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하세요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3. 4. 8. 12:31
# 올해는 유난히 벚꽃 볼 일이 많았다. 하루는 부모님을 모시고 양평 근교의 한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리옹식 음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레스토랑은 북한강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엄마는 종종 색깔 있는 옷을 입고 나서는 이런 나들이를 좋아하시곤 한다. 코스 요리 대신 부모님이 하나씩 양껏 맛보실 수 있도록 단품으로 된 뵈프 부르기뇽, 꺄나흐 콩피, 라자냐 등을 주문했다. 이날은 벚꽃을 구경하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평소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두 시간 좀 안 되게 걸렸는데, 사장님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더니 부모님과 조심히 오라고 했고 식후에는 예정에 없던 마카롱까지 준비해주셨다. 부모님의 건강을 바라며 모처럼만에 가족간의 시간을 보냈다.
# 귀여리의 벚꽃은 만개하기 전이었다. 북한강변을 따라 내려올 때도, 그리고 남한강과 나란히 달릴 때도 국도를 수놓은 벚꽃은 모두 만개했더랬다. 내가 사는 곳에 이렇게 많은 벚나무가 있었나 싶을 만큼 많은 꽃. 살랑이는 꽃송이들이 어린이의 얼굴에 떠오른 엷은 홍조처럼 공중에서 휘황하게 일렁인다. 오직 귀여리의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했다는 게 나를 낙담시킨다. 풍채 좋은 벚나무에 꽃이 만개한 풍경을 머릿 속에 그리고 또 그려볼 뿐이다.
# 강아지는 색을 모른다. 정확히는 나만큼 다채로운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런 우리 강아지는 제 자신이 벚꽃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 줄도 모른다. 강아지는 냄새로써 세상을 분별한다. 요염한 빛을 풍기는 꽃들 사이에서도 강아지는 코를 박고 연신 땅만 들쑤시고 다닌다. 그런 우리 강아지를 귀엽게 땅강아지라고도 부른다.
# 30대 중반이 되면서 시간의 중력을 마음이 아닌 몸으로 더 느낀다. 같은 일을 해도 예전보다 더 빨리 피로해지고, 피로를 회복하는 데도 더뎌진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부모님이 대단하다고 느낀다. 지금보다 여건이 더 안 좋던 시절에 부모님은 어떤 30대를 보내셨을 것이며, 노년에 접어든 그 분들의 체력은 얼마나 쇠하셨을까. 식사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마카롱이 담긴 접시가 나왔을 때, 글귀를 하나 집어 넣어달라고 전해 두었다. "건강하세요"귀여리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 가족은 물안개공원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토산품인 싱그러운 새싹채소 두 곽과 샛노란 들기름 한 병을 샀다. 공원에 도착해 벤치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며 물에서 갓 삶아올린 옥수수를 하나씩 먹는다. 유난히 섣부른 봄기운으로 결혼으로 인해 남겨진 가족의 빈자리를 채우며 봄나들이를 마친다.
# 강아지는 나보다 색을 모른다. 강아지는 나보다 냄새를 더 많이 안다. 어쩌면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색깔들이라는 것도 착각인지 모른다. 내가 보지 못하는 색들도 있다. 눈 앞에 색깔이 보여도 색깔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색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름 모를 꽃들, 눈치 채지 못한 표정의 변화, 예전과 달라진 주변의 풍광들. 오늘의 시간은 흘러가고 오늘의 세계도 조금은 변했을 것이다.
'주제 없는 글 >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이 이야기 (0) 2023.08.10 샌드위치와 바나나주스 (1) 2023.04.26 3월말 걷기의 기록 (0) 2023.03.25 짧은 만남에 대한 기록 (0) 2022.12.21 별똥별 (0) 202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