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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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 금(Crack)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9. 8. 16:55
모든 계획된 일정도 금이 가기 마련이다. 우리 일행이 머릿속으로 구상한 대로 움직였던 일정은 아마도 첫 이틀 사흘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2일차 오후부터 이미 우리의 여행계획은 약간의 수정이 불가피했다. 오후 일정이었던 마우나케아 화산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게 된 것. 오전 물놀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해결한 뒤, 우리가 향한 곳은 아카카 폭포다. 일정을 생략할지 말지 고민했던 목적지로, 그럼에도 숙소와 가까워 하와이에 도착한 첫날 짐을 풀고 잠깐 들를까 했던 곳이다. 물론 예상치 못한 비행기의 연착과 아버지의 가방 분실로 그 계획은 자연히 무산되었다. 아카카(Akaka). 우리말로 하면 갈라진, 금이 간, 분리된 등의 의미가 된다. 빅 아일랜드의 동쪽으로는 실핏줄처럼 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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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 수영(水泳)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9. 7. 20:25
엄마는 물놀이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나는 짧은 이번 일정 안에 해안에 가는 일정을 곳곳에 넣어두었다. 엄마는 수영을 오랫동안 하셨기 때문에 영법을 자유롭게 구사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실내 수영에 국한된 이야기인지라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서는 해안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만 조금씩 물놀이를 즐기신다. 이번 행선지는 칼 스미스 해변(Carl Smith Beach).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은 엄마가 헤엄치는 모습은 생경하면서도 어쩐지 반갑다. 하와이의 바다가 다른 바다와 다르다고들 하지만, 노들섬에서 오후 업무일정을 마친 뒤 밤비행기로 하와이에 온 내 몸은 아직 하와이의 청량함을 흠뻑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물에 들어가 엄마의 수중 사진을 남기거나 약간씩 스노클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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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분실(紛失)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9. 3. 09:54
9월 3일 휴일에 남기는 기록. 힐로에 도착한 첫날은 별다른 일정을 소화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렌트카 영업소에 백팩을 두고 온 사실을 숙소에 도착한 뒤에야 알아차려서, 렌트카를 빌린 장소로 다시 차를 몰고 가야 했던 것이다. 영업소에 전화를 걸어보니 다행히도 불과 몇 시간 전 키를 건네 주었던 직원이 보관하고 있단다. 미국에서 분실물을 찾다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팁 문화를 잘 모르더라도 귀중품을 찾아준 사람에게는 사례를 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이기도 하건만, 아버지가 되찾은 백팩에 들어있던 현금 중 소액을 백발의 직원에게 건네도 직원은 꽤나 완강하게 거부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길에 안도하면서도 나에게 미안해 하셨고, 나는 그런 모습에서 아버지의 나이듦을 또 한번 곁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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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힐로(Hilo)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9. 1. 11:40
8월 힐로의 날씨는 고요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하와이 행은 순탄치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5월에 갔어야 할 여행이었지만 회사에서 예정에 없던 신규 프로젝트에 착수하면서 예매해 둔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계획을 무기한 연기하게 되었다. 1년 전, 그러니까 작년 5월 무렵에 예약해 놓은 티켓이었다. 하와이로 출국하는 당일에는 우리나라에 태풍이 올라왔다. 기상 상황이 불안정해서 비행편의 이륙시간이 두어 차례 순연되었다. 인천에서의 이륙이 늦어지면서 덩달아 하와이 안에서 한 번 더 이동하는 국내선 비행편으로의 환승 또한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기 때문에 일찍부터 준비에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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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道東書院), 서사의 공백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3. 8. 20:50
요즈음 한동안 풀렸던 날씨가 다시 추워지면서 두 번째 겨울을 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내 안에서 굴러가던 시계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잠시 멈춰버린 것 같다. 그 사이 나는 주말을 껴서 부산과 포항으로 한 차례 출장을 다녀왔고, 마침 출장 전날밤 집에 난방이 작동하지 않은 까닭으로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출장에서의 일정은 얼마나 빠듯했던지, 내가 여행하기 좋아했던 부산을 조금이라도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출장을 간 날은 더군다나 미세먼지가 자욱히 가라앉은 날이었고, 광안대교 위를 지나며 바라본 부산 해안가에는 몇 년사이 해안을 끼고 초고층 아파트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직선으로만 완성된 획일적인 건물들을 보며, 어쩐지 이 도시가 싫어질 것 같았다. 잃어버린 일상의 방향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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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고분군, 살아남은 네크로폴리스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2. 25. 18:39
인간은 거대한 상징 체계 안에서 살아간다.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에게 더 뛰어나고 남다른 상징을 두르기 위함이다. 인간만큼 많은 상징물을 만들어내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버스 정류장의 옥외 광고 속 모델, 고층 아파트에 장식적으로 붙여 놓은 근사한 영문명, 공원 가로등마다 알록달록 내걸린 도시의 엠블럼. 상징 체계 없이는 사고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내가 호흡하는 공간은 모두 상징물로 꽉 차 있다. 그러한 상징 체계의 거의 대부분은 가공된 것들이다.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미를 규정하기 위해, 부를 드러내기 위해. 태초에는 많은 상징물이 필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체(media)와 광고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수많은 이미지와 수많은 텍스트가 쉴새없이 상징을 실어나른다. 행복은 무엇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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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海印寺), 산 위에 새겨진 바다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2. 21. 18:56
요새 사소한 악취미가 생겼다. 일이 끝나고 나면 자잘한 보복소비를 하며 기분전환거리를 찾게 된 것.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갈 즈음에도 하지 않던 보복소비를 하게 된 발단은 잦은 야근에서 비롯된다. 작년 연말을 기점으로 밥먹듯 야근을 하다보니 소액이나마 야근수당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야근수당으로 평소 사지 않던 물건을 사는 것이다. 가령 꽤 값나가는 수첩이나 필기구를 사는 식이다. 원래도 문구류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만큼 사놓고 쓰지 않는 나의 성향도 잘 아는지라 쓸 것 같지 않은 물건이면 사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개성 있는 문구류를 쭉 구경하다가, 이따금 마음에 드는 것은 나중에 선물로 쓰든 필기에 쓰든 목적을 따지지 않고 대책 없이 사들이는 것이다. 여행도 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