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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사람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진정한 자신으로 남지 않는다면 사랑은 존재할 수 없는 거야.”
...... ‘하지만 나 혼자 있어야 한다면 내 본래 모습으로 있는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이게 바로 코지모 형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p. 271
앞서 읽은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과 비슷한 설정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반쪼가리 자작」에는 선악의 대립과 조화가 다뤄지는데, 「나무 위의 남작」에서는 ‘나무 위의 세상’과 ‘땅 위의 세상’으로 세계를 나눈다. 아마 이 작품은 나무 위의 인간과 땅 위의 인간을 나눔으로써,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접촉, 그리고 ‘관계’와 ‘나’ 사이에 발생하는 딜레마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하다.
관계를 앞세우면 나 자신이 희생되고, 나 자신만 앞세우면 관계가 소원해진다. 상대를 먼저 헤아릴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충실할 것인가, 둘 사이의 균형점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다. 코지모 남작은 어릴 적 우연한 계기로 나무 위에 올라간 뒤 땅에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후 코지모는 사랑하는 연인 비올라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땅으로 내려가는 것을 망설인다. 그리고 끝내 땅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서 마음을 열지 못한 코지모는 사랑도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읽었던 이탈로 칼비노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코지모의 동생 비아조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된다. 즉, 때묻지 않은 어린 아이의 관점에서 인물과 상황이 서술되기 때문에 동화를 읽는 느낌이 든다. 코지모가 아니더라도 소설에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타인과의 접점을 찾지 못하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영토를 보전하고 확장하는 데에만 골몰하는 코지모의 아버지 아르미니오 남작, 터키에서 보냈던 젊은 시절 향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코지모의 삼촌 카레가 변호사, 자신만의 신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포슐라플뢰르 신부, 다른 사람의 불쾌감을 즐기는 코지모의 누나 바티스타, 모든 대상에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코지모의 어머니 코라디나, 독서에 빠져 현실감각을 잃은 산적 잔 데이 브루기. 이에 더해 종파—얀센파와 예수회—간의 교조주의적인 행태까지 함께 다뤄진다.
이처럼 소설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꾀하지 않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반쪼가리 자작」에 비하면 바람직한 인물상이 적게 소개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무 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 다소 환상적인 요소들이 가미되는데, 이 역시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반쪼가리 자작」과 유사하다. 비슷한 패턴이 보여서 조금 심심하게 읽기도 했는데, 이탈로 칼비노의 또 다른 글에서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면 좋을 것 같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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