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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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4호선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4. 10. 27. 12:08
납덩이 같은 피로함을 느꼈던 하루, 저작권법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간선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목젖이 보일 만큼 고개를 젖히고 잠이 든 줄도 몰랐던 하루, 잠에 취해 있다가도 내려야 할 정류장에 가까워지면 정신이 번쩍 드는 나의 귀소본능은 가끔씩 놀랍기까지 하다. 몇 주간 전 직장의 동기, 군대 동기, 대학 후배까지 평소에 없는 저녁 약속까지 잡고, 심지어는 휴가를 걸어놓고 나와서 일을 하는 나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당위(Sollen)를 뒤집어 씌우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어느덧 내 몸은 이런 당위를 견디지 못하고 종종 깊은 휴면에 빠진다. 시청 앞에서 남대문 시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가을치고는 따듯한 햇살이 충일했다. 오래된 카메라 가게들과, 이곳의 명물이 된 호떡집을 지나 내가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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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 qui nous lie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4. 9. 16. 10:58
늘 그렇듯 요즘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올 하반기에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강의를 하나 듣고 있고, 저작권법 수업을 듣고 있다. 여기에 더해 선형대수 수업을 듣고 있으니, 굉장한 지적 자극이 되면서도 내가 이걸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싶을만큼 벅차다. 사실 이 세 분과는 서로 접점이랄 게 없지만, 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는 하나씩 연결고리가 있는 것들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요즘 그렇게 생각을 한다. 때로는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기분도 든다. 나이가 들면서 포기할 것은 포기한 데서 오는 만족감인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20대의 그 어두운 터널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아득하다 못해 너무 까마득한 옛일처럼 여겨져 지금의 삶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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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매미울음을 들으며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4. 8. 20. 17:55
올해 들어 날씨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무더위도 아니고 기습적인 호우도 아니고 바로 매미의 변화 때문이다. 이번 여름 유난히 길바닥 위로 죽은 매미가 심심찮게 보였던 것. 날아다니는 매미를 땅에서 발견한다는 것도 기이한데, 작년까지만 해도 보지 못한 광경이라 생경하기까지 하다. 뙤약볕을 받아 바싹 메마른 매미를 보며 안타까움이 들었던 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5~6년의 시간을 어둠 속에서 지낸 시간이 덧없을 뿐만 아니라, 표독스런 햇살이 그런 무상함을 더욱 적나라하게 들춰보였기 때문이다. 한때는 도심지역의 밝은 불빛으로 인해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매미울음이 소음공해로 인식되어 사회적으로 문제시된 적이 있다. 원인 제공을 한 건 바로 우리 자신일 텐데 책임주체를 뒤바꾸는 건 참으로 손쉬운 일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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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딘 시간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4. 6. 19. 11:37
출장중 남기는 일기. 나는 지금 부산 해운대에 와 있다. 불과 반년이 안된 사이 이뤄진 두 번째 부산 방문. 지난번 당일치기로 부산을 찾았을 때는 도시구경을 엄두낼 수 없었지만, 이번 일정에서는 다행히도 다른 지역을 같이 둘러보는 긴 일정으로 오게 되면서 바다를 구경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부산은 여행으로도 업무로도 여러 차례 와서 이제는 몇 번 왔었는지 헤아리기도 어렵지만, 매번 보는 부산의 풍경은 그때마다 달라져 있고 해운대는 그 변화가 더 극적이다. 경쟁하듯이 올라가는 마천루들과 그 사이를 누비는 각국의 외국인들. 거리에 거대하게 들어선 고급상점들을 보면서 기시감과 함께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의 눈에는 이 도시가 어떻게 새롭게 비칠지 궁금하다. 내 일상에는 많은 변화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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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해찰주제 없는 글/印 2024. 6. 3. 11:50
빨간 날짜가 많은 5월, 하루 더 휴가를 보태어 푹 쉬기로 했다. 이런 때 어디 길게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좋으련만 여행 준비를 위해 떨어야 하는 부지런함마저 부담스런 요즈음이다. 사실 5월에 장기휴가를 써서 가족휴가를 가려고 작년부터 계획을 해오긴 했었다. 해가 바뀌면서 생각지 않은 새로운 업무들이 할당되었고, 나름대로 그 업무에 몰입하게 되어 자연스레 휴가 계획을 접게 되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편히 쉬는 것보다 일하는 편이 낫다.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도 무념무상으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독서라든가, 어학공부라든가 꼭 무언가를 한다. 물론 그런 것들은 일이라기보다는 휴식으로 여겨져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휴식이라고 하기에는 적잖이 집중과 끈기를 요하는 일이니, 워라밸이 강조되는 요즈음이라지만 직장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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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4. 5. 13. 11:31
카페를 나서 만리재 고갯길을 내려가며 불현듯 평소에는 가보지 않던 길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때마침 카메라가 있는 날이었다. 하늘은 창창하고 봄바람은 산뜻하다. 그리고 서울로에 올라서면서 눅진한 여름 공기를 예감한다. 이름조차 생소하고 모양새조차 서울에서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아담한 나무들이 좌우 번갈아가며 산책로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푸른 오솔길(Coulée verte). 서울로 7017의 모티브가 된 파리의 쿨레 베르트(Coulée verte)를 산책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주 느린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만리재 고개에서 흘러내려오는 옛 고가도로는 경사를 오르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어느새 서울역이 발아래 보이는 높이로 나를 이끈다. 나는 한글로 된 나무의 이름과 학명(學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