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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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 생존법일상/book 2025. 1. 12. 03:21
뒤르켐은 현대 사회가 스스로 실패를 인정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잔혹한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낙오자들은 더 이상 불운 탓을 할 수 없으며, 내세에서 구원받으리라는 희망도 품을 수 없었다.—p. 15 우리는 계속해서 웃으라는,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즐겁게 지내라는, 휴일에는 환호성을 지르라는, 살아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런 요구가 없어도 이미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현대는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권리인 울적한 권리를, 비생산적일 권리를, 퉁명스러울 권리를, 혼란스러워할 권리를 박탈했다. 행복이 표준 상태여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현대가 우리에게 저지를 핵심적인 부당 행위다.—p. 19 19세기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은 특정 시대가 무엇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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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 like These)일상/film 2025. 1. 11. 11:21
What if it was one of ours? 몇 주째 영화가 보고 싶었던 요즈음 마침내 영화관을 찾았다. 내가 관람한 영화는 . 독특한 서사를 찾아 를 보고 싶기는 했지만 맞는 시간대가 없었던지라, 아무렴 이라도 좋았다. 일단은 영상이 마음에 든다. 프랑크 반 덴 에덴(Frank van den Eeden)이라는 촬영감독이 촬영을 총괄했다고 하는데, 그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내가 본 작품 중에는 2018년에 개봉한 이 있다. 은 공간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영화는 아니어서 영상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아일랜드 남부 웩스포드라는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장소와 인물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영상을 만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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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일상/book 2025. 1. 7. 23:50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우리는 현실적 실존 조건이라는 외부의 필요성에 끼워 맞춰지고, 상상적인 것이라는 ‘자기의’ 필요성에 스스로를 끼워 맞춘다.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실존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논리다.……저 일괴암 같은 문장, 자발적 복종의 거대한 공식의 의미는 이렇다. 우리는 오직 주체로서만, 오직 정체성을 가진 행동하는 주체로서만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다. 즉 자발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저절로 기능할 수 있다.—p.29, 35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낯선 외부의 이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새로운 ‘스스로의’ 이상으로 인정한다. 이 역설에 주목해야 한다. 일차적 나르시시즘 상태에 있는 인간을 방해하고 낙원에서 몰아내는 것은 처음에는 부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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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일상/film 2024. 12. 28. 11:08
많이 늦은 영화 리뷰, 미망.친구가 광화문을 좋아하는 나에게 추천해준 영화로, 모처럼 동행인이 있던 영화관람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극중 내내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리한 광화문을 맴돌기는 하지만, 첫 장면은 옛 서울극장이 자리한 종로3가 일대에서부터 출발한다. 나중에 서울아트시네마로 이름을 바꾸었던 서울극장의 텅빈 관람석에 대한 아늑한 기억과 함께, 비좁은 골목길 철물점의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무심하게 주고 받는 남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계절은 여름에서 겨울로 건너가고, 인물들은 광화문과 종로 사이 어딘가를 배회하고,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지고, 잊었다가 다시 떠올린다.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迷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未忘), 멀리 넓게 바라보다(彌望),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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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의 수수께끼일상/book 2024. 11. 11. 10:56
…증여는 유력한 두 대리인(시장과 국가)에게 장악되었다. 시장(직업 시장, 재화와 서비스 시장)은 이해타산, 회계, 계산의 장이며, 국가는 법을 존중하고 법에 복종하는 비인격적 관계의 장이다.—p. 18 모스는 분명히 왜 어떤 사회에서는 “증여가 경제와 도덕을 지배하게 되는지”를 자문했다. 그가 내놓은 대답은 몇몇 조건이 충족될 때 그런 사회가 출현한다는 것이었다. 그 조건이란 천째, 사회의 기틀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는 데 인격적 관계가 중요한 역할, 아니 오히려 지배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스는 이것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보았다. 인격적 관계가 지배적인 역할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을, 자신들의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있어 온갖 이해관계가 얽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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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거짓된 삶일상/book 2024. 10. 7. 13:24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분별력 있는 그들의 머릿속과 지식으로 가득한 그들의 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파충류보다도 못한 믿을 수 없는 동물로 만들어버린 걸까.―p. 185~186 그날 로베르토는 꽃잎으로 사랑 점을 칠 때처럼 한 단어를 수없이 반복해서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죄책감’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기억만은 확실하다. 로베르토의 말을 들으니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로베르토는 죄책감의 의미를 바로잡고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죄책감이 흐트러진 존재의 조각들을 꿰어줄 바늘이라고 했다. 로베르토는 죄책감이 자기 스스로에 대한 날선 경각심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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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Bande à part)일상/film 2024. 9. 30. 21:50
오랜만에 보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Bande à part. 우리말로 하면 "동떨어진 무리" 정도가 아닐까 싶다. 머리도 식힐 겸 갑자기 영화를 한편 보고 싶던 날, 최신 영화보다는 오래된 흑백영화가 당겼다. 그래서 고른 것이 누벨바그. 장 뤽 고다르의 영화들이 대체로 난해하듯이, 역시 그러하다. 오딜, 프란스, 아르튀르라는 3명의 인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라는 소개는 없지만, 이들은 영어 수업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모종의 협잡을 꾸미기 시작한다. 루브르 박물관을 냅다 달리는 장면이나, 소란스러운 카페에서 1분간 정적을 흘려보내는 장면과 같은 영화적 실험들은 과 관련해 잘 알려진 사실들이지만, 꼭 이런 새로운 노력들이 아니더라도 전반적인 연출과 구성이 뛰어나다고 느꼈다. 불과 25일 간 촬영이 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