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본 읽기 (feat. <아멜리에>)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2. 10. 10. 23:23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아르튀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 자크 프레베르의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스테판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대형서점의 서가 앞에 서서 책들을 한참 뒤적이다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무지 프랑스어를 연습할 만한 마땅한 시집은 보이지 않고, 올해 말 내가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건 독서가 아닌 논문 쓰기가 아니었던가. 나는 짧은 문장으로 완성되는 시(詩)라면 프랑스어를 간단히 연습하기에 수월할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우리말과 프랑스어 원문이 함께 실린 시집의 문장들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시에 쓰인 프랑스어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한참을 서가 앞에서 서성이다가 빈손으로 서점을 빠져나왔다. 더 이상의 시간을 허비하진 말자며.
별 수 없겠구나 하고 한나절인가 이틀인가 있다가, 불현듯 영화 각본이라면 비교적 단순한 문장들을 갖고 재미있게 프랑스어를 연습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서점에서 돌아온 뒤로도 무의식중에 프랑스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간 내게 가장 필요한 실력은 읽기와 쓰기보다는 듣기와 말하기였으므로 영화 각본은 내 니즈에 안성맞춤이었다. 문제는 웹서핑을 하다보니 영어로 된 각본은 많아도 프랑스어로 된 각본을 찾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는 점이다.
기왕이면 내가 재밌게 봤던 프랑스 영화의 각본을 찾아내고 싶었고, 그것도 가급적이면 엉뚱하고 재치있는 대사가 많은 에릭 로메르의 각본이라면 딱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 관한 어떤 각본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누벨바그 장르 중에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를 찾을 수 있었지만, 너무 오래된 사본이어서 폰트가 깨끗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출판사에서 만든 <아멜리에(Le fabuleux destin d'amélie poulain)>의 각본을 찾을 수 있었는데, 9.9유로여서 굳이 돈을 주고 구입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가격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단은 <네 멋대로 해라>의 각본을 택했다.
난데없이 시집이니 영화 각본 타령을 하는 건, C와의 약속 때문이다. C를 처음 알게 된 건 8월도 거의 다 끝나가는 늦여름의 일이었다. 나는 작년 수업을 통해 알게 된 프랑스인 B 교수와의 인연으로, 올해 초 파리에 체류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간간이 메일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었다. 내가 불어불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아니었기 때문에 B 교수 관점에서는 내가 조금 독특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인답게 답장이 오는 속도도 때로는 한 달이 걸릴 정도로 드문드문 이어지는 정도의 연락 교환이었는데, 내가 프랑스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모처럼 도착한 B 교수의 회신에 프랑스인 친구를 좀 만나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제안이기도 했거니와,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이런 주선이 상당히 부담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기도 했다. 마지막 학기라고 해서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낼 것도 아니기에 일단 그렇게 하겠다고 B 교수에게 회신을 보내고, 혜화에서 C를 처음으로 만난 건 부슬비가 내리던 날 프랑스인들이 자주 모인다는 어느 카페에서였다.
나는 프랑스어를, C는 한국어를 연습하는 걸 목표로 삼아 교우하게 된 것인데, C는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나와 닮은 면이 있었다. 혜화에서의 만남 이후 한동안은 서로 주제를 정해서 작문을 해온 뒤 글을 점검해주고 한국과 프랑스의 사는 모습들에 대해서 시시콜콜 이야기—대개는 서로의 일상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듣기와 말하기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싶었던 내가 <네 멋대로 해라>의 각본을 들고 약속에 나타난 것이었다. 60년대 작품이다보니 C는 주연배우인 벨몽도는 알아도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서로 대사를 주거니받거니 하는 과정은 충분히 재미는 있었는데, 문제는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 알겠지만 대사의 퀄리티(?)가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오프닝부터 비속어나 은어가 자주 등장하고,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 장난치듯 흘러가기 때문에 아무래도 학습효과가 떨어지지 않겠냐는 게 C의 의견이었다. 비속어의 뜻을 알려주면서도 조금 난감해 하는 눈치이기도 했고.
그러면서 내가 넌지시 <아멜리에>의 유료 각본을 발견한 이야기를 했더니, C가 <아멜리에>라면 대사의 구성이 오히려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주에 C는 내게 파일을 하나 보내왔는데, 인터넷에서 본인이 직접 찾은 <아멜리에>의 일부 대사에서 문법적 오류를 수정한 다음 타이핑한 각본이었다. 내가 9.9유로를 주고 <아멜리에>의 각본을 구매한 지로부터 세 시간 뒤의 일이었으니 미리 보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_=) 싶기도 하지만 그 성의가 고맙기도 하고 이러나 저러나 구입했을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오늘 <아멜리에>의 영상을 대조해 가면서 서로 대사를 읊어봤는데, <네 멋대로 해라> 때보다 맥락도 살아 있고 주거니받거니가 되는 느낌이 있었다. 모르는 표현이나 어휘를 확인하고 두 번씩 읽으면서 '내가 이래서 흘리고 놓치는 프랑스어가 많았구나'하고 느끼는 대목들도 많았다.
한편 내가 구매한 공식 대본의 경우 내레이션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텍스트의 양이 훨씬 늘어나는데, <아멜리에>라는 영화 자체가 내레이션의 역할이 큰 영화여서 C는 공식 대본 속 문장이 빽빽하긴 해도 공식 각본으로 공부해볼 만할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내가 <아멜리에>를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다보니,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가면서 말을 내뱉으려면 영화를 다시 봐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나 C나 본업이 있기 때문에, 이런 교류가 본업에 부담되지 않을 만큼 이루어졌을 때 서로에게 더 동기부여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 점점 할 일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배움에도 재미가 있으니 멈추진 않는다(...;;) C는 오늘 예고에도 없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소설을 들고 왔는데, 내가 좀 더 한국어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적절한 난이도에 내용이 괜찮고 분량이 적당한 책을 찾아봐 주기로 했다. 각자 공부의 방향성을 확인한 뒤 카페를 나서는데, 바깥의 공기가 무척 쌀쌀했다. 한동안 내리던 비는 내리기를 그치면서 대기에 남아 있던 온기를 모두 거둬간 모양이었다. 급작스럽게 바뀐 날씨에 이번 주부터는 내 옷차림도 퍽 달라질 것 같다. 내일부터 다시 본업 모드로 전환할 다짐을 하면서 여기서 글을 줄인다. [fin]
'주제 있는 글 > Second Ton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크리(Écrits) (2) 2024.03.03 아스테릭스(Astérix) (2) 2023.07.08 Admis, DELF B2 (4) 2021.04.09 알다가도 모르겠는 (0) 2021.02.21 길고 짧은 건 대어 보아야 안다 (0) 2020.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