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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鐵原): 백마고지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3. 4. 29. 12:20
철원은 멀지 않았다. 나는 최근 우연한 기회에 DMZ에 걸쳐 있는 열 개 지자체에서 DMZ 투어가 열리는 것을 보고, 가장 적당한 곳을 고르다가 집에서 가장 가기에 편리한 철원을 택했다. 철원 코스는 백마고지뿐만아니라 전사자 유해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화살고지도 둘러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간 시점에는 작년 여름 수해로 인해 화살고지를 잇는 비마교가 유실되면서 화살고지까지 둘러볼 수는 없었다.
도착해서 가장 먼저 둘러보는 곳은 백마고지 전적지다. 전쟁 당시 이곳에서는 10일간 12번의 쟁탈전이 벌어져 7번 주인이 바뀌었고, 국군과 미군, 프랑스군이 참전했다. 전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물론 수많은 태극기가 수놓은 오르막길과 그 끝에 우뚝 선 거대한 태극기다. 합장(合掌)한 형태의 기념비는 이곳에서 전몰한 젊은이들에 대한 추모의 뜻이 담겨 있다. 전사자 명단의 계급을 보면 이병이나 일병보다도 하사가 압도적으로 많이 보이고, 이는 전사 이후에 병사들이 명예승격이 된 것일 텐데 그것이 추모비 위의 음각된 글씨로만 남아 덧없기만 하다.
거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월경(越境) 방지선을 버스를 타고 지나면, 민통선 안에서 드문드문 농사짓는 풍경이 펼쳐진다. 이후 하차한 곳에서 약 3.5km 정도를 뉴스 화면에서나 보던 철책을 따라 걷게 된다. 저 멀리로는 GP들이 눈에 들어오고 가까이에는 초소들이 있는데, 2018년 판문점 선언을 기점으로 상징적 의미에서 일부 GP들을 헐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GP들은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 다만 철책에 동작을 감지하는 자동화 센서가 설치되면서 초소는 텅 비어 있었다.
DMZ는 자연친화적인 곳이다. 철책 옆을 걷는 내내 두릅이 눈에 띄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동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라니가 뛰어다니는가 하면, 방문객의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푸드덕 날아오르는 꿩이 보인다. 커다란 유혈목이가 길섶에 숨죽이고 있는 이곳은 겨울철에는 두루미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한편 철책 옆으로는 역곡천(逆谷川)이 따라 흐르는데, 역곡이라는 이름이 함축하듯이 개울이 크게 방향을 되감았다가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이 개울을 기점으로 남한 쪽 수목은 푸르른 반면, 북한 쪽으로는 이제서야 연둣빛 새순들이 올라오고 있는 걸 보면 이 두 지역은 실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공작새능선에 올라서면 백마고지가 그려내는 말의 힘찬 뒷다리와 튼튼한 몸통, 앞다리와 목의 갈기가 보이는 것 같다. 이곳이 다른 말도 아닌 백마라는 이름을 얻게 된 건 일찍이 알려져 있듯이 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산 전체가 탄흔으로 뒤덮이면서 흰 빛을 띄었기 때문이다. 이를 미국의 한 종군기자가 공중에서 촬영했더니 그 모양이 흰 말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 이곳 최전방 또한 인구감소의 영향을 빗겨갈 수는 없어서 최전방에 위치한 사단들도 하나둘 해체되거나 재편성되고 있다니, 군의 현대화만큼이나 생경한 이야기다.
화살머리 고지를 둘러보고 오는 길에는 철원에서 유명한 만두전골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순담 전망대에서 드르니 전망대 방면으로 한탄강 스카이워크를 걸었다. 어두운 주상절리 위로 녹음을 더해가는 이곳의 풍경을 보니, 좀 더 이른 봄에 왔어도 풍경이 볼 만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나절 나들이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 역시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내게 가까운 삶과는 다른 풍경, 다른 이야기를 발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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