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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일상/book 2021. 2. 12. 18:11
이 무렵 그녀가 산보하는 시간은 어둠이 깔린 다음이었다.
이런 시간에 숲으로 들어가면 그녀는 조금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빛과 어둠이 너무나 고르게 평형을 이루어, 낮의 압박과 밤의 긴장이 서로 중화되고 그래서 절대적 정신의 자유가 허용되는 정확한 저녁 순간을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알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불운이 최소한의 차원으로 축소되는 순간이 바로 이런 시각이었다. 그녀에게 어둠은 무서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은 인간을—집단으로 뭉치면 그렇게 무서우면서도 하나의 단위 속에서는 그렇게 보잘것없고 불쌍하기까지 한, 세상이라 불리는 냉랭한 집합체를—어떻게 피하는가 하는 것 같았다.
이 고독한 언덕과 골짜기에서 그녀의 조용한 발걸음은 그녀가 움직여 가는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몸을 구부려 가만가만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들어와 있는 풍경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때로는 그녀의 기이한 환상이 자기 주변을 둘러싼 자연현상을 강렬하게 만들어 그 현상 자체가 바로 그녀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달리 말해서 그 현상이 오히려 그녀의 이야기가 되었다. 세상이란 심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렇게 보이면 바로 그것이 실체이기 때문이었다. 겨울 나뭇가지에 단단히 싸인 싹과 나무껍질 사이로 신음 소리를 내며 한밤중에 부는 산들바람과 돌풍은 신랄한 비난의 소리였다. 비가 내리는 날은, 어린 시절의 하느님이라고 분명히 분류할 수 없고 그렇다고 달리 이해할 수도 없는, 막연한 윤리적 존재가 마음속으로 그녀의 나약함을 돌이킬 수 없이 슬퍼하는 표시였다.
그러나 그녀가 머릿속에서 만든 인물들이 인습에 근거해 그녀가 적대적인 망령과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테스의 유감스럽고 잘못된 상상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녀가 이유없이 두려워하는 도덕이라는 도깨비 떼 이상은 아니었다. 현실 세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이런 창조물이었으며 결코 테스 자신은 아니었다. 울타리에서 잠을 자는 새들 곁을 걷고, 달빛이 교교하게 비친 토끼굴 위에서 뛰노는 토끼 떼를 지켜보고, 꿩들이 휘어지게 내려앉은 나뭇가지 아래 서서, 그녀는 자신을 순수의 세계에 침입한 원죄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스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곳에서 계속 차이를 만들어 붙이고 있었다. 자신을 적대적 입장에 두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녀는 조화 속에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받아들인 사회법을 어긴 것이었으나, 그것은 자신이 변칙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환경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법이었다.
—p. 154~156
「길을 걸으며」에서 자크 라카리에르는 살면서 모든 풍경을 다 살필 수 없다고 말한다. 독서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모든 양서(良書)를 곁에 두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책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미처 놓치고 있는 풍경이 있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는 단연 그런 책이다.
인간 사회 안에서 마모되고 파괴되어 가는 개인을 다룬 소설은 많다. 하지만 토마스 하디의 작품만큼 사회법이 만들어놓은 거미줄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은 드물다. 자연—또는 우주—안에서 모든 존재는 티끌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티끌이 우주의 무게를 버텨내기에 바로 그 존재는 무궁하고 위대하다. 반면에 인간이 얼기설기 쌓아올린 사회 안에서 존재의 존엄함는 늘 시험대 위에 세워진다. 결백을 증명하는 것만이 삶의 이유인 것처럼 살아가는 테스라는 여성은, 그러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또는 그러한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사회법의 올가미에 갇혀버리고 만다.
덫에 걸려든 동물은 부자유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치지만 이는 오히려 덫을 더욱 단단하게 조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동물의 눈동자에서는 어떤 슬픔이나 분노, 절망도 읽어낼 수 없다. 슬픔이나 분노, 절망은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들이다. 그런 동물들의 눈동자에 맺힌 것은 삶과 죽음 모두에 초연한 갓 태어난 아기의 눈동자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부터 다른 이들의 의지에 길들여진다.만약 덫에 걸린 동물이 가까스로 덫에서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이는 자신의 숨통이 끊어진 순간에야 가능한 일이다. 올가미는 살점을 정확하게 겨누고 피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테스의 의지는 동물적이라 할 만큼 순수하기에, 사랑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하는 인간적 감정은 극히 부차적인 장식에 불과해 보인다. 테스가 바라는 것들은 갓난아기가 바라는 것이나 동물들이 바라는 것만큼 꾸밈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는 더욱 비극적이다.
이 소설에서 사회법이라는 덫에 갇힌 인물이 단지 테스만은 아니다. 클레어 에인절, 알렉 더버빌, 테스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이 무자비한 덫에 걸린 희생양들이다. 원래 여성 주인공들에 이입을 잘 하는 편이지만, (여성 주인공의 심리를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낸 토마스 하디에게 놀랍다) 특히 클레어 에인절이라는 인물에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영문학을 공부하던 누군가가 토마스 하디의 책을 추천해주었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야 그때의 말이 떠오른다.하루 일과 가운데 황혼녘을 아주 좋아하는데, 토마스 하디는 그러한 시간 위에 놓여 있을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아주 확실하게 묘사해주었고, 그 문장의 일부를 갈무리해 보았다. 약간의 오타가 보이기는 했지만 정종화 교수의 번역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는 「이름 없는 주드」를 찾아볼 생각이다:)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테스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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