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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발명 1700~1789 / 1789 이성의 상징일상/book 2021. 1. 26. 23:21
강렬한 자유가 펼쳐진다는 말은 무엇인가? 사실 초기 낭만주의에서 고삐 풀린 상상력의 수단을 동원하는 일은 진정한 독립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성인이 되어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데서 느끼는 두려움의 표시로 나타난다. 칸트는 ‘계몽’이라는 말을 미성년에서의 벗어남, 전통적인 권위의 족쇄를 결국 용기 있게 벗어나 자유롭게 사유하는 의식의 해방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사악한 즐거움을 대표하는 이들이 빛을 마주할 때 질겁한다는 말은 단순한 은유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 무엇도 내면의 법을 피해갈 수 없는 성취하기 어려운 자유를 주장하기보다 대문자의 아버지Père라는 전통적인 형상을 모독하는 편을 선호한다. 그들은 감히 맞서고 과오를 저지르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결국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처벌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절대적 권위가 존재한다는 증거이며, 그들은 그 권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p. 90~91
루소를 필두로 18세기는 감상적인 고독이 등장한 세기다. 존재가 분리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어디에 쓸 줄도 모르는 자유를, 말하자면 자기 내부에서 소진되어버리는 자유를 향유하는 고독 말이다. 욕망과 회한의 에너지는 자아 영역의 내부에서 탕진되어버린다. 이렇게 고조된 에너지는 외부에 역점力點을 둘 수 없으므로 개인에게 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든 이런 사례는 수많은 작품에 드러나 있다. 이 에너지는 구체적인 ‘현실’과 거리를 두면서, 시나 예술작품 같은 상상의 대상을 공들여 창작하는 것으로 출구를 찾을 수 있다. 이 욕망과 노스탤지어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자살이나 죽음의 슬픔은 이야기의 소재가 되면서 그런 식으로 규정되고 이런 경험 속에서 창조적 의지는, 예술이 구현하는 또다른 삶의 방식에 따라, 과거에 강도 높게 겪었던 그 파괴적인 힘들을 변모시킨다. 그러므로 18세기 말의 수많은 청춘은 ‘죽음을 위한 자유’를 자극하는 멜랑콜리의 경험이 이 자유를 창조나 ‘폭군’에 맞선 반항의 자유(질풍노도)로 사용하고 동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때 주관적인 거부의 힘은 의지적인 자기파괴와 거리를 두도록 사용된다. 그래도 자기파괴의 가능성에는 항상 멜랑콜리의 정념이 떠나지 않는다. 이제 존재는 자신의 의지이며 자신은 의지로 살아가는 것임을 모를 수 없다. 의사 장루이 알리베르는 “의지가 살게 하리라”는 금언을 남겼음을 기억하자.
—p. 236~237
프랑스혁명을 확고히 진행시킨 의지 자체는 그것이 더는 일반의지의 확실한 발현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지마자 커져가는 어둠에 휩싸이게 된다. 그 의지는 상이한 욕망, 개인적 탐욕에 혼란스럽게 도취된 채 거기에 집어삼켜지게 될까? 바로 그때 의지는 금세 어두운 의지, ‘반란을 획책하는’ 의지가 되고 만다. 단일성을 위해 노력하는 대신 분리를 겪고 분열을 가져온다. 어둠이 물러서면서 나타난 혁명의 빛은 그 어둠의 회귀와 맞서야 한다. 어둠은 혁명의 빛 내부까지 위협한다. 혁명의 빛이 세상에 스며들 때는 어떤 저항에 직면한다. 이 저항은 무기력하게 남아 있는 사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반항적 의지가 한데 어우러져 빚어진다. 사변적 이성과 이를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열망은 과감히 ‘현실의 힘’에 휘달리지 않아야 할 것이며, 이번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벗어나고자 했던 음험한 적의 회생을 보게 될 것이다. ......혁명적 이성은 미덕이 지배하는 세상을 세우고자 했으면서도 점차 의혹을 키웠고 이내 공포정치로 접어들었다. 혁명적 이성은 폭력 행위를, 빛이 어둠에 승리를 거두는 최초의 행위를 무한히 되살려내야만 했다.
—p. 309루소의 사상을 연구한 저자 장 스타로뱅스키의 이 글은 시각예술과 건축, 문학을 아우르는 남다른 해석 관점을 제공한다. 즉, 이 책은 예술 비평에 관한 글이다. 시대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18세기를 토대로 삼고 있다.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예술과 문학 전반에 일어난 변화를 헤아리기 위해 오로지 18세기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후 파생된 19세기의 사조 변화에 대해서는 따로 부연하지 않는다. 앞서 루소의 사상을 연구했었다고는 하나, 저자가 의학에도 정통하다보니—그의 또 다른 연구주제였던 프로이트 정신학이 묘하게 철학과 의학에 걸쳐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18세기에 활동했전 작가의 세계관과 작품의 구도 및 색채가 아주 다양한 각도에서 풀이된다.
이 책이 어렵다면 너무 간단한 도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크에서 로코코,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까지. (프랑스 혁명기에서 시기를 끊는 이 책에서 비록 낭만주의에 대한 부분은 다뤄지지 않지만) 단지 이러한 틀에 갇혀 있다면, 18세기라는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역학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장 스타로뱅스키의 글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어떤 시대에 어떤 사조가 다른 나머지 사조들을 압도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지배적인 사조 안에서 극명하게 반작용을 일으키며 다음 세대의 사조를 예견한 작가와 작품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시대를 지배한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잠시 위축되었을지언정 거대한 패러다임에 의심을 거두지 않고 저항한 작가들은 늘 존재했다.
때문에 글을 읽으면서도 바로크 시대의 작가를 다루는 대목에 통념상의 바로크 양식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주제와 기법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바로크와 로코코를 잇는 시기에 ‘폐허’라는 모티브에 뿌리내린 작품이 활발히 제작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질식할 정도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장식을 아끼지 않았던 바로크~로코코 시대에 불완전한 형체만이 남아 스슨하기까지 한 ‘폐허’라는 소재가 불쑥 등장한 것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토지에서 거두어 들이는 부를 통해 귀족들이 무위도식을 누리고 삶에 뿌리내릴 예술을 창설하지 못할 동안, 자본을 축 삼아 점점 자신의 힘을 인식한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고 정념을 쏟을 새로운 대상을 찾아다닌다. 채 분출되지 못하고 내부에 도사린 격정은 마침내 파괴적인 힘이 되어 ‘폐허’라는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그랜드 투어(영국인 또는 독일인들이 로마의 유산을 재발견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것)가 성행하는가 하면, 잔해만 남은 로마식 주랑이 그림에 튀어나온다.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 장 브로뱅스키는 이를 이런 단어들로 묘사하며, 바로크 시대의 예술에서 원심력에 이끌려 이탈할 것 같던 작품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정원을 조경할 때, 인공적으로 나무들을 정돈하던 것에서 ‘있는 그대로’의 화초에 초점을 맞춰 조경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 또한 바로크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따라서 본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새로운 측면을 유념해 가면서 장스타로뱅스키의 글을 이해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그리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 번역이 아주 잘 되어 있어서 내용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장 스타로뱅스키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쓴 이와 같은 글이 드물다고 하니, 다른 비평서들도 선뜻 접근하기 녹록지 않을 듯하다.
후반부 <이성의 상징>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전반부의 <자유의 발명>과는 글의 구성이 약간 달라진다. 프랑스 혁명기 직전과 직후를 다루는 이 장에서는 단연 왕정 철폐와 더불어 유럽을 휩쓴 빛의 이념과 이성에 대한 자신감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하지만 제3신분을 대표할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고 새로운 상징을 갈구했던 이 시대에 조차, 빛에 대한 어둠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다비드와 퓌슬러라는 대조되는 두 화가를 통해 부연된다. 둘 모두 인간의 역할을 재인식한 르네상스로의 회귀를 꿈꾸지만, 전자는 정형화된 구도와 고전적인 내러티브(가령 <브루투스의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오는 호위병>처럼)가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반면, 퓌슬러의 그림 안에서는 인물들의 윤곽이 좀 더 허물어지고 배경도 마치 동양의 산수화처럼 꽉 채워지지 않는 자유로운 경향을 보인다. 당당한 국가 건립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그 안에서 스러져가는 이들의 담대한 죽음—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나 퓌슬리의 <악몽>처럼—이 함께 다뤄진다.
결국 이 글에서 방점을 찍는 것은 낭만주의와 인상주의를 예고하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이다. 계몽의 선지자로 여겨졌던 프랑스의 군인들이 나폴레옹 전쟁에 항거한 스페인사람들에게 학살을 자행하는 그림 <1808년 5월 3일의 학살>에서는, 계몽의 동앗줄이라 여겼던 프랑스 군인들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칠해지며 그들 앞에서 자유를 부르짖는 평범한 민중들은 빛으로 환히 밝혀진다. 빛과 어둠은 이렇게 도치된다. 스페인 특유의 선명한 색감 그리고 분방한 악의 등장 앞에서, 고야는 낭만주의 나아가 인상주의를 예견한다. 귀족과 부르주아의 힘이 역전되는 사회적 양상을 그린 <자유의 발명> 초중반부, 자크루이 다비드와 요하네스 퓌슬리를 비교하는 후반부는 흥미롭게 읽은 반면, 전반적으로 내용의 난이도로 인해 낑낑대며(?) 읽었다. 막상 책을 덮고 보니, 여러 작가들과 작품들이 머릿속에 많이 남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유'와 '이념'이라는 것이 아주 매끄럽게 묘사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니며 오히려 진자 운동처럼 파르르 양극을 오가는 사이에 선명해지는 개념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P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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