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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숲과 안반데기주제 없는 글/印 2023. 7. 31. 20:31
오늘은 필름카메라보다 디지털카메라에 손이 가는 날이다. 아직 사놓은 필름 여분이 있지만, 오늘은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디지털카메라를 집어들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함께 염두에 두었던 여행을 가보마 하고. 여행이라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반일짜리 당일치기였지만, 서울을 오고가는 일은 긴 여행과 똑같은지라 금전적 부담 때문에 갈지말지 잠시 망설여졌다. 작년 반 년간 프랑스에 체류한 이후로 국외 여행보다 국내 여행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올해 들어서 보름에 한 번 꼴로 서울을 벗어나 여행을 하고 있는 터였다.
행선지는 있지만 계획은 없다. 나는 예매 어플을 몇 차례 새로고침한 끝에 진부(오대산)행 열차 티켓을 하나 끊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두고 싶었지만, 피서철 서울역은 어느 가게를 가도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베이커리에서 샌드위치 하나와 대형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사들고 대합실 바닥 한켠에 눌러앉아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오후 3시가 좀 안 되어 승강장으로 내려가자 KTX-이음 열차가 이미 정차해 있다. 산천도 그렇지만 이음이라는 이름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육중한 철도차량에 예쁜 이름이 붙은 게 재미도 있다.
서울역을 빠져나온 열차는 용산역을 지나면서 경의중앙선으로 선로를 갈아타고 청량리로 향한다. 나는 전날 서점에서 산 알베르 카뮈의 <결혼・여름>을 집어들고 나름대로 피서(避暑)에 빠져들었다. 알베르 카뮈가 이런 작가였나 싶을 만큼 생에 대한 강렬한 예찬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몇 달 전인가 강릉 구간의 열차 소음이 심하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는데, 다행히 열차가 강원도로 접어든 뒤에도 주행이 불안정하지는 않았다. 뒤이어 평창, 둔내 역을 차례차례 거쳐 마침내 진부역에 도착했다. 더위로 인해 서행한 탓에 예정된 시각보다 19분이 늦어진 도착이었다. 나는 열차 예매와 거의 동시에 예약해 둔 렌트카로 갈아탔다. 편리한 세상이다.
일주문인 월정대가람에서부터 법당이 있는 곳까지는 길다란 전나무 숲길이다. 오래된 전나무들이 수평으로 뻗은 산책로와 대비되게 수직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나뭇가지마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서 한여름의 열기를 식히기에 충분하고, 그 사이 오솔길을 많은 사람들이 신발을 두 손에 든 채 맨발로 거닌다. 하루종일 사무실에 있다보면 감각이 무뎌지게 마련인데, 이곳 전나무숲에서 가장 큰 자극을 받는 것은 후각이었다. 잎과 나무껍질, 바로 옆 냇가에서 올라오는 그윽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코끝에 머문다. 산림을 유영(游泳)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 비해 월정사의 풍경은 나를 실망시켰으니, 내가 보고 싶었던 9층 석탑이 보수공사로 인해 철제물에 가려 있던 것이다. 거대한 철제물이 대웅전의 풍경까지 가려서 법당을 온전히 둘러보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대웅전 뒷편 깎아지를 듯한 산비탈 위에 독야청청 솟아오른 소나무숲을 보며, 그 아찔한 푸르름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다. 종루 앞에는 템플스테이 복장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사찰이 그 자신의 고즈넉함을 더 잃기 전에 서둘러 천왕문을 빠져나왔다.
월정사로부터 40여 분을 달려 향한 곳은 안반데기다. 평창 지역에서 둘러볼 만한 곳을 인터넷을 쭉 훑어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교과서적으로 '고랭지'라고 하면 내게는 더 빨리 이해가 되는데, 어쨌든 풍력단지와 배추밭이 어우러진 안반데기 산골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국도를 벗어난 차는 교행도 쉽지 않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오른 뒤에야 한 주차장에 도착했다.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고 조각보처럼 이어진 배추밭마다 서로 다른 농도로 석양이 쏟아졌다. 그 따사로운 풍경 사이사이에 새하얀 풍력발전기가 바닷속 흰고래처럼 거대한 울림을 내며 바람을 가른다. 끝으로 갈수록 날렵한 날개의 유선(流線)은 그 거대한 몸집에 비해 지나치게 섬세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해가 지는 방향을 통해 동서남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동해가 보일 만한 방향으로는 아직도 산등성이들이 아득히 펼쳐져 있다. 구름 낀 날씨였기 때문에 바다가 안 보이는지는 몰라도, 강릉을 코앞에 둔 거리에서 다시 한 번 미지의 세계 앞에 선 듯한 기분마저 든다. 한여름 서늘한 바람이 부는 이곳 안반데기. 이만큼이나 높은 곳에서도 바라다보이지 않는 바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배추밭. 횡대로 늘어선 풍력발전기. 나는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이제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안반데기는 별을 보는 장소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나는 실컷 별구경을 할 만큼 충분히 머무르지는 못했다. 차박을 위해 몰려든 차량에서 나오는 광공해 때문일까 기대한 만큼 많은 별을 보지는 못했지만 북두칠성 정도는 헤아려볼 수 있었다. 안반데기를 내려오는 길에 나는 운전대 앞에서 고라니와 마주쳤다. 뜻밖에 전조등을 마주한 고라니는 순간 얼음이 된 것처럼 몸을 옆진 채 길다란 목을 돌려 운전석을 응시한다. 그 눈망울이 너무 맑아서 우아하다기보다는 지극히 동물적이다. 차가 한동안 멈춰서자 고라니는 폴짝폴짝 뛰어 밤그늘에 뒤덮인 숲으로 사라진다. 나만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닐 텐데. 그 진기한 만남에 진부역으로 돌아오는 길까지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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