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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4. 비(雨)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10. 1. 18:22
엄마는 두 번째 숙소도 참 좋아하셨다.
깨끔하니 통유리창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놓은 오두막의 설계상 어느 위치에 있든지 바깥의 싱그러운 우림이 보였다. 성장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저 거대한 식물들은 그 속은 성기지 않을까, 물음표를 띄워본다. 숙소 주인이 닭장에 기르는 야생닭은 해뜨기 전부터 울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아침이 되고서야 울음을 멈췄다.
아침부터 비가 오다보니 사우스 포인트까지 오기는 했지만, 늦은 오후에는 돌아가는 길 위에 푸날루우 해안(Punalu’u Beach)을 가보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할레오카네 전망대(Haleokane)에서 북동쪽을 바라보자니, 한눈에 화산 공원 일대에 몰아친 국지성 호우가 보였다. 비가 내리는 곳과 내리지 않는 곳의 경계가 또렷이 보일 만큼, 비가 내리는 곳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맨홀 뚜껑이 열린 것처럼 빗줄기가 광활한 수직을 그리고 있었다.
결국 날씨가 잠잠해질 때까지 동쪽으로 회귀하는 건 잠시 접어두고, 숙소에서 더 먼 방향, 그러니까 서쪽으로 향해 다다른 곳이 투스텝 해변(Two Step Beach)이었으니, 이때만 해도 숙소에 떨어지는 저녁이 될 즈음 날씨가 잠잠해지기는커녕 더 사나워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투스텝 해변은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낡은 시설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우리나라 어디 벽지에 있는 해변 같은 인상을 받았다.
투스텝은 알려진 명성만큼 스노클링하기에 좋은 장소였지만, 칼스미스 해변보다는 물살도 있고 수심도 깊어서 마음놓고 물놀이를 즐기지는 못했다. 또 예리하게 구멍이 숭숭 뚤린 암석들이 많아 나는 이 곳에서 아쿠아슈즈를 신지 않고 잠시 방심한 사이 발바닥을 크게 베였다. 칼스미스 해변에서처럼 바다거북은 없었지만, 샛노란 열대어들을 실컷 볼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숙소가 위치한 마운틴뷰의 날씨는 기대와는 다르게 더 나빠져 있었다. 보통 하와이의 동쪽에서 올라오는 열대폭풍이 섬에 상륙한 모양이었다. 가장 빠른 속도로 와이퍼를 움직여도, 전방을 주시하기 어려울 만큼 물세례를 퍼붓듯이 비가 내렸다. 아스팔트 도로도 요철마다 빗물이 고였는데도 시야가 좁다보니 빗물이 모여 있는 곳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행여 차가 미끄러질까 속도를 최대한 낮췄다. 길과 길이 갈라졌다 합쳐지는 분기점을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만큼, 생애 겪어보지 못한 폭우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날 우리 숙소가 자리한 마을 일대가 정전되었다. 아주 가까스로 도착한 숙소에는 스위치를 올려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해 하며 실내에 얼마간 있자니,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이었다.
사실 단전 자체도 예상치 못한 큰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발전기로 물을 데우는 이 집 구조의 특성상, 전기가 끊긴다는 것은 곧 따뜻한 물을 쓸 수 없다는 의미였고, 해변에서 수영을 즐긴 뒤 난데없는 폭우를 뚫고 온 우리 일행이 편하게 샤워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숙소에서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가스뿐인지라, 우리는 일단 숙소 안에 비상용 촛불을 서너 개 켜 놓았다.
결국 나와 아빠는 바로 옆 주인 숙소로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일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는 온수로나마 엄마가 먼저 씻으실 수 있게 해드렸지만, 그 온수는 채 1인분도 제공하지 못하고 동이 났다. 아빠를 먼저 욕실에 보내고 남은 나는 현관에 앉아 주인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붙임성이 좋은 검정 색 큰 개 한 마리가 계속 내 손길을 찾았다. 주인은 개의 이름과 나이, 입양해온 경위에 대해 얘기했다. 유기당하고도 다시 사람에게 마음을 붙이는 동물의 낙관성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잠시 생각했다.
샤워를 마친 뒤, 우리는 그나마 쓸 수 있는 가스불로나마 억척스레 뒤늦은 저녁을 준비했다. 첫날 쟁여둔 닭의 살코기와 당근과 양파를 비롯한 야채를 몽땅 털어넣은 뒤, 고추장을 넣어 닭갈비와 비슷한 맛을 냈다. 과연 이런 요리가 있을까 싶을 만큼 재료를 투하할 수록, 요리에 넣는 고추장의 양도 늘어갔다. 한바탕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고 하기에는 두 번은 겪고 싶지 않는 경험이었지만, 촛불과 랜턴을 가운데 두고 셋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앉아 먹었던 이날의 저녁은 하와이에 있는 동안 즐겼던 식사 중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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