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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Der Zauberberg)-下일상/book 2020. 12. 17. 19:32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다른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스위스의 한 요양시설에 묵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는 점이 어쩐지 그리 매력적으로 들리지는 않아서, 세 권의 책을 사둔지는 오래되었지만 선뜻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매우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이다. 이런 장편 소설을 읽는 것은 오랜만인데, 어쩐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를 뒤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특성없는 남자> 모두 완간이 되지 않아 끝까지 잃지는 못했지만..)
<마의 산>에는 시간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동시대의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의 주어진 시간은 그 시간을 점유하는 존재와 공간에 따라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는 토마스 만의 비유는 꼭 상대성 이론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 같다. ‘시간’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 안에서도 핵심적인 소재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이 서정적이고 유려한 느낌이 있는 반면에 토마스 만의 글은 좀 더 문장이 간결하고 남성적인 느낌이다.
한편 그의 글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물론 두 작가 모두 독일어를 쓴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사회상과 세계질서를 충실히 담고 있다는 까닭 또한 있다. 심지어 반동적인 비엔나의 상류층 사회의 분위기는 <마의 산>이 배경으로 삼고 있던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독일 사회를 지배하던 보수적이고 군국적인 분위기와도 일치한다. 하지만 두 작품은 다른 점도 있다. <특성 없는 남자>가 당시의 국제질서와 민족주의를 가지런히 그려내는 반면, <마의 산>에는 여러 혼란상이 담겨 있다. 특히 소설의 배경이 라틴 문화—이탈리와 프랑스, 스페인—와 게르만 문화—오스트리아와 독일—가 절충되는 지점인 스위스에서 전개된다는 설정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의 산>에서 ‘인민의 대표자’ 세템브리니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발흥한 르네상스에 생각의 뿌리를 두고 있고, ‘신의 추종자’ 나프타는 스페인에서 유래한 예수회의 사도인데, 둘 모두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점점 자가당착에 빠진다. 전자는 인간의 진보를 의심하지 않는 반면, 후자는 문명의 덧없음을 강조한다. 다만 이 둘이 얽히고설켜서 결국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가 꼬이기 때문에, 결국 완전한 진리도 완전한 오류도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여기에 함부르크에서 도착한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는 게르만인 특유의 관찰자적인 학생의 입장에서 이 양극단을 매개하거나 조율하여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토마스 만은 부인이 요양차 들렀던 스위스의 한 휴양지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이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확실히 요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것은 특이하다. 인간 고유의 특성인 ‘직립 보행’의 반대 개념으로 소설 속 요양시설(베르크호프)에는 ‘수평생활’이라는 것이 중시되는데, 이는 병을 달래기 위해 누워서 안정을 취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죽음을 맞이하여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의 산>에는 ‘죽음’이 이야기의 커다란 지류를 이루고, 소설에서 ‘죽음’은 ‘삶’만큼이나 일상적인 것으로 나온다. ‘죽음’은 주인공들이 기피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피할 수 없으며 자연히 받아들이고 거쳐가야 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 ‘죽음’이라는 것은 나프타라는 사해동포주의자이자 복음주의자에 의해 조금 왜곡되기도 하는데, 나프타는 신앙과 인류의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피를 흘려 죽음을 취하는 것도 허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시종일관 대립각을 세우던 세템브리니와 나프타가 마침내 결투에 이르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나프타가 택한 극단적인 선택은, 그의 평소 세계관에 비추어볼 때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면서도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죽음’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된다. 더욱이 <마의 산>이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20세기 초반은 유럽의 열강들이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노골화하고 각축을 벌이던 시대다. 따라서 평지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산 지대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올리던 순진한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가 전쟁의 참화에 휘말려 들어가고 결국 청년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생과 사를 마음껏 좌지우지하던 베르크호프라는 공간도 세계적 정세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영향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품게 한다.
나아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특이하다고 느꼈던 점은, 이 소설이 다보스의 베르크호프라는 요양시설을 배경으로 삼는다고 해서 흔히 예상할 수 있듯이 ‘질병-요양-치유’라는 기승전결을 취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한스 카스토르프라는 인물이 도대체 언제쯤 씻은듯 병을 치유하고 알프스의 고산지대에서 다시 함부르크의 평지 세계로 내려갈 것인가 읽는 내내 궁금증을 가졌지만, 결국 소설에서 치유의 단계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차라리 ‘망각’의 도가니다. 한스 도르프가 스키를 타고 설산에서 길을 잃은 뒤 해변 산책이라는 신기루에 빠지는 장면이 소설의 중간에 나타난다. 이 꿈—토마스 만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영향을 받은 서술기법도 자주 활용한다—처럼 묘사되는 대목은 결국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매듭지어진다. 결국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가 ‘하산’을 하게 되는 과정도 하나의 완전한 망각, 철저한 기억의 삭제처럼 느껴진다. 삶과 죽음, 사랑과 질시, 인간과 신, 육체와 영혼, 집착과 망각은 이처럼 <마의 산>의 척추를 이루면서 매우 다채로운 형상을 만들어낸다. [終]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어떠한 현실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기껏해야 우주와 자연과 어느 정도 관계할 뿐이다—그 때문에 모든 생물체는 죽음을 아주 태연하게, 무관심하게, 무책임하게, 이기적인 순진함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p. 71
「 우리는 어둠에서 와서 어둠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두 어둠 사이에서 많은 경험을 하지만, 시작과 끝, 즉 출생과 죽음은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 두가지엔 주체성이 없으며, 자연적 사건으로 객관적 범주에 속할 뿐입니다.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p. 81
이 젊은 모험가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들은 우리들은 평지의 성실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한단 말인가?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동일성이라는 척도가 점점 커져 갔다. 좀 더 관대하게 말한다면 오늘의 지금을 어제, 그제, 그끄제의 지금과 구별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달걀처럼 다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한 달 전, 1년 전의 현재와도 구분할 수 없게 되어, 그것과 하나로 뭉뚱그려 <영원한 현재>로 용해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과 <다시>와 <장차>라는 윤리적인 의식의 구분이 사라지지 않는 한에는, <오늘>을 과거와 미래와 구분지어 생각하는 상대적인 명칭인 <어제>와 <내일>의 의미를 넓혀, 그것을 좀 더 커다란 상황에 적용하고 싶은 유혹이 생겨난다.
—p. 98~99
영원의 품에 안겨, 우리 그만 눈을 감도록 하자! 아니, 잘 보라, 저기 파도가 출렁대는 회색과 녹색의 광활한 바다, 까마득한 수평선까지의 거리가 엄청나게 줄어들어 마치 소실되어 버린 것 같은 저 바다에, 돛단배 한 척이 떠 있다. 저곳에? 어떤 저곳이란 말인가? 저곳은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울까? 당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당신은 그 판단을 내릴 수 없어 머리가 아찔해질 것이다. 이 배가 해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 배 자체가 물체로서 얼마만 한 크기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작고 가까운 것일까, 아니면 크고 먼 것일까? 그것을 판단할 수 없어 당신의 눈빛이 흐려지고 만다. 왜냐하면 당신 속의 어떤 기관이나 감각도 그 공간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걷고 또 걸어간다—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얼마나 멀리 걸었을까? 그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걷고 또 걸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고, 저곳은 이곳과 똑같고, <아까>는 <지금>과 <앞으로>와 똑같을 것이다. 공간의 끝없는 단조로움 속에서는 시간이 없어져 버리고, 가도 가도 똑같다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움직임은 더 이상 움직임이 아니며, 움직임이 더 이상 움직임이 아닌 곳에서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p. 101~102
「육체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에 섞이고, 반대로 정신적인 것이 육체적인 것에 섞여, 어느 것이 멍청하고 영리한 것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동적인 힘으로 나타나게 되어 우리들은 압도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마디뿐입니다. 바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상식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는 우리 모두가 인물이기도 하지요—도덕적인 인물, 법률적인 인물, 그 밖에도 여러 종류의 인물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의 인물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멍청함과 영리함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의미로서의 인물이고, 이 불가사의함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멍청함과 영리함보다 더 긍정적인, 최고로 긍정적인, 삶 그 자체처럼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가치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삶의 가치이며, 진지하게 따져 볼 만한 가치입니다.」
—p. 177~178
「삶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평범하고 직선적인 반듯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악한 길이자 죽음을 뚫고 나가는 길입니다. 이 두 가지 길 중 후자가 바로 천재적인 길입니다!」
—p. 206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에 대해, 지극히 경건한 사랑에서부터 지극히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에 이르기까지, 언어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위대하고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랑은 애매모호하면서도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아무리 경건한 사랑이라 해도 육체적이 아닐 수 없으며, 아무리 육체적인 사랑이라 해도 경건함이 결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교활한 친근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든, 최고의 열정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든 간에, 사랑은 언제나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유기적인 것에 대한 공감이며, 부패의 운명을 지닌 육체를 감동적일 정도로 관능적으로 포옹하는 것이다.
—p. 212
「거듭 말하지만, 그 때문에 감정을 발산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것도 종교적인 의무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알겠습니까, 생명을 눈뜨게 하는 남성적인 힘입니다. 생명은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신성한 감정과 도취적인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깨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젊은이,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한, 신성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신의 감정 기관이지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인간을 통해 느끼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은, 깨어나 도취된 생명과 신이 결혼식을 치르는 기관에 불과합니다. 만약 인간이 감정적인 면에서 무기력하게 되면, 신의 치욕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신이 지닌 남성적인 힘의 패배이고, 우주적인 파국이며,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입니다—」
—p. 220
「당신은 현실 생활에서는 결투 이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을 것 같은 갈등이나 열정이 동반되지만, 정신적인 문제는 그렇게 심한 갈등이나 열정을 일으키기에는 지나치게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추상적인 것, 순화된 것, 이념적인 것은 동시에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실 엄격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에는 사회생활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과격한 증오의 가능성, 절대적이고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를 일으킬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문제 쪽이 사회생활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가차 없이 <너 아니면 나>의 국면, 엄밀히 말하자면 과격한 국면, 육체적으로 부딪치는 결투의 국면으로 몰고 간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결투란 이 세상에 흔히 있는 것과 같은 <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최종적인 것이고, 자연의 원시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며, 기사도적인 종류의 매우 피상적인 규정을 통해서 약간 완화될 뿐입니다. 상황의 본질적인 것은 전적으로 본래적인 것, 육체적인 투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라면 누구든지 아무리 자연 상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감당할 만한 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p. 418
잘 가게나—자네가 살아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그대로 머물러 있든 간에 말일세! 자네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을 것이네. 자네가 말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에서 아직도 여러 해에 걸쳐 죄 많은 춤을 계속 출 것이기 때문이네.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이 질문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 둘 걸세. 자네의 단순성을 높여 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육체 속에서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게 한 것을 정신 속에서는 오래도록 살게 해주었네. 자네는 예감으로 충만해 <술래잡기> 방법으로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을 체험했네. 이 세계를 뒤덮은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고 있는 저 끔찍한 열병과도 같은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르겠지?
—p.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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