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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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리(Écrits)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4. 3. 3. 10:21
작년 세밑에 주문한 책 두 권이 도착했다. 1966년 숴이(Seuil) 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온 자크 라캉의 「에크리」와 2007년 영어로 완역된 브루스 핑크(Bruce Fink)의 「에크리」가 그것이다. 먼저 영역본이 도착했고, 프랑스어 원본이 도착하는 데는 시간도 두 배, 구매가격도 두 배가 들었다. 원래는 우리말로 번역된 「에크리」를 읽어보려다가, 한국어와 프랑스어가 서로 너무 다르기도 하고 원본을 읽으며 언어 공부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큰 맘 먹고 책을 "질렀다." 조금 읽어보면 영어가 프랑스어보다 잘 읽히는 건 어쩔 수 없다. 먼저 영어로 된 책을 읽고 맥락을 이해한 다음 프랑스어 책을 읽는 식인데, 대체로 어순이 비슷한 것 같다가도 낱말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른 경우가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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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릭스(Astérix)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3. 7. 8. 12:03
외국어 공부를 취미로 하지만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요새 느끼는 건 내 뇌의 용량도 한계치에 다다랐나 하는 생각이다. 내 뇌에도 언어에 할당된 리소스가 한정되어 있을 텐데, 프랑스어를 배우기 전까지 그 리소스를 쓸 만큼 쓴 모양이구나, 하고. 얼마 전 안동에서 일본인 친구를 만났던 걸 떠올려보면, 그리고 일본어를 까먹지 않았던 걸 보면 배운 것에 대한 기억력이 녹슬진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더 주워담을 용량은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프랑스어에 대한 미련이 남아 요새는 Little Talk Slow French라는 팟캐스트를 듣기도 하고, 지난 아멜리에 각본을 채 끝내기도 전에 프랑스 만화책(Bandes Dessinées)의 국가대표격인 를 두어권 샀다. 원래는 세계 일주를 테마로한 벨기에 만화 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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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읽기 (feat. <아멜리에>)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2. 10. 10. 23:23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아르튀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 자크 프레베르의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스테판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대형서점의 서가 앞에 서서 책들을 한참 뒤적이다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무지 프랑스어를 연습할 만한 마땅한 시집은 보이지 않고, 올해 말 내가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건 독서가 아닌 논문 쓰기가 아니었던가. 나는 짧은 문장으로 완성되는 시(詩)라면 프랑스어를 간단히 연습하기에 수월할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우리말과 프랑스어 원문이 함께 실린 시집의 문장들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시에 쓰인 프랑스어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한참을 서가 앞에서 서성이다가 빈손으로 서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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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s, DELF B2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1. 4. 9. 18:01
지난 3월에 봤던 DELF B2의 결과가 나왔다. 작년 5월에 치른 시험에서 듣기에 eliminé가 뜬 뒤로 여세를 몰아 9월에 한 번 더 시험을 보려고 했지만, 코로나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연기도 아닌 시험 취소 결정이 났다. 11월 시험을 응시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시간을 어영부영 흘려보내고 나니 이대로 프랑스어 시험을 못 보나 보다 싶었다. 그리고 연초에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단지 공부했던 게 아깝다는 생각에서 1년여 지난 시점에 한 번 더 시험에 응시해보기로 했다. 어쨌든 듣기만 보완하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듣기에 최대한 집중을 했었고, 합격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다만 관심이 있었던 건 점수의 내용이었는데, 합격자 평균이 60점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평균을 기준으로 어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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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가도 모르겠는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1. 2. 21. 10:07
알지 않다. 내가 배웠던 여러 외국어에서는 ‘모른다’는 표현으로 보통 ‘알지 않다’는 부정형을 쓴다. 知っていません。Je sais pas. No lo sé. 같은 식이다. (모두 ‘모른다’는 표현) '몰라', '모른다'는 표현을 따로 쓰는 우리말은 이런 점에서 특이하다. 우리말에서는 '알지 않아'라는 말을 평서문으로 쓰지 않는다. (물론 반문할 때는 '알잖아?', '알지 않아?'하고 쓰기는 한다) 이전 포스팅에서 ‘없다’라는 말을 표현하기 위해 ‘있지 않다(not be, 不在, no ser, nicht sein, いない)’는 표현을 쓰던 여러 외국어 사례들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그만큼 ‘없다’와 ‘모르다’는 우리말에 있는 독특한 표현이다. 알다 ≠ 모르다 知る、分かる ≠ 知らない、分からない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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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짧은 건 대어 보아야 안다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0. 6. 19. 00:02
눈 코 입 目(め;메) 鼻(はな;하나) 口(くち;쿠찌)피 땀 눈물 血(ち;치) 汗(あせ;아세) 涙(なみだ;나미다)몸 마음 体(からだ;카라다) 心(こころ;코코로) 대부분의 일본어 표현은 우리말보다 길다. 그래서 똑같은 3분짜리 곡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사의 의미는 우리말이 더 풍부한 편이다. 같은 박자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음절의 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곡을 우리나라에 리메이크하는 경우, 원곡의 가사까지 살린다고 하면 어딘가 휑하니 남는 리듬이 생긴다. 반대로 우리나라 곡을 일본에 소개할 때는, 표현을 축약하거나 의미 전달이 반드시 필요한 단어는 어쩔 수 없이 한 박자에 끼워맞추는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어느 방향으로 번안을 하든 완벽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뜻이 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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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miné. DELF B2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0. 6. 17. 01:02
"종지부를 찍다!" 이로써 상반기의 크고 작은 이벤트들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아니, 기대했던 이벤트는 없었다. 연초부터 심혈을 기울여 계획하고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좌초되었다. 4월에서 5월에 이르는 꼬박 2개월간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연거푸 탈락의 고배를 마셨을 때, 그리고 마지막 고배까지 들이켰을 때, 내심 속상함이나 아쉬움보다는 후련한 마음이 컸다. 내가 봐도 완벽한 준비는 아니었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끝까지 진력(盡力)했고, 에너지가 고갈되는 와중에도 마냥 즐거웠기 때문이다. 평소의 나 같지 않은 낙관성이 긍정적인 결과까지 담보하지 않을까 확신할 정도였다. 이처럼 일종의 환각상태를 거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때는, 그야말로 고배라도 덥석 집어들고 싶을 만큼 목이 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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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오해와 사소한 이해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0. 4. 3. 22:26
요즈음 야후 재팬을 자주 찾는다. 모리토모(森友) 사학 스캔들이 회자되던 때도 안 들어가던 야후 재팬을 찾는 건 코로나 때문이다. 원래 댓글 같은 건 읽지 않는 편인데, 요새는 야후 재팬에서 댓글까지 챙겨본다^-^;;(댓글이 의외로 고퀄임;;) 코로나 때문에 야후 재팬을 예의주시하는 이유는, 나름 역내 경제규모가 큰 G7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만이 잠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각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물론 G7 중에는 캐나다의 감염속도 역시 유럽국가들에 비해 그 확산세가 약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안 되는 나라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의 확진자가 나왔다는 것부터가 코로나로 인해 상당히 곤혹을 치르고 있는 상황인 것 같다. 그런데 일본은 유럽이나 미국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