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의 부상은 전적으로 댜길레프가 주도한 현상이다. 그는 세련된 취향에 약간의 술책과 다양하고 폭넓은 경영 기술을 추가했다. 어떠한 원형이나 전범(典範)도 따르지 않았다. …댜길레프는 어떻게 그 일을 해냈을까? …그는 일단 시류에 편승하면 즉시 고삐를 빼앗아 손에 쥐었다. 또한 일정한 예산이나 이사회도 없이 사업을 하면서 극장 흥행주 역할을 마치 신처럼 수행했다. 그의 천재성은 그야말로 실용적이었다. 필요한 인재를 발견해 불러들이고, 그들을 유능하게 만들고, 과실을 따먹었다. 그의 권위가 없었다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p.18~19
…컬러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으로 대중적인 루트가 열리기 이전 시대에 댜길레프가 의뢰한 것들은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모더니즘 운동의 혁신적인 작품을 알리는 주요 진열창 역할을 했고, 그와 동시에 후에 일어날 극예술 기법과 설치 미술의 혁명에 길을 터주었다. 하지만 훨씬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발레 뤼스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에 도전했을 뿐 아니라 관객들 사이에 명백한 동성애적 하위문화를 조성하여 새로운 형태의 관능성을 제시했다. ―p.21
…러시아에서 발레는 런던과 파리에서는 꿈꿀 수조차 없는 엄청난 위엄을 누렸다. 국가 지원금이 넘쳐났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박스 오피스 수익을 걱정하지 않았다. 극장은 높은 수준을 엄격하게 유지했고, 무용수는 자신의 탁월함과 성실함에서 나온, 치열하고 거의 획일적이기까지 한 자신감을 동기 부여의 원천으로 삼았다. ―p.45
“그는 뜻한 바를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지 알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자극해 행동하게 만드는 법, 사람들을 이용하는 (또는 버리는) 법, 동기를 부여하거나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법, 게으름과 미루기에 굴복하여 모든 것을 관료화하고 방해하는 러시아의 관습을 돌파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요즘 말로 댜길레프는 대단히 훌륭한 경영자였다. ―p.63
…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댜길레프는 전시회에 전력을 다했다. 시각예술로 말하자면 그는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었다. 댜길레프는 반복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음악으로 방향을 틀었다. 러시아 음악 역시 파리가 아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분야였다. ―p.75
…이사도라 덩컨과 그녀가 맨발로 추는 그리스풍의 유희, 인디언 춤에 매혹된 또 다른 미국인 개척자 루스 세인트 데니스, 아크로바틱 선수처럼 유연한 스페인의 알다 모레노, 매력적으로 날갯짓하는 게이샤 출신의 하나코, 로댕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캄보디아 사원의 무희들이 있었다. 이런 새로운 춤들이 시장의 구미를 돋우었다. ―p.94
이때부터 발레 뤼스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이 엇갈림은 지금까지도 고급문화를 대하는 관객의 전형적인 반응으로 남아 있다. 다수파는 포킨의 발레 양식을 계속 갈망하면서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일관성, 성격 묘사, 환상과 현실의 구분을 중시하는 19세기의 접근 방식을 유지하고, 르네상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름다운 몸의 개념을 고수했다. 반면에 소수파는 규칙을 한계점 끝까지 변형시킨 작품에 호응하고 전통을 깨거나 뒤집는 새로운 형식을 추구했다. 다수파와 소수파의 열정이 일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p.132
…어떤 이는 천둥처럼 귀를 때리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불과 2년 후 서부 전선에서 터져나올 폭격의 전조가 들린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는 ‘선택된 처녀’가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자기희생의 독무를 추면서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 자비나 개별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르르 한곳으로 몰려가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소비에트의 집단주의를 미리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p.144
여름 휴가를 맞아 발레 뤼스의 무용수들이 흩어진 사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며칠 후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유럽의 불안정한 외교 체제는 무너지고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에 합류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시대(la belle époque)의 종말, 새로운 예술(art nouveau)의 종말, 예술세계(Mir iskusstva) 운동의 종말, 제국의 종말”이었다. ―p.161
러시아적이고 동양적인 영감을 거부하고, 고전적으로 교육받은 춤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통적인 연극 기법을 뛰어넘어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전쟁으로 시장이 파괴된 시대에 사실주의와 낭만주의를 거부하는 젊은 화가들에게 광고판을 제공해서 실험적인 예술을 펼쳐 보일 수 있게 하는 시기였다. …“댜길레프가 의뢰한 발레는 상업적인 가치를 확립하는 방식이었다. 하나는 예술에 관심이 있는 부유한 오피니언 리더 무리들 앞에서 일종의 샘플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가 인재를 물색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명성이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p.184~185
…몇 년 뒤인 1926년에 장 콕토는 예술이 광적인 속도로 변화하는 것을 늦추기 위해 “근본으로 돌아가라”라는 개념을 홍보하는 책을 발표했다. 콕토는 “달아난 말의 속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현명한 발언을 했다. 명료함, 손재주, 데생 실력을 존중하는 이른바 “견고한 우아함”과 “믿을 만한 형식”으로부터 예술적 양식이 너무 빨리, 너무 많은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p.222
1850년대에 통치자들이 새로운 도시 몬테카를로를 건설하기 전까지 모나코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이곳에서 라스베이거스식으로 규제를 줄이고, 고액의 판돈이 오가는 도박과 호화로운 관광을 제공하면서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p.233
…고전발레의 군무는 군대 열병식과 비슷하다. 니진스카는 기계에 매료된 구성주의적 경향 그리고 개인보다 집단을 강조하는 볼셰비키 사상의 측면에서 그 통일성을 재창조한다. 농민을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동일시한 이 작품에서 농민으로 분한 무용수들은 거칠고 무자비하며, 개성이 없고, 집단성이 강하다. ―p.235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여러 해 동안 댜길레프에게는 경쟁 상대가 없었다. 러시아에서 포장해 유럽에서 판 것(핵심은 포킨과 니진스키의 안무, 박스트와 브누아와 레리히의 무대 디자인,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사실상 단막 무용극이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구현한 것이었다. 단막 무용극은 유서 깊은 전통인 궁정 문화에서 출발했지만 연극과 시각예술 분야에서 이제 막 등장한 혁신으로부터 자양분을 얻고 있었다. ―p.274
…발레는 더 이상 미학적으로 계몽된 사람들과 특권층 사람들의 영역으로, 또는 단지 참신한 행위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발레는 더 광범위한 문화의 일부가 되어 절대적으로 숭배하거나 음악 비평가들의 매서운 판단에 갇히지 않고 독자적인 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제도적 인프라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벽돌 쌓기를 주도한 사람은 매우 다른 두 인물 필립 리처드슨과 시릴 보몬트였다. ―p.285
…사회 혁명이 정치적 신분을 뒤엎는 와중에도 미를 지향하는 인간의 정신은 그대로 보존됩니다. 반면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미학적인 문제로 동분서주할 시간이 없습니다. …현 세기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계 운동”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예술 운동”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자동차에 치이는 것보다 더 겁을 먹습니다. …예술의 불행은 모든 사람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전기 장치를 발명할 때 그 장치를 비평할 능력과 자격을 갖는 것은 전문가들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예술적 기계를 발명할 때 사람들은 예의 없이 그 엔진의 가장 섬세한 부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자기 멋대로 작동시키고 싶어 합니다. …쇼는 무엇보다 “이상”해야 합니다. 나는 처음으로 전등을 본 사람, 처음으로 전화기를 ㄹ통해 단어를 들은 사람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그려볼 수 있습니다. ―p.310~311
1938년 이후로 영국 발레는 추월에 성공하고 애국심을 자극하는 원천이 되었다. 영국 발레는 모든 사회 계층의 관객을 끌어들였고, 댜길레프와 드 바실이 집중해온 대도시 기반을 넘어섰다. 영국 발레를 이끈 주역은 세 명의 주목할 만한 여성이었다. 모나 잉글스비는 사업가인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인터내셔널 발레단’을 서립하고 자신이 직접 프리마 발레리나로 나서 고전 레퍼토리 위주로 공연했다. 마리 램버트는 작은 발레단을 이끌며 신작에 초점을 맞췄다. 니넷 디 밸루아의 빅웰스 발레단은 1941년에 새들러스 웰스 발레단으로 개명했다. ―p.354
…기억은 희미해지고, 취향은 변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발레는 책과 기록보다는 손과 눈으로 매우 섬세하게 전달되는 예술이므로 수많은 가는 실들이 끊어져나가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발레 뤼스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포탄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모든 것이 시작된 나라에서 날아왔다. …냉전이 격해지는 상황에서 우주 경쟁과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의 긴장된 저류에도 경쟁과 공격이 숨어 있었다. …처음에 러시아는 소비에트 발레를 앞세운 거센 공격으로 손쉽게 승리했다. 그들의 발레는 스탈린 시대의 거친 리얼리즘을 구현하고 댜길레프의 세련된 모더니즘 미학을 경멸했지만, 그 자체의 저속함을 초월할 정도로 아주 생경하고 대담하고 에너지가 흘러넘쳤다. 그건 영웅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날것의 발레, 모든 총포가 불을 뿜고 단 한 명의 인질도 남기지 않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p.366~367 니진스키와 누레예프 사이에 바빌레만큼 대중의 상상력을 강하게 흔든 남자 무용수는 없었다. 1940년대 후반의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바릴레는 이후 10여 년간 말런 브랜도와 제임스 딘이 미국 영화를 통해 소개한 고통스럽고 소외되고 불안한 내형적 성격을 충실히 구현했다. 그는 최고의 테크닉, 전율이 이는 활력, 극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p.382
…횃불은 이미 뉴욕으로 넘어갔다. 발란신의 경력이 정점에 있었고, 제롬 로빈스가 떠오르고 있었으며, 20세기 전반에 마사 그레이엄, 도리스 험프리, 루스 세인트 데니스 같은 무용수들이 개척한 “현대 무용” 운동이 동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발레 뤼스에서 유래한 무대들의 대부분이 색이 바래거나 낡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제는 너무 친숙하게 보였다. ―p.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