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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여의도, 신림주제 없는 글/印 2023. 4. 25. 19:22
# 필름 카메라를 집어든 동기는 뚜렷하지 않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넷으로 필름 카메라를 찾아보던 중, 30년도 훌쩍 넘은 아버지의 니콘 카메라가 떠올랐다. 나는 보는 즉시 그 카메라가 마음에 들었고, 필름 두 개를 주문했다. 필름 하나에 이만 원 돈이라니 필름 카메라를 쓰던 시절 삼천 원이면 충분히 필름을 구하던 때와 비교하면 비현실적인 가격이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를 찍는 동안 이 카메라가 더 좋아졌는데, 셔터스피드와 조리개, 줌을 하나하나 조절하고 필름을 아껴가며 사진을 남기는 맛이 있었다. 최고와 최대만을 눈여겨보며 숨가쁘게 살아온 내가 다른 호흡 방법을 찾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나는 36장 필름에 파주와 여의도, 신림에서 사진을 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살아남은 필름은 일부에 불과했으니.
# 파주로 가는 길에는 대기에 적잖이 황사가 깔려 있었다. 파주는 경기도 외곽의 많은 지역들이 그러하듯 생각보다 넓은 면적을 가진 지자체다. 희뿌연 사방을 가로지르며 달린 승용차는 파주의 오래된 중심지인 금촌 지역까지 들어갔다. 오늘 우리가 향하는 곳은 식물을 판매하는 농원이다.
생각보다 넓은 농원이어서 비닐하우스 열 동 정도를 합쳐놓은 정도의 크기다. 농원 실내에는 중앙으로 중심 통로가 놓여 있고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그리고 한 쪽 구역 더 깊숙한 곳으로는 정글처럼 꾸며놓은 별도의 식물원이 있다. 널따랗거나 비좁은 통로마다 양 옆으로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손님들의 시선을 기다린다. 식물이 자라나기에 알맞게 따듯하게 공조되고 있는 농원 안에서 나는 몇 장의 사진을 남겼다.
# 샛강은 여의도를 뭍과 분리시키는 작은 하천이다. 평시에는 실개울이 흐르는 정도이지만 장마가 되면 물이 크게 불어난다. 이 샛강을 사이에 두고, 당산, 영등포, 신길, 대방, 노량진이 여의도를 반시계방향으로 에워싸고 있다. 하천이라고 부르기에 모호한 이 물길은 여의도라는 휘황한 공간과 노후화된 주변 지역을 무심하게 나눠놓는다. 그리고 녹지가 부족한 서울에서 마치 DMZ처럼 콘크리트나 철근으로 얼룩지지 않은 청정 지대를 이룬다.
# 신림에서 C를 만나던 날, 나는 C가 이번에 새로 이동한 사무실에서 함께 프랑스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카메라에 남은 마지막 필름을 시험삼아 찍기 위해 셔터를 눌렀을 때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필름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C는 필름 카메라를 꼭 작동시켜보고 싶어했고 내게는 여분의 필름이 있었기 때문에 필름을 갈아끼우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생각 없이 필름통을 열어졎힌 순간 돌돌 감지 않은 필름 안으로 형광등 불빛이 내리쬐였고 그대로 상당수의 필름이 타버렸다.
#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충무로의 한 현상소를 찾아가던 날, 현상을 마친 직원의 손에 들린 필름을 보고 안도했다. 투명한 실루엣이 꽤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살아남은 사진들이 어느 정도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스캔을 하고 보니 빛에 휘발된 사진의 대부분이 여의도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신길 방면에서 여의도로 넘어오며 찍은 사진은 크게 마음 먹고 길을 나서 찍은 사진이기는 했지만, 어딘가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들이기도 했다. 그런 여의도 사진이 날아간 정도로 일단락된 것을 작은 위안으로 삼으며 라이트박스에서 필름을 가지런히 잘라 정리한 다음 현상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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