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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만남에 대한 기록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2. 12. 21. 11:27
# 학부 시절 교내 박물관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약속장소인 강남역은 잘 정돈된 도로에도 불구하고 항상 인파로 붐벼서 이곳에서는 방향감각을 곧잘 잃곤 한다. 역에 늦게 도착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역 안에서 우왕좌왕하다 5분 정도 약속장소에 늦었다.
모임이라고는 하지만 셋이서 만난 조촐한 만남이었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학생 때의 얼굴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더 반가웠다. 다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각자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살아가고 있었다니 신기하다. 그 중 O 형은 작년 말에 짧게 얼굴을 보긴 했지만, S 형은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한번 모였었으니 8~9년만에 보는 얼굴들인데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친숙하다.
국밥집에서 술을 마시며 당시 같이 일했었던 친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얘기하다가 아예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S 형이 주저 없이 발신 버튼을 누른다. H, Y, C… 다행히 모두 늦은 저녁에 연락이 닿았고, 흘러버린 시간만큼 달라진 근황을 확인하며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학부 때로 되돌아간 것처럼 고민 없이 웃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결혼을 했고 누군가는 할 예정이고, 기업, 법무법인, 관청, 학교에 이르기까지 일하고 있는 직역도 모두가 다르다. 그럼에도 대학 시절의 공통된 기억 하나로 서로에게 스스럼 없을 수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었다.
# 며칠 전 C의 제안으로 종로의 한 프랑스인 모임에 다녀왔다. 영화를 관람하고 끝난 뒤에는 자유롭게 토론하거나 수다를 떠는 모임이 이어졌다. 부끄럽지만 나는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이런 종류의 모임(soirée)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프랑스가 아닌 한국에서도 이런 사교적인 모임을 굳이 찾아가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프랑스에서도 가보지 않았던 프랑스인들의 모임을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가보는 것이었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 와인에 저녁 식사를 했다. 내 주위로 쉼없이 오가는 프랑스어 때문에 정말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프랑스어를 듣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곤 했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프랑스어에 노출될 일이 줄어들면서 이렇게 빠른 호흡의 프랑스어를 접하기도 오랜만이었다. 대화를 소화하기 벅찬 만큼 대화에 비집고 들어가는 건 더 힘든 일이었다. C는 내가 놓친 얘기를 설명해주며 모임에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프랑스 사람들이 허물 없이 이야기하는 공간에 함께 있다는 건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정치, 연애, 영화, 돈 관리에 대해서 말하며 털털하게 웃고, 내게 재미있는 프랑스어 표현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경험이 좋은 까닭은 단순히 구글 번역기로 몇 초면 알 수 있는 언어의 기계적인 차이가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다른 관점을 날 것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10대와 20대에 일본어를 배우며 한번 경험했고, 이제는 프랑스어를 배우며 또 다시 느끼고 있다.
# 연말 졸업시점에 쓰려고 올 여름 찍어둔 증명사진이 영 시원찮아서, 최근 증명사진을 하나 더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 여름 여의도에서 그런대로 유명하다는 사진관을 찾아갔지만, 카메라 앞에 앉으면 경직되는 내 얼굴 때문인지, 후처리가 과하게 들어가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진이 이상하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 때문인지 증명사진이 잘못 나왔다고 느끼고 있었다. 사실은 같은 사진관에서 3년 전쯤 찍었던 증명사진은 불만 없이 요긴하게 썼었으니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여하간 마침 새로운 사진이 필요해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아주 오래 전 여권사진을 찍기 위해 급히 들렀던 광화문의 작은 사진관을 가보기로 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증명사진 가운데 여권사진이 가장 잘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의 풋풋한 얼굴이 남아 있기도 하고, 정장 차림이 아닌 유일한 증명사진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다. 평소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진을 남겨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한참 공을 들이는 게 우스꽝스럽다. 다만 예전의 사진관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 기억 속 사진관은 분명 K빌딩의 지하상가에 있었는데, K빌딩에는 더 이상 사진관이 없었고 같은 이름의 사진관이 근처의 다른 빌딩에 있어서 일단은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미국 여행을 가려고 여권을 만들었던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7년 전쯤 이 사진관을 찾았던 것 같다. 사진 촬영을 끝내고 인화 준비를 하는 아저씨에게 여쭤보니 건물 재건축으로 인해 지금의 사진관으로 옮겨 왔다고 했다. K빌딩에 있을 때는 사진관에 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퍽 썰렁하다. 탁상 유리 아래에 가지런히 정렬된 유명인들의 증명사진에서 7년 전 사진관의 흔적을 간신히 찾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23년 동안 광화문에서 사진 일을 하셨다는 초로의 아저씨는 원치 않게 일하는 장소를 옮기면서 은퇴도 없이 일을 하는 상황이 못내 못마땅하신 듯했고, 그런 아저씨와 대화하다보니 손님 없는 사진관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아저씨는 내게 7년 사이에 잊지 않고 찾아주어서 고맙다고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반명함 사진을 자그마한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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