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것만은 확실했다. 공급망은 상품을 순환시키는 체계일 뿐 아니라 인간이 환경을 통제한다는, 내면 깊숙이 뿌리내린 의식의 원천이자 현대인의 삶을 하나로 묶는 흔치 않은 시스템이었다. 정부 불신, 언론에 대한 회의, 기업의 동기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찬 시대지만, 적어도 택배기사를 집 앞으로 오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은 믿을 수 있었다. 농장, 공장, 물류센터를 가정과 기업으로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끊기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p.21
우리는 아마존을, 치명적인 팬데믹 기간에 물류창고 직원들에게 마스크는 공급하지 못했지만 우주로 날아갈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억만장자 제프 베이조스가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구매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돈을 주고 사는 것은 확실함, 보장 그리고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떨어질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심이었다.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미스러운 조건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대가로 우리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편리함과 신뢰를 얻었다. ―p.22
하지만 내 편과 네 편이라는 편 가르기는 중요한 사실을 무시한 수사였다. 미국의 먹거리를 탈취한 것은 중국이 아니었다. 범죄가 저질러졌다면 그것은 내부 소행이었다. 미국의 기업 경영자들은 자국 근로자에게 중산층의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방법으로 중국 공장을 이용했다. 절감한 돈은 따로 숨겨두었다. ―p.43
그럼에도 다국적 기업은 중국에 대한 그들의 속셈이 노골적 이윤 추구로 비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중국에 탄압, 인권 침해, 노동 착취 등이 만연하다는 이야기는 평판을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재계와 정치권에 있는 그들의 협력자들은 중국과 무역을 확대하면 자유가 증진될 것이라는 이야기로 협상 조건의 프레이밍을 바꿨다. ―p.51
도요타는 글로벌 무대의 작은 기업에서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로 변신함과 동시에 이른바 린 생산(lean manufacturing)이라는 기치 아래 비즈니스를 바꿔놓은 세계적 흐름의 선두 주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경영 컨설턴트들은 기업 경영자가 도요타의 사고방식에 생산방식을 받아들이면 효율성을 엄청나게 높이고, 원가를 낮추고, 수익을 증대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쏟아냈다. ―p.84
하지만 가치 있는 여러 훌륭한 생각이 그러했듯, 적기공급생산방식도 결국 비열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이용되었다. 1980년대부터 컨설턴트들은 이 개념을 가로채 다른 모든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주주의 배만 불리는 근시안적 기업 경영을 정당화하는 기법으로 써먹었다. 오노가 명확하게 갈파했듯이, 뛰어난 개념도 해로운 목적에 악용될 수 있다. 오노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아이디어도 좋은 의도와 상관없이, 항상 처음 내놓은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p.86
…린 경영은 일반 근로자의 자기 통제권과 경제적 안정의 보장을 경영진에게 넘겨주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은 직원들을 언제든 필요하면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둠으로써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 그 대신 근로자들은 가계 예산의 확실성이 사라져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줄 능력을 잃게 된다. ―p.96
헨리 포드가 경고했듯이, 투자자 계층이 최고 자리를 차지하면서 기업은 상품 생산자나 서비스 제공자에서 주주를 만족시키는 조직으로 바뀌고 있었고, 주식은 제품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기업 경영자에게 재고 감축은 다른 목적으로 쓸 수 있는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돈을 린 경영을 도입한 탁월한 전략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에게 후한 보수를 지급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돈을 주주들에게 배당금 형태로 나눠줄 수도 있었고, 자사주를 취득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었다. ―p.100, 104
…자사주 매입 증가와 재고 감축은 서로 맞물려 돌아갔다. ―p.110
…컨테이너는 경영자 계층에게 자본주의의 성과를 노동자로부터 자신에게 이전하려고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새 도구를 선사했다. 컨테이너는 부두 노동자의 중요성을 떨어뜨려 화물을 싣고 내리는 데 필요한 사람 수를 줄였다. 이 때문에 항만노조의 힘이 약해져 임금 인상과 일자리 보호에 필요한 교섭력이 떨어졌다. ―p.131
“매클레인의 기본적 통찰은 해운업이란 배를 운항하는 것이 아니라 화물을 옮기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오늘날에는 당연한 말로 받아들여지지만 1950년대에는 상당히 과격한 생각이었다. 매클레인은 화물 운송 비용을 줄이려면 철제 상자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화물 처리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항구, 선박, 크레인, 보관 시설, 화물차, 기차, 운송업자의 업무 처리 방식 등 화물 운송 시스템의 모든 부분이 바뀌어야 했다.” ―p.136~137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이 백악관의 주인이 되자 기업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들은 광범위한 연방 규제를 철폐하는 데 성공했다. 로비스트들은 냉전과 소련식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이용해 규제 완화야말로 미국식 자유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며 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들은 가격 통제, 독점금지법 집행, 담합 금지 등을 국가가 주도하는 권위주의의 덫으로 묘사했다. ―p.151
공장에서부터 식당, 소매업체에 이르기까지 사업체들은 운송 지연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상품이나 재료를 추가로 넉넉히 주문했다. 오랫동안 대차대조표를 개선하는 적기공급생산방식의 힘에 지배당해 왔던 기업들도 갑자기 필요 이상의 부품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수요 증가의 순환고리를 볼 수 있다. 사업체들이 창고를 채우려고 경쟁할수록 공급망에 가해지는 압박은 강해지고, 이에 다라 운송이 지연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게 되면 물건을 더 많이 주문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p.210
하지만 공급망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정상 상태(Normalcy)라는 단어가 더는 적용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집 안에 갇히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자상거래의 부상이 가속화되었다. 아마존에서 한 번도 물건을 구매해 본 적 없는 사람이 구매를 시도해 보고는 편리함을 깨닫게 되었다. …팬데믹이 사라진 후에도 이런 습관 중 일부는 계속 남아 있을 터였다. ―p.221
“미국에서는 이것을 셰이프업(shape-up)이라고 했다. 호주에서는 픽업(pick-up)이라고 했다. 영국 사람들은 여기에 스크램블(scramble)이라는 조금 더 묘사적인 이름을 붙였다. 대부분 지역에서 하루 일거리를 얻는 이 과정에서 애원, 아첨, 사례금 등이 수반되었다. ―p.224
지난 70년 동안 미국의 사용자들은 로비 공세, 법원 판결, 규칙 제정, 강압적 대처 등으로 노동조합을 약화해 왔다. 이들은 정규직보다는 파트타임 근로자나 임시직 근로자를 강조하는 채용 제도를 도입해 노동조합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노동조합 스스로 기술 산업 같은 신흥 산업에서 노동자를 조직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상장 기업 최고경영자들의 보수가 하늘 높이 치솟는 동안 노동조합의 힘은 약화 일로를 걸어왔다. 노조 가입 비율이 최고치에 근접했던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최고경영자의 평균 모수는 일반 근로자의약 20배였다. 그런 CEO의 보수가 2021년에는 일반 근로자 연봉의 거의 400배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불평등의 심화는 공동체를 괴롭히는 결핍이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믿음의 붕괴 등과 가은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노동자들의 힘이 사라짐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을 납세자에게 전가했다. ―p.233~235
무역 자유화, 이주민 유입, 컨테이너화, 자동화 등은 모두 일관된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였다. 그 목표는 노동자에게 돌아갈 돈을 공급망을 장악한 다국적 기업에 이전하는 것이었다. ―p.240~241
적기공급생산방식의 무자비한 효율성이 오랫동안 지배해 온 공급망의 더러운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공급망은 대부분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시간은 무한할 뿐 아니라 가치가 없다는 듯이 대했다. ―p.246
주주 배당금과 근로자 복지는 제로섬 경쟁 관계였으므로 철도의 위험성을 줄이는 데 들어가는 비용 지출이 제한되었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제동수였다. ―p.276
“제정신을 가진 제조업자라면 가장 값싼 재료만 구매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노동의 청산’이라든가 임금 삭감으로 국가에 돌아갈 이익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듣게 되는 것일까? 그래봤자 구매력 저하와 내수 시장 축소만 초래할 터인데 말이다.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지 못할 만큼 어설프게 운영된다면 산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금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은 대부분 임금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들의 생활비 규모, 즉 임금 수준이 이 나라의 번영을 결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포드가 고임금을 지급할 돈이 있었던 것은 적절한 가격대의 승용차 시장을 독점적으로 장악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드사의 후한 임금은 주주에게 돌아갈 투자 수익을 희생한 대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속해서 회사의 수익성은 유지할 수 있게 한 수단이었다. ―p.305~307
이들은 팬데믹으로 원자재 조달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이득을 볼 수 있는 완벽한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상품 부족과 공포와 비극을 폭리로 취할 기회로 삼아 제품 가격을 인상함으로써 기록적인 수익을 올렸다. 이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미국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육류 산업이었다. ―p.344
미국 경제를 바꿔놓은 규제 완화의 무결을 처음 일으킨 사람은 레이건이 아니었다. 구분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미 카터가 그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규제 완화를 극적으로 진전시킨 사람은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은 정부를 육중한 몸짓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며 낭비되는 세금을 마음껏 포식하는 짐승으로 묘사해 악마화했다. 그러면서 연방 권력을 자유 기업의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부터 미국을 구해내겠노라고 다짐했다. ―p.373~374
금전적 이익이 거의 모든 생산 시장의 형태를 결정했다. 투자자 계층은 효율성을 기준으로 글로벌 생산망과 유통망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 효유성은 그 무엇보다, 설령 신뢰성이 훼손된다고 해도 이윤을 중요시하는 변종 효율성이었다. 비용 절감의 강박에 시달리던 기업은 제품 생산을 해외로 이전했다. 이와 동시에 적기공급생산방식과 린 생산은 재고 감축을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문제가 발생할 완벽한 조건이 만들어졌다. 규모에 대한 무절제한 찬양은 독점기업가에게 한때는 경쟁이 치열했던 시장을 장악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경제는 일단 충격이 발생하면 물품 부족과 가격 인상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체질로 바뀌었다. ―p.385
워커와 바커가 보기에 중국의 제조업에는 사실상 퇴출 장벽이 있었다. ‘생산 거점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그래, 해볼 테면 해봐’라는 느낌이었다. 중국을 글로벌 제조업의 중심으로 만든 바로 그 힘이 글로벌 제조업의 중심으로서 지위를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p.403
이런 모든 걱정에는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었다. 미국의 산업을 되살리려는 프로젝트를 위해 국제 무역의 규칙을 희생시킴으로써 우리가 맞이할 결과를 걱정할 이유도 충분했다. 하지만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 무역 시스템과 중국 중심 세계화에 대한 수십 년간의 믿음이 더는 방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컴퓨터 칩을 구걸하거나 팬데믹 와중에 의료 기기를 구하지 못해 난리를 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국제 무역 규범은 기후변화를 앞당기는 환경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p.414~415
세계 경제가 재편되는 것은 운임 때문이 아니었다. 생산이 아시아에 집중됨으로써 생긴 위험성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가 다시 두 진영으로 갈라질 가능성이 커졌을 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전 세계 여러 기업은 자연재해, 기후변화, 또 다른 팬데믹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경우에 받게 될 영향을 다시 계산하고 있었다. 학자들은 탈세계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닌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p.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