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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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 꽃주제 없는 글/印 2025. 5. 27. 13:28
# 올봄은 근 10년 내에 가장 봄다운 봄이 아닌가 싶다. 날씨의 변덕스러움도 어디까지나 봄이라는 계절 고유의 특성이니만큼 불만스럽지 않다. 올봄이 유달리 봄답다고 느끼는 건, 5월까지도 제법 선선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년 같았으면 5월은 시작과 동시에 더위가 찾아왔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봄이 실종됐다는 상투적인 푸념을 하곤 했다. 봄철이면 골머리를 앓던 미세먼지가 거의 없었던 것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온화한 올봄 날씨를 특히 체감하게 되는 건, 강아지 산책에 있어서다. 긴털에다 기질적으로 예민한 우리집 강아지는 약간의 더위에도 쉽게 지친다. 추위보다 더위를 싫어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여름철을 전후로 녀석을 운동시키기 어렵다는 점은 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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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1. 서계동(西界洞)주제 없는 글/印 2025. 5. 16. 15:27
사진 현상소에서 켄트미어 400이라는 흑백필름을 추천받았다. 흑백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는 좀 되었지만, 막상 흑백 필름을 사기는 망설여졌다. 어디선가 흑백사진이 더 찍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똑같은 사물을 찍어도 색이 휘발된다는 게 어쩐지 손해보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흑백필름을 구입하던 당시는 마침 벚꽃철이었기 때문에 이 계절의 화사함을 무채색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간 주로 써왔던 포트라 400이 아닌 다른 필름을 쓰는 건 워낙 오랜만의 일이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좀 더 공을 들이고 아껴가며 쓰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36칸의 필름 안에 도시 속 달동네, 봄이 찾아온 사찰, 우리집 강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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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주제 없는 글/印 2025. 1. 14. 12:07
사진을 갈무리하다가 지난 초가을 기상관측소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계절관측목의 잎사귀 끝 하나 단풍으로 물들지 않은 푹한 날씨였다. 원래라면 구기동의 한 사찰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일정상 문제로 가까운 기상관측소에 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따듯하고 한적한 풍경이었다. 지난 봄 벚꽃 개화를 알렸을 표준목을 저 멀리 두고 우리는 단풍나무 그늘에 앉았다. 날카로운 단풍잎의 날을 따라 햇살이 흩어졌고, 무성한 잎사귀의 갯수만큼이나 잔디밭에 드리워진 그늘은 짙었다. 고요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늘은 조금씩 농담(濃淡)을 바꾸었고, 단풍잎의 떨림에 따라 자세를 가다듬는듯 했다. 알맞은 크기의 돌에 걸터앉은 나는 남은 필름을 헤아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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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즈음에주제 없는 글/印 2025. 1. 8. 01:51
# 크리스마스 마켓 성탄을 앞둔 주말 서울의 한 프랑스계 학교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에 다녀왔다. 이른 아침 오늘 시장이 선다는 C의 연락이 있었다. 이날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예식장에 가기 전 잠시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켓에는 프랑스와 관련된 수제공예품과 먹거리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나에게 한 학기간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었던 B와 B의 소개로 오랜 친구가 된 C를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럽에 여행을 가서도 들러본 적 없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서울에서 접하니 감회가 다르다. B와 C는 언제 보아도 밝고, C의 절친인 E는 여전히 강한 비음 섞인 프랑스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올해 봄부터 마크라메(Macramé) 재료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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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해찰주제 없는 글/印 2024. 6. 3. 11:50
빨간 날짜가 많은 5월, 하루 더 휴가를 보태어 푹 쉬기로 했다. 이런 때 어디 길게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좋으련만 여행 준비를 위해 떨어야 하는 부지런함마저 부담스런 요즈음이다. 사실 5월에 장기휴가를 써서 가족휴가를 가려고 작년부터 계획을 해오긴 했었다. 해가 바뀌면서 생각지 않은 새로운 업무들이 할당되었고, 나름대로 그 업무에 몰입하게 되어 자연스레 휴가 계획을 접게 되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편히 쉬는 것보다 일하는 편이 낫다.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도 무념무상으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독서라든가, 어학공부라든가 꼭 무언가를 한다. 물론 그런 것들은 일이라기보다는 휴식으로 여겨져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휴식이라고 하기에는 적잖이 집중과 끈기를 요하는 일이니, 워라밸이 강조되는 요즈음이라지만 직장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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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4. 5. 13. 11:31
카페를 나서 만리재 고갯길을 내려가며 불현듯 평소에는 가보지 않던 길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때마침 카메라가 있는 날이었다. 하늘은 창창하고 봄바람은 산뜻하다. 그리고 서울로에 올라서면서 눅진한 여름 공기를 예감한다. 이름조차 생소하고 모양새조차 서울에서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아담한 나무들이 좌우 번갈아가며 산책로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푸른 오솔길(Coulée verte). 서울로 7017의 모티브가 된 파리의 쿨레 베르트(Coulée verte)를 산책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주 느린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만리재 고개에서 흘러내려오는 옛 고가도로는 경사를 오르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어느새 서울역이 발아래 보이는 높이로 나를 이끈다. 나는 한글로 된 나무의 이름과 학명(學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