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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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慶州), 흐린주제 없는 글/印 2023. 10. 14. 08:08
최근 K의 추천으로 라는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편인데, 는 에피소드당 러닝타임이 20분 남짓이어서 심심풀이로 하나씩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이 드라마는 내가 요새 주말에 짧은 일정으로 국내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다고 말하자, K가 비슷한 내용을 그린 드라마가 있으니 한번 보라고 권해준 것이었다. 의 소재는 '딱 하루만 여행 다녀오기'인데, 국내를 가더라도 가급적 1박을 하는 내 여행보다도 더 짧은 일정이다. 경주로 출발하던 날도 그랬는데,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기 싫던 날 (그렇다고 집에 콕 박혀 있기도 싫던 날) 이르지도 않은 오전 시간에 간단히 짐꾸러미를 챙기면서 아직까지 경주에서 1박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전에 본 가 떠오르면서, 당일치기로 여행을 다녀온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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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숲과 안반데기주제 없는 글/印 2023. 7. 31. 20:31
오늘은 필름카메라보다 디지털카메라에 손이 가는 날이다. 아직 사놓은 필름 여분이 있지만, 오늘은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디지털카메라를 집어들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함께 염두에 두었던 여행을 가보마 하고. 여행이라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반일짜리 당일치기였지만, 서울을 오고가는 일은 긴 여행과 똑같은지라 금전적 부담 때문에 갈지말지 잠시 망설여졌다. 작년 반 년간 프랑스에 체류한 이후로 국외 여행보다 국내 여행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올해 들어서 보름에 한 번 꼴로 서울을 벗어나 여행을 하고 있는 터였다. 행선지는 있지만 계획은 없다. 나는 예매 어플을 몇 차례 새로고침한 끝에 진부(오대산)행 열차 티켓을 하나 끊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두고 싶었지만, 피서철 서울역은 어느 가게를 가도 사람으로 미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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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주제 없는 글/印 2023. 7. 28. 18:17
비가 갠 하루는 퇴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원효대교로 나갔다. 영화 의 주된 무대이기도 한 원효대교는 별로 이용해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도보로 연결되는 진입로를 가까스로 발견, 난간이 달린 계단을 따라 원효대교에 올라섰다. 해를 등진 여의도의 마천루는 희뿌옇게 빛을 잃어 하나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되어 있었다. 맞은 편 용산 일대의 풍경만이 햇병아리처럼 노랗게 익어간다. 한강 위로는 비가 그친 하늘을 가로지르는 갈매기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앉을 자리를 찾는다. 일부는 한강 수면 위에 그대로 주저앉고, 개중 일부는 어지럽게 들어선 다리 위 가로등이나 송신선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마포대교보다 폭이 좁은 다리 위로 크고 작은 차량들이 곁을 주지 않고 분주하게 앞을 달린다. 여의도의 풍경이 멀어지고 용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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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바다들―서해주제 없는 글/印 2023. 6. 21. 00:09
# 시화(始華)의 바다는 따뜻하다. 바다 정면으로는 뭉툭한 바위섬이 올라 있고, 하늘에는 그대로 멈춰버린 연들과 분주한 갈매기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선을 그린다. 시화호 위로 에메랄드 색으로 페인트칠을 해놓은 송신탑이 도시로 도시로 끝없이 뻗어 있다. 그리고 바다 위로 늦은 오후의 태양이 아낌없이 떨어진다. # 오이도(烏耳島)의 바다는 혼잡하다. 땅딸막한 등대가 자리한 정방형의 항구에는 수산식당이 즐비하고 그 앞에는 주차된 차량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그리고 호객하는 직원들의 손짓. 부두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흔히 보이고, 조악하게 장식된 꼬마열차가 뱀처럼 가장자리를 누빈다. 그 복잡한 풍경 속에 저 멀리 인천 일대의 높다란 건물들이 두꺼운 띠를 이루며 희뿌옇게 바라다보인다. # 궁평(宮坪)의 바다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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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麻谷寺)주제 없는 글/印 2023. 6. 9. 08:51
서울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하늘에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는데, 곡두터널을 지날 즈음에는 두터운 구름이 걷혀 있었다. 곡두터널은 천안과 공주시를 이어주는 짤막한 터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린 차는 천안을 빠져나온 뒤부터 내내 구불구불 국도를 달렸다. 차머리 위로 흘러가는 나뭇잎은 벌써 한여름을 예고하고 있었다. 내가 이날 향한 곳은 마곡사였다. 내가 마곡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산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의 일이다. 안동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봉정사라는 곳을 찾게 되면서 산사의 존재를 알았다. 우리나라에 산 속에 자리잡은 사찰이야 한두 곳이겠냐마는 나는 이때의 여행을 계기로, 영주의 부석사와 보은의 법주사를 차례차례 찾았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지방에 자리한 통도사와 선암사, 대흥사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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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바다들—동해주제 없는 글/印 2023. 6. 5. 00:33
# 망상(望祥)의 바다는 몽롱한 은빛 하늘로 인해 푸르름이 바래 있었다. 그럼에도 동해안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해수욕장인지라, 때 아닌 더위를 피하기 위해 해안가 앞에 파라솔을 펼치고 진치고 있는 행락객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피서철 대목을 준비하는 상점가에서도 슬슬 분주함이 느껴졌다. # 나곡(羅谷)의 바다는 하천이 끝나는 지점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상의 외진 해안이다. 해안가가 넓다고 할 수도 없고, 그마저도 들쑥날쑥 솟아오른 바위들로 인해 해안선이 흐트러져 있다. 그런 한적한 해안가에서 대여섯 명 정도가 바다낚시를 즐기고 있다. 사장(沙場)을 복원하기 위함인지 모래더미가 한가득 쌓아올려진 이곳은 방비되지 않은 채 버려진 곳 같기도 하다. # 구산(邱山)의 바다를 나는 좋아한다. 월송정의 서사는 고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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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出張)주제 없는 글/印 2023. 5. 12. 18:15
출장을 다니며 좋은 경치를 구경해도 결국 드는 생각은 여행이란 내 돈 주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 내 옆에 있던 K 팀장의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곧바로 수긍했는데, 처음 가는 출장이 아무리 설렌다 하더라도 장거리 운전을 하고 익숙치 않은 길을 다니다보면 지치게 마련이다. 출장을 가지 않았더라면 사무실에서 했어야 할 업무 전화들은 여지 없이 걸려 온다. 결국 업무의 연장선상인 것이다. 그래도 잡학다식한 K 팀장과의 동행은 그렇지 않으면 심심했을 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부산과 거제를 거쳐 통영에 왔을 때 비는 시간을 이용해 잠시 한산도에 다녀왔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처음으로 학익진 전법을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작전이 구상되고 훈련이 이뤄졌던 곳이 바로 제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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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鐵原): 백마고지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3. 4. 29. 12:20
철원은 멀지 않았다. 나는 최근 우연한 기회에 DMZ에 걸쳐 있는 열 개 지자체에서 DMZ 투어가 열리는 것을 보고, 가장 적당한 곳을 고르다가 집에서 가장 가기에 편리한 철원을 택했다. 철원 코스는 백마고지뿐만아니라 전사자 유해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화살고지도 둘러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간 시점에는 작년 여름 수해로 인해 화살고지를 잇는 비마교가 유실되면서 화살고지까지 둘러볼 수는 없었다. 도착해서 가장 먼저 둘러보는 곳은 백마고지 전적지다. 전쟁 당시 이곳에서는 10일간 12번의 쟁탈전이 벌어져 7번 주인이 바뀌었고, 국군과 미군, 프랑스군이 참전했다. 전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물론 수많은 태극기가 수놓은 오르막길과 그 끝에 우뚝 선 거대한 태극기다. 합장(合掌)한 형태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