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의 추천으로 <박하경 여행기>라는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편인데, <박하경 여행기>는 에피소드당 러닝타임이 20분 남짓이어서 심심풀이로 하나씩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이 드라마는 내가 요새 주말에 짧은 일정으로 국내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다고 말하자, K가 비슷한 내용을 그린 드라마가 있으니 한번 보라고 권해준 것이었다.
<박하경 여행기>의 소재는 '딱 하루만 여행 다녀오기'인데, 국내를 가더라도 가급적 1박을 하는 내 여행보다도 더 짧은 일정이다. 경주로 출발하던 날도 그랬는데,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기 싫던 날 (그렇다고 집에 콕 박혀 있기도 싫던 날) 이르지도 않은 오전 시간에 간단히 짐꾸러미를 챙기면서 아직까지 경주에서 1박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전에 본 <박하경 여행기>가 떠오르면서, 당일치기로 여행을 다녀온다는 것도 보통 부지런하지 않고서야, 여기에 더해 어느 정도 금전이 따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박하경 여행기>에서는 여행지에 간 주인공이 관광명소를 찍고 다니는 내용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과 소중한 기억이 주된 내용을 이루는 잔잔한 드라마다. 하지만 이 잔잔한 하루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적지 않은 왕복 기찻값을 지불해야 한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어쨌거나 전부터 구상해왔던 대로 경주를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표를 예매하는 것부터 쉽지가 않았다. 이번 추석 연휴가 길었기 때문에 여행을 다녀올 사람들은 대체로 다녀왔겠거니 하고 넘겨 짚었는데, 한글날이 낀 이번 연휴에도 사람들이 앞다퉈 여행을 가는 모양이었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장바구니 물가도, 집값도, 소비도, 여행도 측량하기 어려운 인플레이션이 낀 것 같다고 머릿속으로 되뇌인다. 하지만 나 또한 바리바리 짐을 싸고 있는 이 아이러니.
문제는 경주역에 내리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신경주역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어쩐지 1박을 하고 갈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에 붐비던 인파는 황리단길에 도착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아무리 좋은 구경거리도 사람구경이 되어버리면 즐거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중학교 수학여행 이후 거의 20년 만에 찾아온 경주는 조용히 고즈넉하게 시내를 구경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차라리 20여 년 전 황리단길이 없었을 때의 옛스런 경주를 마주했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떠올려본다. 특히 불국사 경내 관람은 중국의 자금성을 방불케 하는 왁자함과 대웅전이고 탑 주위고 다른 관광객에 대한 배려 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인해 영 실망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혼자서 숙박을 하기에 마땅한 숙소가 모두 예약마감된 것도 있었지만, 하루를 더 머룰며 석굴암도 보고 포석정도 보려고 해도 사람 구경만 하다 끝날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괜찮은 기억이 있었다면 계림(鷄林)에서의 산책이다. 동궁과 월지를 보고 첨성대로 넘어오는 길에 계림의 둔덕을 따라 쭉 걸어보았다.
계림은 김알지 설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고, 오늘날로 따지면 서울의 광화문처럼 경주 안에서도 여러 국가기능이 모여 있던 곳이다. 계림의 푸른 소나무 사이로 싱그러운 어둠이 내려앉았고, 아직도 작업이 한창인 발굴현장에는 넓게 깔린 인공적인 파란색의 방수포가 형형한 빛을 말없이 잃어가고 있었다. 흐린 날씨 탓에 붉은 석양을 볼 수는 없었지만, 옅은 비구름이 걷히고 이제는 새하얀 구름들이 유목민과 그의 양떼처럼 엉성한 열을 이루었다. 하늘은 다른 행성에서 대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까마득한 쪽빛을 띠고 있었다.
이후 나는 요즘 그 힙하다는 황리단길의 한 카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신경주역 행 버스에 올라탔다. 20여 년만에 경주에 온 반가움 때문에 버스 도착시간이 되기까지 황리단길의 좁을 골목길을 빙글빙글 돌았던 기억이 있다. 반가움과 아쉬움이 뒤섞였던 여행, 그렇게 경주로의 당일치기 여행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