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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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주제 없는 글/印 2025. 1. 14. 12:07
사진을 갈무리하다가 지난 초가을 기상관측소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계절관측목의 잎사귀 끝 하나 단풍으로 물들지 않은 푹한 날씨였다. 원래라면 구기동의 한 사찰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일정상 문제로 가까운 기상관측소에 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따듯하고 한적한 풍경이었다. 지난 봄 벚꽃 개화를 알렸을 표준목을 저 멀리 두고 우리는 단풍나무 그늘에 앉았다. 날카로운 단풍잎의 날을 따라 햇살이 흩어졌고, 무성한 잎사귀의 갯수만큼이나 잔디밭에 드리워진 그늘은 짙었다. 고요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늘은 조금씩 농담(濃淡)을 바꾸었고, 단풍잎의 떨림에 따라 자세를 가다듬는듯 했다. 알맞은 크기의 돌에 걸터앉은 나는 남은 필름을 헤아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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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즈음에주제 없는 글/印 2025. 1. 8. 01:51
# 크리스마스 마켓 성탄을 앞둔 주말 서울의 한 프랑스계 학교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에 다녀왔다. 이른 아침 오늘 시장이 선다는 C의 연락이 있었다. 이날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예식장에 가기 전 잠시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켓에는 프랑스와 관련된 수제공예품과 먹거리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나에게 한 학기간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었던 B와 B의 소개로 오랜 친구가 된 C를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럽에 여행을 가서도 들러본 적 없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서울에서 접하니 감회가 다르다. B와 C는 언제 보아도 밝고, C의 절친인 E는 여전히 강한 비음 섞인 프랑스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올해 봄부터 마크라메(Macramé) 재료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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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해찰주제 없는 글/印 2024. 6. 3. 11:50
빨간 날짜가 많은 5월, 하루 더 휴가를 보태어 푹 쉬기로 했다. 이런 때 어디 길게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좋으련만 여행 준비를 위해 떨어야 하는 부지런함마저 부담스런 요즈음이다. 사실 5월에 장기휴가를 써서 가족휴가를 가려고 작년부터 계획을 해오긴 했었다. 해가 바뀌면서 생각지 않은 새로운 업무들이 할당되었고, 나름대로 그 업무에 몰입하게 되어 자연스레 휴가 계획을 접게 되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편히 쉬는 것보다 일하는 편이 낫다.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도 무념무상으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독서라든가, 어학공부라든가 꼭 무언가를 한다. 물론 그런 것들은 일이라기보다는 휴식으로 여겨져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휴식이라고 하기에는 적잖이 집중과 끈기를 요하는 일이니, 워라밸이 강조되는 요즈음이라지만 직장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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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4. 5. 13. 11:31
카페를 나서 만리재 고갯길을 내려가며 불현듯 평소에는 가보지 않던 길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때마침 카메라가 있는 날이었다. 하늘은 창창하고 봄바람은 산뜻하다. 그리고 서울로에 올라서면서 눅진한 여름 공기를 예감한다. 이름조차 생소하고 모양새조차 서울에서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아담한 나무들이 좌우 번갈아가며 산책로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푸른 오솔길(Coulée verte). 서울로 7017의 모티브가 된 파리의 쿨레 베르트(Coulée verte)를 산책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주 느린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만리재 고개에서 흘러내려오는 옛 고가도로는 경사를 오르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어느새 서울역이 발아래 보이는 높이로 나를 이끈다. 나는 한글로 된 나무의 이름과 학명(學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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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으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4. 5. 12. 23:23
“창덕궁은 왕자의 난 이후로 조선시대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해왔고…” 앞에 서서 기계적으로 설명을 덧붙인다. 주말이 되면 박물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 시절, 도슨트를 희망하는 관람객이 도착하면 앞에서 으레 ‘조선시대 사실상의 법궁’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문장을 약간씩만 표현을 달리하며 줄줄 읊곤 했었다. 하루는 평일에 생긴 휴일을 이용해 창덕궁에 다녀왔다. 평일이어서 한산하게 둘러볼 수 있겠거니 생각했건만, 알록달록 개량된 한복으로 차려 입은 외국인들로 매표소가 인산인해다. 벌써부터 질리는 풍경이지만 그렇다고 도착한 발걸음을 돌리기도 아쉬워 입장료를 지불하고 돈의문을 통과한다. 마지막으로 창덕궁을 찾은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지라, 생전 처음으로 창덕궁을 찾은 것처럼 모든 풍경이 새롭게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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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부고주제 없는 글/印 2024. 4. 28. 20:08
하루는 엄마를 모시고 이천 산수유 축제에 다녀왔다. 일찍이 답사 차 이 지역을 들르면서 알게 된 행사로, 수도권에서는 가장 먼저 열리는 꽃축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산수유(山茱萸)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나 자투리 공원에서 곧잘 보이곤 하지만, 봄의 대명사 벚꽃에 밀려 그 수수함조차 알아차리기 힘든 나무다. 개나리의 노랑, 올리브의 초록, 레몬의 노랑이 절묘하게 배합된 산수유꽃이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헤아리기 어려운 색을 발하고 있었다. 사실 이날 산수유꽃의 색깔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다. 정돈되지 않은 가로수길에는 행락객이 여념 없이 봄기운을 찾아 사진을 남기고 있었고, 길 옆 가판에는 버섯이며 들기름이며 장날처럼 물건을 팔러 나온 지역민들이 분주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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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의 내장(內藏)주제 없는 글/印 2023. 11. 13. 21:21
올해 첫눈은 내장산에서 맞이했다.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0도를 오르락 내리락 하던 이번 주말 단풍을 구경하러 정읍에 다녀왔다. 갑자기 초겨울 날씨가 된 이번 주 전까지만 해도 11월 날씨가 맞나 싶을 정도로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고, 서울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새파란 은행나무가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막연히 내장산에 단풍나무도 꽤나 남아 있겠거니 생각했더랬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내장산에서 날 맞이한 건 싸락눈이었으니.. 단풍지도를 확인했던 건 9월말경, 단풍시즌에 맞춰 한창 촬영시점을 조율하던 때였다. 단풍지도에 따르면 내장산은 11월 6일에 절정을 맞이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내장산보다 한참 남쪽에 자리한 한라산은 내장산보다도 더 빠르게 단풍이 찾아올 예정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