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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Der Zauberberg)-中일상/book 2020. 12. 12. 00:08
모순덩어리인 두 가치관의 충돌. 역사의 진보와 이성의 힘을 믿지만 바로 그 합리주의에 대한 맹신에 빠진 ‘교육자 세템브리니’. 영원하고 초자연적인 절대적 세계를 염원하지만 이러한 목표에 이르기 위해 악(惡)을 수단으로 삼는 것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사제 나프타’. 인간의 오만과 종교의 방종. 살(肉)로 된 삶과 피(血)로 된 죽음. 전진하는 시간과 반동(反動)하는 영원. 형식과 로고스. 자유와 금욕. 낙관하는 인간과 준엄한 신의 심판. 인간의 해방을 가져온 르네상스, 욕구를 철창에 가둔 중세의 스콜라주의. 각양각색의 빛과 모두를 집어삼키는 어둠. 눈을 멀게 하는 빛과 마음의 고요를 가져오는 어둠. 주저하는 인간과 신의 은총. 죄와 처벌. 이성과 감성. 애국주의에 눈 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에 경도된 기독신앙.
그리고 이 틈바구니에서 갈팡질팡하는 어린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 이 아슬아슬한 변증법의 곡조 안에서 젊은이가 떠올리는 것은 사랑(愛). 육체와 정신을 이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곧 뒤따르는 "망각". [FIN]
“......내 생각으로는, 우리들은 여러 가지 정신 방향,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신적인 분위기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정해야 해. 경건한 분위기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구분해야 한다는 거지. 물론 양쪽 다 장점이 있지만, 내가 자유로운 분위기, 즉 세템브리니 식의 분위기에 대해 불만스러운 점은, 그쪽이 인간의 존엄성을 자기 혼자서 독점한 듯 여긴다는 점뿐이야. 그건 좀 지나치지. 또 하나 다른 분위기, 즉 경건한 쪽에도 나름대로 인간적인 존엄성이 내포되어 있어서, 수많은 예의범절이며 정돈된 태도며 고상한 형식을 지니게 해주지. 심지어 어떻게 보면 <자유로운> 분위기를 능가한다고도 할 수 있어. 경건한 분위기는 인간의 약점과 무력함을 특히 염두에 두고 있어서, 죽음과 분해에 대한 생각이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할 수 있거든.”
—p. 86~87
“아! 사랑이란....... 육체, 사랑, 죽음, 이 세 가지는 원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병과 쾌락이며, 육체야말로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사랑과 죽음, 이 둘은 모두 육체적인 것으로, 거기에 이 둘의 무서움과 위대한 마술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죽음은 미심쩍고 파렴치하며, 얼굴을 붉히게도 하는 한편, 아주 장엄하고 존엄한 힘이며 시간에 대해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는 진보보다 훨씬 더 존경할 만한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육체도, 육체에 대한 사랑도 음란하고 난처한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여, 그 바깥 피부를 붉게 물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육체는 숭배할 만한 위대한 영화(榮華)이고, 유개 생명의 놀라운 형상이며, 형태와 아름다움의 불가사의한 신성함입니다. 이것에 대한 사랑, 인체에 대한 사랑은, 이 사랑 역시 아주 인문적인 관심이며, 세상의 어떤 교육학보다 더 교육적인 힘인 것입니다......!”
—p. 181~182
......시간은 활동적이고, 동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무엇인가를 <야기한다>. 그럼 시간은 무엇을 야기하는 것일까?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미 당시가 아니고, 여기는 이미 저곳이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측정하는 운동은 순환적이고, 자체 내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운동과 변화하는 정지와 정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과거는 부단히 지금 현재 속에, 저곳은 쉬지 않고 이곳 속에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p. 185
나프타가 응수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스콜라 철학이 옳은 것이라고 한다면, 세계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유한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신은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신과 세계의 대립이 엄연히 상존하게 되며, 인간 역시 이원론적 존재가 됩니다. 인간 영혼의 문제는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의 대립을 의미하게 되며, 모든 사회적인 문제는 더욱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나는 이런 의미의 개인주의만을 일관성 있는 논리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이, 르네상스 시대 천문학자들이 발견한 진리에 따른다면 우주는 무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감각적인 세계와 이원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세는 현세 속에 포함되고, 신과 자연의 대립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인간의 인격은 적대적인 두 원칙이 대립하는 투쟁의 무대가 아니라, 조화롭고 통일적인 것으로 변화되고 맙니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적 갈등은 오로지 개인적 이해관계와 전체적인 이해관계의 갈등에만 기인하게 되고, 국가의 목적이 도덕 법칙이 되게 됩니다. 마치 이교도적인 도덕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 아니면 저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p. 290
세템브리니는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을 주인장에게 내밀면서 외쳤다. “나는 근대 국가가 개인의 끔찍한 노예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는 그릇된 주장에 항의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 우리에게 프로이센주의와 고딕적인 반동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라는 그 말에 세 번째로 항의합니다! 민주주의의 의의는 국가 지상주의에 개인주의적인 수정을 가하는 데에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야말로 개인적 도덕의 정화이며, 이 두가지가 국가의 이해관계와 상충하는 경우에는 국가에 적대적인 힘인 양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국가의 보다 더 고상한 복지, 말하자면 초지상적인 복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국가 신격화의 근원이라니! 그런 궤변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다! 전리품—어원적으로 강조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르네상스와 계몽주의가 싸워서 얻은 전리품은, 바로 다름 아닌 인격과 인권, 자유인 것입니다!”
—p. 291
“당신들의 극단적 자유 경제 사상은 경제주의의 인간적 극복을 의미하는 사회학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나요? 그 원칙과 목표가 기독교적인 신의 국가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회학의 존재를 말입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나의 것과 너의 것을 해롭고 위험한 말이라 일컬었고, 사유 재산을 약탈이자 절도라고 칭했습니다. 장로들은 토지의 사유를 비난했습니다. 신의 자연법에 따르면, 땅은 만인 공동의 소유물이며, 그래서 땅에서 나는 과실도 만인 공동의 사용을 위해 수확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원죄의 결과인 탐욕만이 소유권을 옹호하고, 사유 재산제를 만들어 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경제 활동을 영혼의 구원, 즉 인간성에 위험한 것이라고 말할 만큼 인간적이었고, 상업을 반대했습니다. 또한 금전이나 금융업을 증오했고, 자본주의적인 부(富)를 지옥 불의 연료라고 불렀습니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 관계의 결과라는 경제 원칙을 철저하게 경멸하며, 경기를 이용하는 행위를 이웃의 곤궁을 미끼로 삼아 이용하는 비열한 착취 행위라고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이 볼 때, 이것보다 더 야비한 착취가 있었습니다. 시간의 착취, 오로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대가로 받는 프리미엄, 즉 이자를 지불하게 하는 기형적 행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만인 공동 소유의 신성한 제도인 시간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누구는 이익을 취하고 누구는 손해를 보게 되는 행태 말입니다.”
—p. 297
……아니, 끝없는 깊은 침묵에 싸인 이 세계는 아주 냉혹했다.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지 않았고, 방문객을 받아들이기는 하되 위험이 생겨도 아랑곳 않고 그 자신에게 책임을 맡겼다. 이 세계는 사실 그를 환영하는 게 아니라, 그가 침입한 사실, 즉 그의 체류를 전혀 보장하지 않으면서 섬뜩한 방식으로 그저 참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에서 나오는 것은 말없이 위협하는 원초적인 것, 적의는 없다 하더라도 완전한 무관심으로 생명을 빼앗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문명의 자식, 원래부터 야성적인 자연과는 거리가 먼 낯선 문명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자연에 의지하고 수줍게 자연을 믿고 생활하는 자연의 거친 아들보다 자연의 위대함에 훨씬 더 민감하바다. 문명의 아들이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자연 앞으로 다가서는 종교적인 외경심을 자연의 아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이 종교적 외경심은 문명의 자식이 자연에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 상태를 마음 깊은 곳에서 규정하고 있어, 그의 영혼이 변함없이 경건한 감동과 떨리는 흥분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p. 439~440
......한가운데라는 위치에서 인간은 우아하고 정중하며, 친절하고 공손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해—인간만이 고귀한 것이며, 대립된 생각이 고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 인간은 대립을 지배하는 주인이고, 대립이란 인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대립보다 더 고귀한 거야. 인간은 죽음보다 더 고귀하며, 이러한 죽음에 비하면 너무나 고귀한 존재이다—그것이 인간 두뇌의 자유인 것이다. 또한 인간은 삶보다 더 고귀하며, 이러한 삶에 비하면 너무나 고귀한 존재이다—그것이 인간의 마음속의 경건함인 것이다. ......사랑은 죽음에 대립하고 있으며,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량한 생각을 갖게 한다. ......마음속으로 죽음에 대해 늘 성실하게 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산한 육욕과 인간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뀐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자. 인간은 선(善)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p. 478~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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