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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무디고 가녀린일상/film 2025. 2. 5. 11:27
해마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들은 챙겨보려 노력하고 있다. 작년 의 수상소식을 듣고 아주 간단하게 시놉시스를 확인했을 때, 매춘부가 소재라는 사실에서부터 어쩐지 진부함이 느껴졌다. 또 그러한 추측은 영화의 초반 애니와 반야의 관계에서부터 재확인되는 듯했고, 도대체 어떻게 된 또는 될 영화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국인 매춘부와 러시아 올리가르히 간의 만남과 그들이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은, 오히려 미국과 러시아, 두 사회체제의 부끄러운 민낯을 일거에 비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션 베이커 감독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나에게 맞는 영화인 것도 아니고, 몇 년간 수상작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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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越松亭)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4. 19:17
영양에서 울진으로 넘어온 이튿날, 후포항에는 비가 내렸다. 여인숙의 흐린 창문이 포개져 창밖 풍경은 마치 희미해진 과거의 영상을 보는 듯했다. 밖으로 나섰을 때는 바닷바람으로 날씨가 쌀쌀한데도 눈이 아닌 비가 오는 것이 의아했다. 험상궂은 날씨와 달리 울진의 바다는 잠잠했고, 쾌청한 날씨에 거칠게 파도가 일던 지난 7번 국도 여행이 생각났다. 울진에서는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던 그 많은 산등성이는 보이지 않았다. 후포항의 모든 건물들은 자석에 달라붙은 철가루처럼 오로지 해안선에 의지해 삐뚤빼뚤 열을 이루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 향한 곳은 월송정. 빠른 길을 버리고 부러 국도를 따라 해안가를 운전한다. 언젠가 삼상사(三上思)에 관한 구절을 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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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7. 주마간산(走馬看山)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2. 3. 09:33
오아후에서의 마지막날이자 하와이에서의 마지막날은 빠르게 흘러갔다. 애당초 오아후 섬에서 여러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던 우리 일행은 괜한 탐방 욕심에 여행 마지막날 탈이 나는 것보다는 여행을 갈무리하는 느낌으로 원없이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우리의 의사결정인 것처럼 말했지만, 여행지에서 절대권력자인 자식 된 입장에서 나의 결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오후 2시경에 이륙하는 비행 시간 전까지 와이키키에서 출발해 반시계 방향으로 오아후를 3분의 1 정도만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글의 제목을 주마간산으로 달아놨다고 해서, 하와이 출발 하루 전날 견인된 차량을 되찾은 우여곡절 끝에 방문한 양조장(distillery) 얘기를 빼놓을 순 없겠다. 코하나 양조장(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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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차차 시간에 씻겨갈 것이고일상/film 2025. 2. 2. 14:51
"I Love Him, And I Hate Him, And I Want To Be Him." 브로맨스 영화라 하면 어쩐지 이 먼저 떠오르고, 을 기준으로 삼자면 여느 브로맨스 영화든 시시해질 것 같아 이라는 영화는 개봉 때부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영화를 보러가자는 친구의 제안으로 영화를 관람했는데, 막상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재밌게 봤다. 인류사와 개인사가 얼키고설킨 영화는 벤지의 거침없는 입담과 데이브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에서 재미가 끊기지 않는다. 일단은 마침 아담 자모이스키의 「폴란드사」를 열독하고 있던 터라 폴란드 지역의 유대인 수탈사를 담은 영화에 부담을 덜 느꼈던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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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파리(竹波里)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1. 17:46
왜 영양(英陽)이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목적지가 없어도 어딘가에는 늘 도착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그곳이 영양군, 그 안에서도 수비면, 그 안에서도 죽파리였을 뿐이다. 죽파(竹波),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눈앞에서 대숲이 너울댈 것만 같은 이 마을로 나를 이끈 것은 바로 자작나무 숲이었다. 겨울이 되고 오래 전부터 설경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영양으로 오게 되었을 때 설국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안동과 영양, 울진, 영덕을 차례로 들렀는데 이 중 영양에서만 산등성이의 북사면마다 눈이 녹지 않았다. 영양의 둥그런 산머리마다 밀가루를 체로 걸러낸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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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사일상/book 2025. 1. 31. 09:02
폴란드가 유럽의 규범에서 멀어진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유사한 도전과 선택에 부닥쳤던 보헤미아와 다르게 폴란드는 유럽 국가들의 틀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 그 결과로 폴란드는 좀더 후진적 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 대신 폴란드는 더 높은 수준의 독립성을 유지했다. 여러 개의 공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도 폴란드는 하나의 사회로서는 다른 곳보다 더 단일하고 단결된 상태로 남았다. 그 이유는 폴란드가 혼합적 군주제에 복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지리적으로 프랑스의 상당 부분은 영국 왕의 주권 아래 있었고, 독일 지역들은 프랑스 왕조의 통치 아래, 이탈리아는 노르만, 프랑스, 독일 군사 지도자의 승계 아래 있었다. 폴란드가 정치적 단위로서 살아남은 것을 보장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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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6. 밤(夜)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30. 03:38
띄엄띄엄 써온 하와이 여행기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사실 우천으로 인해 루아우 공연이 취소되었던 첫날부터 오아후에서의 일정은 그리 체계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아후에서 맞는 둘째날, 우리는 와이키키 해변을 따라 걸었고 그 다음에는 인근의 또 다른 호텔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잘 알아보고 고른 곳은 아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테라스에서 전날보다 나아진 햇살을 쬐며 식사를 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이곳까지 렌트카를 끌고 왔는데, 주차해 놓은 2시간여 사이에 차가 견인된 것이었다. 눈앞에서 (내 차도 아닌 남의) 차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찔하기도 했고 전날 투스텝 비치에서 수영하면서 베인 발바닥이 욱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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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의 문법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1. 29. 12:17
여행을 가겠다고 마음 먹었던 게 언제부터였던가. ‘쉼표를 찍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묻는 이에게 말한 적이 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새로운 리듬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내게는 바로 그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 몇 달 몇 주 이어지고 있었다. 쉼표가 없이 문장을 잇고 또 이어도 꼭 비문(非文)은 아니듯이, 내 일상에 어떤 문법적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쉼표 없는 글쓰기에 맛들린 것처럼 일상은 무탈하게 굴러갔다. 하지만 하나의 문장이 문장답기 위해서는, 재밌는 이야기와 좋은 표현을 욱여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적절한 문장부호를 써서 읽고 말하는 흐름을 부드럽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알맞는 문장부호를 고르고 위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