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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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항(大津港)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22. 20:19
백석항, 대진항, 사진항, 축산항, 경정항, 노물항, 대탄항을 차례로 지나 내가 향하는 곳은 이제 경계를 넘어 영덕군 해안가에 붙어 있는 근사한 카페다. 영덕의 시내라 할 수 있는 강구항에는 미처 다다르지 못한 지점이다. 이 카페는 목적지가 아닌 경유지로 가게 될 곳으로, 바다를 옆에 두고 드라이브를 하고픈 나의 바람을 충족시키기에 좋은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위에 나열한 어항(漁港)들을 지나칠 때마다 깔딱고개 같은 작은 언덕들을 넘는다. 바다와 만나는 끝에서 벼랑을 이루는 이 언덕들은 항구와 항구를 구분짓는 자연적 경계가 된다. 언덕을 넘어 내려올 때마다 다음으로 가까워져 오는 어촌 마을의 정감 있는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서부터 끝없이 꼴을 바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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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越松亭)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4. 19:17
영양에서 울진으로 넘어온 이튿날, 후포항에는 비가 내렸다. 여인숙의 흐린 창문이 포개져 창밖 풍경은 마치 희미해진 과거의 영상을 보는 듯했다. 밖으로 나섰을 때는 바닷바람으로 날씨가 쌀쌀한데도 눈이 아닌 비가 오는 것이 의아했다. 험상궂은 날씨와 달리 울진의 바다는 잠잠했고, 쾌청한 날씨에 거칠게 파도가 일던 지난 7번 국도 여행이 생각났다. 울진에서는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던 그 많은 산등성이는 보이지 않았다. 후포항의 모든 건물들은 자석에 달라붙은 철가루처럼 오로지 해안선에 의지해 삐뚤빼뚤 열을 이루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 향한 곳은 월송정. 빠른 길을 버리고 부러 국도를 따라 해안가를 운전한다. 언젠가 삼상사(三上思)에 관한 구절을 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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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7. 주마간산(走馬看山)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2. 3. 09:33
오아후에서의 마지막날이자 하와이에서의 마지막날은 빠르게 흘러갔다. 애당초 오아후 섬에서 여러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던 우리 일행은 괜한 탐방 욕심에 여행 마지막날 탈이 나는 것보다는 여행을 갈무리하는 느낌으로 원없이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우리의 의사결정인 것처럼 말했지만, 여행지에서 절대권력자인 자식 된 입장에서 나의 결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오후 2시경에 이륙하는 비행 시간 전까지 와이키키에서 출발해 반시계 방향으로 오아후를 3분의 1 정도만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글의 제목을 주마간산으로 달아놨다고 해서, 하와이 출발 하루 전날 견인된 차량을 되찾은 우여곡절 끝에 방문한 양조장(distillery) 얘기를 빼놓을 순 없겠다. 코하나 양조장(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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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파리(竹波里)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1. 17:46
왜 영양(英陽)이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목적지가 없어도 어딘가에는 늘 도착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그곳이 영양군, 그 안에서도 수비면, 그 안에서도 죽파리였을 뿐이다. 죽파(竹波),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눈앞에서 대숲이 너울댈 것만 같은 이 마을로 나를 이끈 것은 바로 자작나무 숲이었다. 겨울이 되고 오래 전부터 설경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영양으로 오게 되었을 때 설국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안동과 영양, 울진, 영덕을 차례로 들렀는데 이 중 영양에서만 산등성이의 북사면마다 눈이 녹지 않았다. 영양의 둥그런 산머리마다 밀가루를 체로 걸러낸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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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6. 밤(夜)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30. 03:38
띄엄띄엄 써온 하와이 여행기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사실 우천으로 인해 루아우 공연이 취소되었던 첫날부터 오아후에서의 일정은 그리 체계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아후에서 맞는 둘째날, 우리는 와이키키 해변을 따라 걸었고 그 다음에는 인근의 또 다른 호텔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잘 알아보고 고른 곳은 아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테라스에서 전날보다 나아진 햇살을 쬐며 식사를 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이곳까지 렌트카를 끌고 왔는데, 주차해 놓은 2시간여 사이에 차가 견인된 것이었다. 눈앞에서 (내 차도 아닌 남의) 차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찔하기도 했고 전날 투스텝 비치에서 수영하면서 베인 발바닥이 욱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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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의 문법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1. 29. 12:17
여행을 가겠다고 마음 먹었던 게 언제부터였던가. ‘쉼표를 찍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묻는 이에게 말한 적이 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새로운 리듬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내게는 바로 그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 몇 달 몇 주 이어지고 있었다. 쉼표가 없이 문장을 잇고 또 이어도 꼭 비문(非文)은 아니듯이, 내 일상에 어떤 문법적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쉼표 없는 글쓰기에 맛들린 것처럼 일상은 무탈하게 굴러갔다. 하지만 하나의 문장이 문장답기 위해서는, 재밌는 이야기와 좋은 표현을 욱여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적절한 문장부호를 써서 읽고 말하는 흐름을 부드럽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알맞는 문장부호를 고르고 위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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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실(絲)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15. 17:53
이어쓰는 하와이 여행기. 여하간 두 번째로 묵었던 마운틴뷰의 방갈로에 대해서는 폭우로 인한 정전과 어둠 속에서 요리했던 것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고, 미국에서 '생존주의'란 무엇인지 몸소 깨닫게 된 계기였다. 오아후 섬으로 넘어가면서 알아본 숙소는 이번 체류 중에 유일한 호텔이었다. 와이키키 일대에는 굴지의 호텔들이 즐비한데, 그 가운데 내가 고른 곳은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텔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하와이에서 맨 처음 생긴 호텔이라는 서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에서 편리함과 호화로움을 택할 법도 하건만,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호텔까지 정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호텔에 묵게 된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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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그 후(après)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10. 5. 09:33
빅 아일랜드를 코나를 통해 아웃할지 힐로를 통해 아웃할지 고민하다가, 원래 예약했던대로 코나를 통해 아웃하기로 했다. 마우나케아 화산을 방문하는 일정이 하루 밀리면서 대신 코나를 둘러보기로 한 일정을 지우게 되었다. 새들로드, 마우나케아에서의 일정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코나를 둘러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커피농장을 가보기로 한 일정 정도가 사라졌는데, 빅 아일랜드에 머물면서 맛있는 커피를 맛볼 기회는 수시로 있었다. 호의적이지 않은 날씨는 우리 일정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원래 이날 오아후 섬으로 넘어가서 관람하기로 했던 루아우 공연이 우천 예보로 취소되었다. 오전에도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하기 보다는 가급적 신변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썼다. 힐로에 머물 당시 숙소에서 건조기 안에 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