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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miné. DELF B2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0. 6. 17. 01:02
"종지부를 찍다!" 이로써 상반기의 크고 작은 이벤트들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아니, 기대했던 이벤트는 없었다. 연초부터 심혈을 기울여 계획하고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좌초되었다. 4월에서 5월에 이르는 꼬박 2개월간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연거푸 탈락의 고배를 마셨을 때, 그리고 마지막 고배까지 들이켰을 때, 내심 속상함이나 아쉬움보다는 후련한 마음이 컸다. 내가 봐도 완벽한 준비는 아니었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끝까지 진력(盡力)했고, 에너지가 고갈되는 와중에도 마냥 즐거웠기 때문이다. 평소의 나 같지 않은 낙관성이 긍정적인 결과까지 담보하지 않을까 확신할 정도였다. 이처럼 일종의 환각상태를 거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때는, 그야말로 고배라도 덥석 집어들고 싶을 만큼 목이 탔다. 그만큼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내내 지루하고 괴롭고 숨막혔다. 마침내 내게 남은 패가 다 사라진 뒤, 끝으로 하나 남은 절차는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그 뒤 2주가 지나 DELF B2 시험결과가 나왔다. 절반은 결과를 기다리는 2개월을 보내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나머지 절반은 작년까지 공부했던 게 아깝다는 생각에서 5월 시험을 신청했다. 결과는 54.5점. 총점이 합격점은 넘겼지만 듣기에서 과락(éliminé)이 나왔다. 과락이라는 우리말의 어감이 별로인 만큼이나 'éliminé'라는 프랑스 낱말도 영 거슬린다. 청취 4.5/25, 독해 19.5/25, 작문 13/25, 구술 17.5/25가 나왔는데,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차장과 업무를 두고서 농담에 가까운 대화을 주고받다가 휴대폰으로 흘낏 결과를 확인했을 때, 한창 웃고 있던 얼굴 근육이 잠깐 제 위치를 못 찾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서는 좀이따 웃는 얼굴을 지어보이며 꾸벅 인사를 하고 퇴근하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내 안에 텅 빈 공간을 스쳐가는 바람이 가볍게 울린다. 비어 있기에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빈 공간, 그 공간이 가냘프게 흔들린다. 다 훌훌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빈 공간을 다시 뒤흔드는 것일까. 작은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던 프랑스어 시험은 그렇게 묘한 잔향(殘響)을 일으켰다.
6월에 접어든 뒤로 주말이 되면 몸져 누워 있다시피 했다. 하루종일 발광(發光)하는 모니터를 보며 일하니 쉽게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부동자세로 손가락만 움직이다보니, 이런 부자유한 상태를 몸은 귀신 같이 알아차렸다. 몸은 생각보다 주위 환경을 빠르게 읽는다. 몸이 바라는 대로 늘어져 있다가는 느른한 리듬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 같아, 운동도 시작하고 바깥활동을 나서보지만 일요일이 되면 토요일에 들였던 것 이상의 의지가 필요하다. 하루는 밖을 나가 지하철로 이동하면서도 책의 활자가 들어오지 않는다. 생각의 공백_ 맞은편 승객의 무표정한 얼굴_ 그 다음 생각의 공백_ 아이돌의 지하철 안내방송_ 공백_ 생각의 공백_ 개방되는 스크린도어_ 새로 탑승하는 승객들_ 생각의 공백_ 또 공백_
마음의 순도(純度)_ 사람들은 순도 높은 것들을 참 좋아한다. 금이든 술이든 자전거에 쓰이는 티타늄이든 순도가 높으면 그만큼 값어치도 기하급수적으로 오른다. 그래 맞아, 나는 마음이 참 혼탁했구나,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 마음의 순도가 또렷이 보였던 거야, 금의 성질이나 술맛처럼.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불현듯 시구(詩句) 하나가 스쳤다. 그 다음 내 마음의 순도를 조금은 헤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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