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있는 글/Théâ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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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Crowd)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4. 10. 30. 12:50
쓰레기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흙바닥 위로 15명의 인물이 슬로모션으로 차례차례 입장한다. 청바지를 입은 사람, 하이힐을 신은 사람, 모자를 눌러쓴 사람, 가방을 메고 있는 사람, 생김새도 인상도 서로 모두 다르다. 이들의 동작은 너무 느려서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다가, 마치 터널 안에서 암적응을 하는 것처럼 점점 이들의 리듬 속에 흡수되어 간다. 어떤 이는 흡연을 하고, 어떤 이는 바닥에 쓰러지고, 어떤 이는 입을 맞춘다. 이들의 느린 동작은 어느 순간 튕겨나온 것처럼 발작적인 동작을 취한다. 하나의 동작이 완결되기도 전에 다른 동작이 시작되고, 서로의 교감은 완성도 미완성도 아닌 채로 남는다. 이 무언극에서 침묵을 가끔씩 깨뜨리는 외마디 비명은 무대 위에 올라선 15명의 군상이 빚어내는 마찰음이다.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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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المتحـــف)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4. 10. 26. 10:21
우리나라에서 팔레스타인 출신 감독의 현대극을 관람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있었다. 예년처럼 SPAF 연극의 리스트를 살피다가 뒤늦게 눈에 들어온 작품, . 우리나라에 거의 소개된 적 없는 아랍권에서 연극이 들어왔다는 점, 사형수와 형사간의 심리극을 그리고 있다는 점, 그러한 난해한 주제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극을 예매하게 되었다. 연극에서 맨처음 나를 사로잡은 건 무대 위에서 카랑카랑하게 울려퍼지는 아랍어 대사였다. 미디어에서도 접하기 힘든 이들의 언어는, 마치 살면서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박자와 운율을 들은 것처럼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실험적인 도구들이었다. 삼각대 위의 카메라는 인물을 클로즈업하고 여러 각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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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모먼트(Apartmoment)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4. 6. 28. 13:26
모처럼 연극을 봤다. 군대동기이기도 한 J는 예대를 나와 일찍이 공연계에 몸을 담고 있다. 하루는 그런 J의 소개로 연희동의 한 소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사건들로 업무를 하는 오후 내내 골머리를 앓고 기분마저 사나운 날이었다. 서둘러 퇴근했건만, 연희동행 버스를 코앞에서 간발의 차로 놓치고 택시를 한 대 잡았다. 사실 나는 국내에서 창작되는 연극을 본 적이 많지 않다. 아니,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 해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연극조차도 해외 초청 연극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 것’이라면 덮어놓고 좋아하는 나의 고루한 악취미를 뉘우치게 된다. 이머시브 공연을 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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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양다경 (建陽多慶)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4. 2. 8. 11:32
이 글을 연극 카테고리에 남길까 말까 고민한 건, 관람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한 꼬마와 이를 통제하지 않는 보호자로 인해 춤 공연의 3분의 2는 즐기지 못한 사정 때문이다. 요즘 들어 머리 꼭지까지 화날 정도로 무례한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잡문(miscellaneous) 카테고리에 한번 생각을 정리해서 올려볼까 한다. 춤은 크게 세 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춤이 승무(부제:불佛)이고 두 번째 춤이 민살풀이(부제:신神), 끝으로 소고와 함께하는 나가는 춤이 있다. 그리하여 내가 집중해서 관람할 수 있었던 공연은 첫 번째 춤인 승무일 텐데, 각 춤에서 주로 사용하는 몸동작이 달라서 세 가지 스타일의 춤을 고루 온전히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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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내가 나를.. (As if, I have missed myself)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3. 10. 22. 22:31
10월 중순 가을밤의 혜화동은 퍽 추워서 겨울의 문턱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로니에 공원 옆 빨간 벽돌로 된 아르코 극장은 언제 봐도 고즈넉한 느낌이 있다. 해질녁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이제 유백색 가로등 불빛을 받아 생기 없는 암록색을 띠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간이 가판대 앞에 앉아 연극 티켓을 파는 사람이 부루퉁한 얼굴로 관객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낙산으로 접어드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혜화동(惠化洞)이라는 한자가 검은색 양각으로 새겨진 한 가게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 은 '나'라는 존재 안에서 쉼없이 충돌하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연극이다. 소설도 그렇고 영화와 그림작품도 그렇지만 가끔은 클래식한 걸 즐기다가도 아예 아방가르드한 것에 관심이 간다. 흔히들 고전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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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 오페라 댄스 컴퍼니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3. 5. 28. 07:37
연초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작품인데 예매를 끝까지 망설이다가 현장 발권으로 보게 된 공연이다. 오랜만에 보는 공연이라 나는 아트센터로 가기 위해 선릉으로 갈 뻔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마곡으로 센터가 통째로 이관되어 있었다. 안도 타다오(安藤 忠雄)가 건축했다는 마곡의 건물은 그 내부도 다채로운 예술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내부에 입장하는 것만으로도 볼거리가 되었다. 공연은 크게 2부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가 프랑스의 안무가 다미안 잘레(Damien Jalet)의 이 35분 정도 공연되고, 30분 여의 인터미션 이후 두 번째로 이스라엘 출신의 안무가 샤론 에얄(Charon Eyal)의 의 공연이 45분 가량 상연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공연이었던 이 더 인상적이었는데, 카오스적인 비행 패턴을 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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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feat. 프란츠 카프카를 위한 오마주)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1. 2. 22. 15:31
누군가의 기준이 되려고 살지마 네가 틀린 게 아니라, 네가 틀린 세상에 태어난 거야 작년 한 해는 공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았다. 몇 해째 해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 상연되는 작품들도 찾아보곤 했지만 작년만큼은 걸음을 하지 못했다. 여느해보다도 규모가 축소되어 개최되었지만, 예매가 한창 시작되던 8월 즈음 2차 유행이 커지면서 극장을 찾는다는 생각 자체를 하기 어려웠다. 때마침 퇴사 준비를 하면서 연극을 관람한다는 게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뮤지컬 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작년 11월말, 그러니까 겨울로 접어드는 늦가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작년 겨울 다시 한 번 팬데믹 유행이 커지고, 퇴사 이후의 일들을 준비하면서 공연장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를 보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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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Kafka)주제 있는 글/Théâtre。 2019. 10. 10. 00:17
오래전 예매를 해두었던 연극이다. 연극을 그리 자주 보는 편은 아닌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가 시작되는 가을철이면 연극을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복병이 있었으니..예상치도 못한 휴.일.출.근=_= 정시퇴근할 틈을 살펴 회사를 나오긴 나왔는데, 또 한 번 복병이 나타났으니...광화문 집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연극 시작시간에는 못 갈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인터미션 때에는 들어가야 할 거 아닌가. 지하철에 내려 택시를 탄 게 화근이 되어...경복궁역에서 안국역에 이르는 구간은 뛰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숨막히는 퇴근길(대학로행)이었다. 결론은!! 연극을 3분의 1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 연극이 끝나고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던 걸 보면 되게 좋은 연극이었던 것 같은데, 정작 나는 아쉬움만 가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