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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하는 ‘헤게모니적 실천’은 절합의 실천인바, 이런 실천을 통해 일정한 질서가 창출되고 사회적 제도들의 의미가 고정된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이런]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어떤 질서든 항상 권력 관계들의 특정한 배치의 표현이다. 일정한 순간에, 그에 수반되는 상식[공통 감각/의미]과 함께 ‘본래적’ 질서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누적된 헤게모니적 실천의 결과이지, 그런 결과를 가져온 실천과는 하등의 상관없이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존재하는 객관성의 발현물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질서는 또 다른 형태의 헤게모니를 세우기 위해 그 질서를 탈구시키려는 대향헤게모니적 실천의 도움을 받기 쉽다.
—p. 32
자유주의 사상은 그 자체의 개인주의 때문에 ‘정치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데, 이로 인해 집합적 동일성의 형성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은 애초부터 집합적 형태의 동일시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는 ‘우리’가 항상 ‘그들’과의 대립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의 주된 문제가 있다. 즉,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현존하는 존재’[현존으로서의 존재]being as presence라는 본질주의적 개념화에 근거해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리를 펼치며, 객관성을 대상들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 그리하여 동일성이 [다른 동일성과의] 차이로서 구축되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으며, 어떤 사회적 객관성이라도 권력의 작용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객관성이 궁극적으로 정치적이며, 거기에는 그 구성을 결정하는 배제 행위의 흔적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p. 34-35
결정적인 쟁점은 정치를 구성하는 우리/그들이라는 이 구별을 어떻게 하면 다원주의에 대한 승인과 양립 가능한 방식으로 설정하는가이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정성은 정확히 갈등에 대한 승인과 정당화에 있으므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갈등은 근절될 수 없으며 근절되어서도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에게 필요한 것은 타자를 괴멸시켜야 하는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념과 격렬하게 다툴지라도 자신의 이념을 옹호할 그들의 권리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되는 대결자로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중요한 것은 갈등이 ‘적대’(적들 사이의 쟁투)의 형태가 아니라 ‘경합’(대결자들 사이의 쟁투)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경합적 관점에서 민주주의 정치의 중심 범주는 ‘대결자’라는 범주이다. 즉,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 원칙에 대한 공통의 헌신은 공유하는 대립 진영 말이다. 대결자들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 헤게모니적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 맞서지만, 자신들의 대립 진영이 그 입장의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권리의 정당성을 문제 삼지 않는다. 대결자들 사이의 이런 대결이 바로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조건인 ‘경합적 투쟁’을 구성하는 것이다.
—p. 38~39
칼립소 니콜라이디스에 따르면, 유럽연합은 ‘데모이-크라시’라는 양태로, 즉 그 요소들을 구성하는 상이한 데모이의 다원성과 영속성을 인정하는 국가들과 인민들의 연합으로 구상되어야 한다. 이 연합은 그 구성원들의 정치적・헌정적 구조 속에서 표출되는 것이므로 그들의 국민적 동일성을 존중한다. 하나의 동질적인 유럽의 데모스에 부합하는 일련의 제도들이 새롭게 생긴다고 해서 상이한 국민국가들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것이 포기되거나 대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통합] 모델과 관련해 세 가지의 중요한 변화를 함축한다고 니콜라이디스는 강조한다. “첫째로 공통의 동일성에서 공유된 동일성으로의 변화, 둘째로 동일성의 공동체에서 기획의 공동체로의 변화, 마지막으로 다층적인 거버넌스 개념에서 다중심화된 거버넌스 형태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p. 94
비르노에 따르면,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에는 이미 공통된 무엇, 즉 일반 지성이 존재한다. 동질적이며, 다층성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단일한 일반 의지로 표상되는 인민 개념에 대한 비르노의 비판(하트와 네그리도 공유하는 비판)은, 등가 사슬을 통한 인민의 구축을 겨냥하는 순간, 완전히 부적절해진다. 사실 이 경우[등가 사슬을 통한 인민의 구축]에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다양성을 존중하며 차이를 지우지 않는 형태의 단일성이다. 등가 관계는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다. 차이를 제거할 경우 등가 관계는 동일성에 불과해질 뿐이다. 민주적 차이들을 모두 부정하는 힘이나 담론에 맞서게 되는 경우에만, 그 차이들은 서로를 대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집합적 의지를 구축하려면 대결자를 지정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p. 124
경합적 방법론의 관점에 따르면, 비판적인 예술적 실천은 ‘진정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른바 허위 의식을 들어내려고 열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려 한다면 ‘진정한 의식’이라는 관념 자체를 거부하는 헤게모니 이론의 반본질주의적 전제와 완전히 상충될 것이다. 앞서 보여줬듯이, 특정한 형태의 개별성은 다양한 실천, 담론, 언어 게임들 속에 삽입됨으로써 구축된다. 정치적 동일성이 주체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향한 합리주의적 호소로는 결코 반환될 수 없고, 지배적인 동일시의 과정이 일어나는 틀을 탈구시키는 방식에 있어 주체의 정동을 동원하려는 일련의 실천들에 사회적 행위자가 기입되어야 변환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 148
우리는 점거 운동들과 자유주의적 접근법이 서로 수렴하는 또 다른 지점을 양쪽이 모두 국가를 악마화한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점은 신자유주의적 시대정신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사회민주주의적 복지 국가가 창출한 제도들의 해체를 반복적으로 시도해온 신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은, 국가와 관련된 모든 것이 (전체주의가 아니라면)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이며 개인의 자유에 해로운 것이라 폄하하면서 적의에 찬 반국가적 수사법을 꾸준히 사용해왔다. 억압적 국가에 반대하고 자유 시장의 덕목을 찬양하는 이항 대립적 수사법을 동원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은 시장의 우월성과 모든 사회 영역의 상품화를 정당화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의 기반을 확립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현존하는 권력 관계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반면에, 급진주의자들은 권력이 사라져버릴 사회의 도래를 선언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견해에서는 적대적 차원에서의 정치적인 것과 권력의 구성적 역할에 대한 거부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p. 187~188
오늘날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전 인구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있다면, 이는 그들이 전통적인 정당들을 신뢰하지 않고 전통적인 정치적 경로를 통해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시위자들이 자신들의 구호 중 하나를 통해 주장하듯이, “우리에게 투표권은 있지만, 목소리는 없다.”
—p. 189
이제 정치의 도덕화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보지요. 제가 지금껏 해오고 있는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믿기를 바라는 것과는 달리, 좌와 우라는 측면에서 정치적 동일성을 구축하는 담론들이 약화했다고 해서 우리/그들이라는 구별의 필요성이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구별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구별은 점점 더 도덕적 용어들을 통해 수립되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구별이 좌와 우의 구별을 대체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사실이 시사해주는 바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정치의 대립 모델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예전과의] 주단 차이점은 오늘날에는 정치가 ‘우리, 선한 민주주의자들’과 ‘그들, 악한 민주주의자들’을 식별하는 선악의 어휘를 사용하면서, 도덕적 명부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p. 218~219「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를 읽은 뒤 관련된 서적들을 인터넷으로 좀 뒤져보다가 샹탈 무페의 「경합들」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뒤 이틀 뒤쯤 책이 도착했는데, 책을 처음 손에 들어보고 드는 생각은 ‘가볍다’, 이다. 인터넷으로 간략히 목차를 확인했을 때는 만만치 않은 주제들이 담겨 있어서 꽤 분량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2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얇은 책이었다. 물론 내용이 가볍지는 않다.
이 책을 읽은 뒤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자면, 먼저 국민국가를 어떤 존재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민국가는 ‘개인’인가, ‘유기체’인가? 전자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가 전제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샹탈 무페의 경합적 민주주의 모델이 전제로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개개인이 자신의 선호(preference)를 분명히 알고 객관적으로 비용-편익을 평가하여 가장 올바른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상황을 상정한다. 예를 들어 하버마스와 같은 학자는 공론장을 통해 시민들이 토론에 참여하고 공통된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숙의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샹탈 무페는 헤게모니적 접근법을 통해 사회의 권력 구조를 바닥부터 들여다보고, 헤게모니들이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 지니는 존재론적 의미를 짚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헤게모니 투쟁에 관한 그녀의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어쩐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패러다임 전환과도 비슷한 것 같다. 여하간 인간이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과정은 기존 헤게모니에 새로운 대항헤게모니가 도전하는 방식으로 진지전을 전개해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존재론적으로 배제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는 우리/그들을 구별짓는 작업이 끊임없이 수반된다. 하지만 이러한 배제적 성격이 반드시 ‘적대’의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경합’ 방식이다.
사실 샹탈 무페가 ‘경합’적 민주주의라고 할 때, 이것이 규범적인 처방으로써 제시되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현상에서의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하나의 이론으로써 소개되는 것인지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나는 일단 주로 전자의 관점에서 그녀의 글을 읽었다. 정치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어제오늘의 정치는 그녀가 말하는 ‘대결자’들을 기꺼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다소 모순적인 표현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시민들이 민주사회에서 기획할 수 있는 것은 ‘통일된 합의’ 또는 ‘공통된 합의’가 아니라 ‘갈등적 합의’이다. 정치 활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배제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사회를 굴러가게끔 만들려는 헌정·제도적 합의는 기본적으로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잠정적인 것이다. 때문에 개인이 아주 냉철한 사고력과 가용가능한 모든 정보를 갖고 다층적인 의사결정을 거쳐 합의에 이른다는 것은 현실 정치와 그 안에서 진행되는 조직들의 의사결정방식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지적이고 다중심적인 합의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갈등적 성격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정치의 모멘텀을 발굴해나가는 관점이 될 것이다.
이런 샹탈 무페의 이론을 따르면 신자유주의적 담론이 정치 영역을 잠식해가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명쾌해진다. 특히 정당의 좌우 진영 모두 반국가화 담론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샹탈 무페의 마지막 대담에 많이 공감했다. 어쩌면 제도와 국가 안에서 갈등을 선명히 만들고 갈등적 합의로 나아가야 할 것들이, 적절한 채널을 찾지 못한 채 시민들의 불신과 분노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이런 탈정치화를 접근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에 한계가 명백하다는 것이 샹탈 무페의 주장이다.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갈등을 전제하지 않고 비용-편익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개인을 상정하고 있지만, 유기체적인 사회에서 정치라는 것은 쉽게 계산해서 합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선호는 처음과 마지막이 달라질 수 있으며, 처음에 판단했던 편익이 나중에 달라진 맥락 속에서 부정적인 부수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한계 안에서 정치인들은 정치적 문제를 윤리적 문제로 도치시키면서 자신의 헤게모니와 다른 대항헤게모니를 비난하고, 자신들이 서 있을 자리조차 좁혀가면서까지 정치에 대한 혐오를 돋우는 레토릭을 거리낌없이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교착 상태를 타파해가는 대안적인 정당으로써 책에서는 스페인의 제3정당 '포데모스(podemos; 우리는 할 수 있다)'가 제시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정치는 부정하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무언가가 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해결해준 책이었다. 그 누구도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모든 사회경제적 자원의 배분이 문제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말이다. 때문에 사회민주주의 담론을 재기획하려는 시도에서 샹탈 무페는 '경합적 민주주의 모델'을 제안했지만, 반드시 이를 이념적 렌즈만으로 바라볼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녀의 처방이 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녀 역시 종래의 수평주의적 사회운동이 지닌 긍정적 효과를 긍정하고 있으며, 그녀의 모델이 대개는 국가 안에서 적용가능하다는 점을 언급한다. 물론 그녀가 배경을 두고 있는 유럽연합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검토하기도 하지만, 채널을 찾지 못한 정념들이 출구를 찾지 못해 나타나는 것이 폭력을 동반한 테러리즘이라는 진단은 기본적으로 국가 단위의 민주주의 모델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그녀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남미의 대중정당들이 코로나 시국에서 매우 무능한 대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경합적 민주주의 모델이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논의가 서두에 소개되는 만큼 급진적이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정치가 우리 '존재'에 가까이 있다고 역설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논리적이고 호소력 있기 때문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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