연인 가운데 한쪽의 의지와 생각이 개입될 여지가 있지만, 사랑에 ‘빠지는’ 찰나의 단계에서 일방은 모든 것이 마비되고 완전히 종속된 상태에 놓인다.
역설적인 것은 ‘죽음’은 성격이 '사랑'과 정반대라는 것이다. 즉 ‘이미’ 죽은 단계에서는 마치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처럼 죽음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미 죽은 자에게는 운신의 폭이랄 게 없다. 디아스 바렐라가 집요하게 언급하는 샤베르 대령의 이야기에서는, 아일라우 전투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대령이 산 자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이 산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고문이 될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 (남편의 죽음으로 애도의 기간을 마치고 재혼까지 한 부인은 샤베르 대령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하지만 죽어 ‘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비논리적인 과정이 아니다. 죽은 뒤에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첨언할 것이 없지만, 죽는 방법에 대해서는 누구든 적어도 발언권을 지닌다. 그런 선택과 결정의 틈이 있다는 점은 '이미' 사랑이 일정 궤도에 오른 상태와 비교될 것이다.
하비에르 마리아스가 디아스 바렐라라는 인물을 통해 대리 진술을 하듯이, 죽음은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설령 그것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자살이든 사고로 인한 것이든 타인의 의지 따른 살인이든 말이다. 특히나 작가 말대로 은닉된 범죄의 수가 재판에 부쳐지는 범죄의 수를 능가하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 죽음은 본래의 무게감마저 잃어가고 있다. 죽음은 삶이 시작된 것만큼이나 우연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길이 없고, 이해하고자 집요하게 매달릴 수록 점점 더 본질적인 질문에서 빗겨난다. 이처럼 산 사람들—또는 ‘남겨진 자들’ 또는 ‘죽은 이로부터 버려진 자들’—은 더 이상 죽은 이의 시간을 점유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죽음과 삶은 완전히 대칭적이다. 둘 모두 완전한 우연성과 불확실성에 기초하지만, 한쪽(죽음)은 이에 이르는 과정을 존엄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반면, 다른 한쪽(사랑)은 이에 이르는 과정을 고민할 새도 없이 이미 그 과정에 접어든다. 그런데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무엇인가?
우리가 모든 종류의 가능성—될 가능성, 안 될 가능성, 가능성 자체를 생각할 수 없을 가능성—에 노출된 세계에 살고 있고, 너무나 많은 종류의 기만과 속임수・교사(敎唆)・암투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다는 전제에서 작가는 자신의 논의를 앞으로 밀어붙인다.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말대로 아무리 완벽한 기계라도 인간의 거짓말을 판별할 수는 없다. 거짓말이라고 판별하는 기계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말로써 뒤집어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세상의 어떤 도구도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도 구분하지 못할진대, 방금 전에 입술을 떠나 허공에 맴도는 말이 절반만 거짓인지 8할만 거짓인지 측정할 방법은 더더욱 없다. 죽은 자들의 누적된 숫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겠지만, 죽은 사람은 언제나 유구무언이고 결국 세상—빤쯤인 진실과 반쯤인 거짓에 오염된 세상—은 산 사람들이 끌어간다. 그런 망각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나갈 수 있다.
때문에 이 글의 화자인 마리아 돌스는 ‘정의(Justice)’라는 주제에는 완전히 무심하고, 누군가의 과오를 힘들여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에서 진실은 단 절반만이 진실이고 거짓은 단 절반만이 거짓이기 때문에, 어떤 시점에 끼어들어 사실관계를 되돌려보려는 노력은 결국 절반만의 성공을 거둘 뿐이다. 그것은 미완일 뿐이다. 굳이 이 세계가 ‘악’에 찌들어 있다는 거창한 말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사랑이 흔한 세상에 기만 역시 넘쳐나는 세계를 살고 있을 뿐이고, 이를 애써 외면할 필요도 없지만 '정의롭다'고도 할 수 없는 개입에 가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역자는 이를 ‘불처벌’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너무나 많은 관음증, 너무나 많은 협잡, 너무나 많은 호도와 과장이 난무하는 세상을 하비에르 마리아스가 혐오하고 조롱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부추기는 미디어와 군중심리를 향해 작가는 일갈을 가한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 조금씩 발을 들이고 있는 우리 중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처벌할 수 있다거나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죽음이 지나간 시간을 삶이 맞이할 시간보다 앞에 두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럽다고 본다. 때문에 마리아 돌스는 「삼총사」의 아토스처럼 옛 연인을 사형시키는 대신에, 「샤베르 백작」의 변호사 데르빌처럼 현재의 상황을 불확정 상태로 흘려보낸 것이다. 맥베스가 부인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내뱉었던 ‘hereafter’라는 말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결국 삶과 죽음 사이에 넓은 스펙트럼의 가능성이 놓여 있고, 우리는 그런 확정되지 않은 찰나 속에서 사랑에 빠지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동시에 어떤 내밀한 기대를 품고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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