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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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出張)주제 없는 글/印 2023. 5. 12. 18:15
출장을 다니며 좋은 경치를 구경해도 결국 드는 생각은 여행이란 내 돈 주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 내 옆에 있던 K 팀장의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곧바로 수긍했는데, 처음 가는 출장이 아무리 설렌다 하더라도 장거리 운전을 하고 익숙치 않은 길을 다니다보면 지치게 마련이다. 출장을 가지 않았더라면 사무실에서 했어야 할 업무 전화들은 여지 없이 걸려 온다. 결국 업무의 연장선상인 것이다. 그래도 잡학다식한 K 팀장과의 동행은 그렇지 않으면 심심했을 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부산과 거제를 거쳐 통영에 왔을 때 비는 시간을 이용해 잠시 한산도에 다녀왔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처음으로 학익진 전법을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작전이 구상되고 훈련이 이뤄졌던 곳이 바로 제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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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鐵原): 백마고지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3. 4. 29. 12:20
철원은 멀지 않았다. 나는 최근 우연한 기회에 DMZ에 걸쳐 있는 열 개 지자체에서 DMZ 투어가 열리는 것을 보고, 가장 적당한 곳을 고르다가 집에서 가장 가기에 편리한 철원을 택했다. 철원 코스는 백마고지뿐만아니라 전사자 유해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화살고지도 둘러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간 시점에는 작년 여름 수해로 인해 화살고지를 잇는 비마교가 유실되면서 화살고지까지 둘러볼 수는 없었다. 도착해서 가장 먼저 둘러보는 곳은 백마고지 전적지다. 전쟁 당시 이곳에서는 10일간 12번의 쟁탈전이 벌어져 7번 주인이 바뀌었고, 국군과 미군, 프랑스군이 참전했다. 전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물론 수많은 태극기가 수놓은 오르막길과 그 끝에 우뚝 선 거대한 태극기다. 합장(合掌)한 형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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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와 바나나주스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3. 4. 26. 03:03
지금 일하는 곳의 장점은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을 부담 없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광화문의 서점이라든가 신촌의 단골 샌드위치 가게라든가, 좋아하는 라면집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가까이에 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 꽤 오랫동안 일을 했던 나로서는 이런 환경이 감사할 따름이다. 하루는 아무 점심 약속이 없던 날 신촌의 샌드위치 가게를 찾았다. 나를 알아본 아주머니는 반갑게 인사한다. 일은 할 만한지, 요즘 장사는 어떤지 등등을 이야기하신다. 나는 샌드위치 하나와 아몬드가 가미된 바나나주스를 하나 주문했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손님이 늘어서 코로나라는 긴 터널을 지나오신 아주머니의 얼굴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같은 날 샛강을 건너 여의도로 향하는 길에 당산 방면으로 넘어가는 석양은 한여름 오렌지빛을 발한다.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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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여의도, 신림주제 없는 글/印 2023. 4. 25. 19:22
# 필름 카메라를 집어든 동기는 뚜렷하지 않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넷으로 필름 카메라를 찾아보던 중, 30년도 훌쩍 넘은 아버지의 니콘 카메라가 떠올랐다. 나는 보는 즉시 그 카메라가 마음에 들었고, 필름 두 개를 주문했다. 필름 하나에 이만 원 돈이라니 필름 카메라를 쓰던 시절 삼천 원이면 충분히 필름을 구하던 때와 비교하면 비현실적인 가격이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를 찍는 동안 이 카메라가 더 좋아졌는데, 셔터스피드와 조리개, 줌을 하나하나 조절하고 필름을 아껴가며 사진을 남기는 맛이 있었다. 최고와 최대만을 눈여겨보며 숨가쁘게 살아온 내가 다른 호흡 방법을 찾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나는 36장 필름에 파주와 여의도, 신림에서 사진을 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살아남은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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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은 피고 지고주제 없는 글/印 2023. 4. 11. 03:13
올 봄에는 목련보다도 벚꽃이 더 빨리 폈다. 그래서인지 땅바닥에 어수선하게 떨어진 두꺼운 목련잎이 더욱 처연해 보인다. 자신을 채 내보이기도 전에 주위의 변화에 휩쓸려버린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이 탐스럽고 도타운 꽃잎은 다른 나무에서 떨어진 것들보다도 목직해 보이는 까닭에 이 세상의 중력을 더 많이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슷썬 생감자를 닮기도 한 새하얀 목련잎에서 향기와 함께 알싸한 냄새가 올라온다. 커다란 꽃잎이 빨아들인 봄의 피. 낙화함으로써 생채기가 난 것처럼 선혈 냄새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한 송이 목련 잎은 가장자리부터 피딱지처럼 메말라감으로써 이제는 여름으로 아물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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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세요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3. 4. 8. 12:31
# 올해는 유난히 벚꽃 볼 일이 많았다. 하루는 부모님을 모시고 양평 근교의 한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리옹식 음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레스토랑은 북한강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엄마는 종종 색깔 있는 옷을 입고 나서는 이런 나들이를 좋아하시곤 한다. 코스 요리 대신 부모님이 하나씩 양껏 맛보실 수 있도록 단품으로 된 뵈프 부르기뇽, 꺄나흐 콩피, 라자냐 등을 주문했다. 이날은 벚꽃을 구경하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평소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두 시간 좀 안 되게 걸렸는데, 사장님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더니 부모님과 조심히 오라고 했고 식후에는 예정에 없던 마카롱까지 준비해주셨다. 부모님의 건강을 바라며 모처럼만에 가족간의 시간을 보냈다. # 귀여리의 벚꽃은 만개하기 전이었다. 북한강변을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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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말 걷기의 기록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3. 3. 25. 12:00
벚꽃이 3월부터 폈던가, 일하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벚꽃이 만개했다. 재작년에는 벚꽃을 학교에서 보았고, 작년에는 프랑스에 있느라 벚꽃을 보지 못하고 봄을 넘겼다. 새로운 직장 생활에 적응도 필요했지만 집안의 크고 작은 경조사를 챙기느라 주말에도 쉬지를 못해 연초 몸이 성하질 않았다. 이제 봄이 오고 벚꽃이 핌으로써 시간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만, 그마저도 3월부터 서두르는 꽃망울들을 보니 마음이 벌써 쫓기는 듯하다. "모든 여행은 정확히 그 속도만큼 따분해진다." 최근 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루소는 타고난 산책가였다고 한다. 5G를 쓰고 우주 여행이 시작된 속도의 시대에 걷기라는 행위는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해 가급적 대체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다만 앞선 존 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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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호수주제 없는 글/印 2022. 12. 26. 22:02
# 한번은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호수같은 친구였다고. 바다같이 넓은 마음, 바람처럼 변덕스런 마음, 해바라기처럼 한결같은 마음 등등 귀에 익을 법한 하고많은 표현을 제쳐두고 나를 '호수'에 빗댄 친구의 말을 들으면 속으로 조금 비웃었던 것 같다. 호수라는 낱말 뒤에 친구가 붙인 형용사는 고요함, 흔들리지 않음, 늘 그 자리에 있음 따위의 것들이었고,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호수같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 안에는 항상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오리가 있었다. 그 회오리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거셌고 내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그래도 그가 보기에 내가 호수같았다면, 어느 누군가에게는 콩코드 호수가 되어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 올해는 가을이 길어진 만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