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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은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호수같은 친구였다고. 바다같이 넓은 마음, 바람처럼 변덕스런 마음, 해바라기처럼 한결같은 마음 등등 귀에 익을 법한 하고많은 표현을 제쳐두고 나를 '호수'에 빗댄 친구의 말을 들으면 속으로 조금 비웃었던 것 같다. 호수라는 낱말 뒤에 친구가 붙인 형용사는 고요함, 흔들리지 않음, 늘 그 자리에 있음 따위의 것들이었고,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호수같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 안에는 항상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오리가 있었다. 그 회오리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거셌고 내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그래도 그가 보기에 내가 호수같았다면, 어느 누군가에게는 콩코드 호수가 되어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 올해는 가을이 길어진 만큼 겨울이 이를 견제하려고 서둘러 눈을 내보내는 듯하다. 강추위와 폭설 때문에 여행을 차일피일 미룬지도 일주일이 넘어갔고, 날씨가 좀 풀리나 싶자 눈이 내리는 식이었다. 중부지방과 서해안에 눈이 많이 내린 하루는 작은 호수를 찾았다. 이곳에서 어릴 적 사생대회도 했었고 나름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인데, 20년 가까이 되어서 찾아서인지 옛 풍경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걸 보며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나약하고 망각은 얼마나 강력한지 깨닫는다.
# 호수의 표면이 결빙되었고, 그 위에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그 고운 눈 위로 다시 오후의 햇살이 켜켜이 쌓인다. 항상 이런 저물녘을 기다리곤 했다. 작가 박완서는 일몰 무렵을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이라고 묘사했다. 나는 그 구절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날 내린 눈은 퇴락한 사물이라기엔 순전히 새 것이었고 완전한 하양이었다. 살굿빛 석양은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복병처럼 잔뜩 숨죽였다가 이내 호숫가로부터 침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지평선이 해의 마지막 광선을 거둔 순간, 한바탕 전투가 끝난 것처럼 동그란 호수 위로 잔인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백색의 눈밭이 조금은 퇴락한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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