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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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6. 밤(夜)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30. 03:38
띄엄띄엄 써온 하와이 여행기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사실 우천으로 인해 루아우 공연이 취소되었던 첫날부터 오아후에서의 일정은 그리 체계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아후에서 맞는 둘째날, 우리는 와이키키 해변을 따라 걸었고 그 다음에는 인근의 또 다른 호텔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잘 알고서 고른 곳은 아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테라스에서 전날보다 나아진 햇살을 쬐며 식사를 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이곳까지 렌트카를 끌고 왔는데, 주차해 놓은 2시간여 사이에 차가 견인된 것이었다. 눈앞에서 (내 차도 아닌 남의) 차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찔하기도 했고 전날 투스텝 비치에서 수영하면서 베인 발바닥이 욱신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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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의 문법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1. 29. 12:17
여행을 가겠다고 마음 먹었던 게 언제부터였던가. ‘쉼표를 찍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묻는 이에게 말한 적이 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새로운 리듬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내게는 바로 그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 몇 달 몇 주 이어지고 있었다. 쉼표가 없이 문장을 잇고 또 이어도 꼭 비문(非文)은 아니듯이, 내 일상에 어떤 문법적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쉼표 없는 글쓰기에 맛들린 것처럼 일상은 무탈하게 굴러갔다. 하지만 하나의 문장이 문장답기 위해서는, 재밌는 이야기와 좋은 표현을 욱여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적절한 문장부호를 써서 읽고 말하는 흐름을 부드럽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알맞는 문장부호를 고르고 위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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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실(絲)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15. 17:53
이어쓰는 하와이 여행기. 여하간 두 번째로 묵었던 마운틴뷰의 방갈로에 대해서는 폭우로 인한 정전과 어둠 속에서 요리했던 것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고, 미국에서 '생존주의'란 무엇인지 몸소 깨닫게 된 계기였다. 오아후 섬으로 넘어가면서 알아본 숙소는 이번 체류 중에 유일한 호텔이었다. 와이키키 일대에는 굴지의 호텔들이 즐비한데, 그 가운데 내가 고른 곳은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텔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하와이에서 맨 처음 생긴 호텔이라는 서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에서 편리함과 호화로움을 택할 법도 하건만,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호텔까지 정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호텔에 묵게 된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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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그 후(après)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10. 5. 09:33
빅 아일랜드를 코나를 통해 아웃할지 힐로를 통해 아웃할지 고민하다가, 원래 예약했던대로 코나를 통해 아웃하기로 했다. 마우나케아 화산을 방문하는 일정이 하루 밀리면서 대신 코나를 둘러보기로 한 일정을 지우게 되었다. 새들로드, 마우나케아에서의 일정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코나를 둘러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커피농장을 가보기로 한 일정 정도가 사라졌는데, 빅 아일랜드에 머물면서 맛있는 커피를 맛볼 기회는 수시로 있었다. 호의적이지 않은 날씨는 우리 일정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원래 이날 오아후 섬으로 넘어가서 관람하기로 했던 루아우 공연이 우천 예보로 취소되었다. 오전에도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하기 보다는 가급적 신변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썼다. 힐로에 머물 당시 숙소에서 건조기 안에 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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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4. 비(雨)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10. 1. 18:22
엄마는 두 번째 숙소도 참 좋아하셨다. 깨끔하니 통유리창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놓은 오두막의 설계상 어느 위치에 있든지 바깥의 싱그러운 우림이 보였다. 성장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저 거대한 식물들은 그 속은 성기지 않을까, 물음표를 띄워본다. 숙소 주인이 닭장에 기르는 야생닭은 해뜨기 전부터 울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아침이 되고서야 울음을 멈췄다. 아침부터 비가 오다보니 사우스 포인트까지 오기는 했지만, 늦은 오후에는 돌아가는 길 위에 푸날루우 해안(Punalu’u Beach)을 가보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할레오카네 전망대(Haleokane)에서 북동쪽을 바라보자니, 한눈에 화산 공원 일대에 몰아친 국지성 호우가 보였다. 비가 내리는 곳과 내리지 않는 곳의 경계가 또렷이 보일 만큼, 비가 내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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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4. 점(the point)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9. 29. 14:42
이튿날 날씨가 걱정되어 밤잠을 설쳤던 나흘차, 걱정에는 이유가 있었다. 코나가 자리한 빅 아일랜드의 서부와 달리, 힐로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 일대는 기후가 습윤하고 국지적인 호우가 자주 내린다. 나는 이른 아침 실시간 레이더 기상지도를 보면서 광대한 화산 공원 위에 커다란 이불처럼 드리운 빨간 구름띠를 확인했다. 구름띠는 강우량이 높은 지점일수록 짙은 빨강을 띠었다. 이 구름띠는 해안에 이르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는 희한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화산 공원의 해안가 일대라면 괜찮을까 싶어 아침에 숙소를 나섰지만, 아니나 다를까 내륙의 호우로 인해 해안으로 통하는 진입로가 봉쇄되어 있었다. 우비를 쓰고 삼삼오오 무리지어 트레킹을 떠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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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3. 밤(la nuit)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9. 19. 13:17
비포장도로의 끝에 일군의 천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첨단시설들은 너무나 새하얗거나 너무나 차가운 메탈 색깔을 하고 있었다. 인공의 자재들은 여기까지 어떻게 싣고 왔을 것이며, 천체관측장비를 가동할 전기는 어디서 끌어온단 말인가. 일몰시각으로 향하는 태양은 마우나케아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빛을 받은 능선의 봉긋한 머리는 마치 화성의 크레이터처럼 빨갛게 익었다. 한 젊은 남성이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가 바로 마우이에요! 북쪽의 운해(雲海) 위로 완만하고 거대한 산봉우리가 보였다. 할레아칼레 화산이다. 작년 대화재를 겪었던 마우이 섬의 존재는 하와이에 놀러 여행을 오면서도 영 마음 개운치 않은 짐이었다. 구름과 마찬가지로 뭉게뭉게 피어오른 할레아칼레 화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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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3. 별(les étoiles)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9. 17. 00:51
두 번째 숙소에서 짐을 푼다. 빅 아일랜드의 마운틴뷰에 위치한 우리의 두 번째 숙소는 방갈로였다. 하와이에는 ‘retreat’이라고 해서 조용하게 칩거할 수 있는 공간이 드문드문 곳곳에 퍼져 있다. 첫 번째 숙소가 주택단지에 위치한 가정집이었다면, 두 번째 숙소 역시 주택단지에 있기는 하지만 집과 집 사이의 녹지가 넓고 우거져서 사생활이 완전히 보호되는 공간이었다. 나는 하와이에 오게 된다면 이렇게 완전히 주위과 격리된 공간에서 쉬어보고 싶었다. 화산 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나올 즈음 휘몰아치는 물보라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으니, 마우나케아로 오르는 길이 안전한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출발하기 전 미리 방문자센터에 전화해서 마우나케아에 진입할 수 있는 상황인지 확인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유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