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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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기다림인가?여행/2025 끝추위 묵호 2025. 4. 10. 14:33
바다날씨는 예측이 어렵다. 일전에 사전 답사차 영덕에 출장간 적이 있다. 공원을 둘러보는 동안 그곳에서 내가 만난 한 공무원은 날씨가 맑다고 해서 바다날씨가 반드시 좋은 건 아니라고 했다. 깃털구름 하나 없이 쾌청한 날이었다. 이번에 좌초된 울릉도 여행 계획은 그 날의 대화를 상기시켰다.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묵호항을 통해 도동항으로 들어가는 배편을 예약한 게 여행일로부터 한 달 전쯤. 동절기 막혀 있던 배편이 운항을 재개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울릉도 여행을 계획하게 된 건 아주 즉흥적이었다. 한번은 울릉도를 다녀온 친구가 섬에 공항이 들어서기 전에 그곳을 여행하라는 얘기를 했다. 공항이 들어서면 외지인들에 의해 평범해질 거라면서.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였다. 그 길로 다음날인가 배편을 예약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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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변천(半邊川)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3. 14. 15:37
서석지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국도 옆으로는 꽝꽝 얼어붙은 실개천을 따라 무채색의 단애(斷崖)가 펼쳐졌다. 절벽의 거친 단면은 마치 산봉우리가 겹겹이 포개어진 백제의 대향로를 연상케 했다. 낭떠러지는 수직낙하를 거부하듯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지류가 반변천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부드럽게 입수(入水)했다. 그 접면에는 사람의 왕래가 있을까 싶을 법한 신식 정자가 서 있다. 예의 얼어붙은 실개천은 어쩌면 바위보다도 단단해 보이고 흙보다도 불투명해 보였다. 겨울철 우리나라의 암석은 가장 본래의 색을 띤다. 초록(草綠)이 사라진 겨울 풍경 속 암벽은 그을음, 얼룩, 마모 따위의 흔적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노령의 암석들에서 환부(患部)의 심상을 떠올렸다가, 인고(忍苦), 내강(內剛)의 추상적 개념을 발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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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지(瑞石池)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3. 12. 03:17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목적지 없던 이번 여행을 합리화할 구실을 마침내 발견했다면, 그건 바로 서석지(瑞石池)가 아니었을까. 서석지를 품은 작은 마을은, 안에서부터 새어나오는 인기척이 부재했다기보다는, 바깥으로부터 일체의 소리가 소거된 것처럼 보였다. 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이런 것일까, 소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위를 둘러보아도 한겨울 모락모락 피어오를 법한 굴뚝 연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헐벗은 나뭇가지에도 바람에 나부낄 잎사귀 하나 남아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줄어든 소리의 부피만큼, 차분해진 마음이 내 몸보다도 크게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지구에 도착하기도 전 우주복을 벗어버린 비행사가 된 기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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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항(大津港)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22. 20:19
백석항, 대진항, 사진항, 축산항, 경정항, 노물항, 대탄항을 차례로 지나 내가 향하는 곳은 이제 경계를 넘어 영덕군 해안가에 붙어 있는 근사한 카페다. 영덕의 시내라 할 수 있는 강구항에는 미처 다다르지 못한 지점이다. 이 카페는 목적지가 아닌 경유지로 가게 될 곳으로, 바다를 옆에 두고 드라이브를 하고픈 나의 바람을 충족시키기에 좋은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위에 나열한 어항(漁港)들을 지나칠 때마다 깔딱고개 같은 작은 언덕들을 넘는다. 바다와 만나는 끝에서 벼랑을 이루는 이 언덕들은 항구와 항구를 구분짓는 자연적 경계가 된다. 언덕을 넘어 내려올 때마다 다음으로 가까워져 오는 어촌 마을의 정감 있는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서부터 끝없이 꼴을 바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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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越松亭)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4. 19:17
영양에서 울진으로 넘어온 이튿날, 후포항에는 비가 내렸다. 여인숙의 흐린 창문이 포개져 창밖 풍경은 마치 희미해진 과거의 영상을 보는 듯했다. 밖으로 나섰을 때는 바닷바람으로 날씨가 쌀쌀한데도 눈이 아닌 비가 오는 것이 의아했다. 험상궂은 날씨와 달리 울진의 바다는 잠잠했고, 쾌청한 날씨에 거칠게 파도가 일던 지난 7번 국도 여행이 생각났다. 울진에서는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던 그 많은 산등성이는 보이지 않았다. 후포항의 모든 건물들은 자석에 달라붙은 철가루처럼 오로지 해안선에 의지해 삐뚤빼뚤 열을 이루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 향한 곳은 월송정. 빠른 길을 버리고 부러 국도를 따라 해안가를 운전한다. 언젠가 삼상사(三上思)에 관한 구절을 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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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7. 주마간산(走馬看山)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2. 3. 09:33
오아후에서의 마지막날이자 하와이에서의 마지막날은 빠르게 흘러갔다. 애당초 오아후 섬에서 여러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던 우리 일행은 괜한 탐방 욕심에 여행 마지막날 탈이 나는 것보다는 여행을 갈무리하는 느낌으로 원없이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우리의 의사결정인 것처럼 말했지만, 여행지에서 절대권력자인 자식 된 입장에서 나의 결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오후 2시경에 이륙하는 비행 시간 전까지 와이키키에서 출발해 반시계 방향으로 오아후를 3분의 1 정도만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글의 제목을 주마간산으로 달아놨다고 해서, 하와이 출발 하루 전날 견인된 차량을 되찾은 우여곡절 끝에 방문한 양조장(distillery) 얘기를 빼놓을 순 없겠다. 코하나 양조장(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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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파리(竹波里)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1. 17:46
왜 영양(英陽)이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목적지가 없어도 어딘가에는 늘 도착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그곳이 영양군, 그 안에서도 수비면, 그 안에서도 죽파리였을 뿐이다. 죽파(竹波),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눈앞에서 대숲이 너울댈 것만 같은 이 마을로 나를 이끈 것은 바로 자작나무 숲이었다. 겨울이 되고 오래 전부터 설경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영양으로 오게 되었을 때 설국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안동과 영양, 울진, 영덕을 차례로 들렀는데 이 중 영양에서만 산등성이의 북사면마다 눈이 녹지 않았다. 영양의 둥그런 산머리마다 밀가루를 체로 걸러낸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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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6. 밤(夜)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30. 03:38
띄엄띄엄 써온 하와이 여행기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사실 우천으로 인해 루아우 공연이 취소되었던 첫날부터 오아후에서의 일정은 그리 체계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아후에서 맞는 둘째날, 우리는 와이키키 해변을 따라 걸었고 그 다음에는 인근의 또 다른 호텔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잘 알아보고 고른 곳은 아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테라스에서 전날보다 나아진 햇살을 쬐며 식사를 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이곳까지 렌트카를 끌고 왔는데, 주차해 놓은 2시간여 사이에 차가 견인된 것이었다. 눈앞에서 (내 차도 아닌 남의) 차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찔하기도 했고 전날 투스텝 비치에서 수영하면서 베인 발바닥이 욱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