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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실(絲)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15. 17:53
이어쓰는 하와이 여행기. 여하간 두 번째로 묵었던 마운틴뷰의 방갈로에 대해서는 폭우로 인한 정전과 어둠 속에서 요리했던 것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고, 미국에서 '생존주의'란 무엇인지 몸소 깨닫게 된 계기였다.
오아후 섬으로 넘어가면서 알아본 숙소는 이번 체류 중에 유일한 호텔이었다. 와이키키 일대에는 굴지의 호텔들이 즐비한데, 그 가운데 내가 고른 곳은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텔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하와이에서 맨 처음 생긴 호텔이라는 서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에서 편리함과 호화로움을 택할 법도 하건만,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호텔까지 정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호텔에 묵게 된 걸 무척 좋아하셨다. 아쉬웠던 점은 다이아몬드 헤드가 바라다 보이는 개별 테라스로 나갈 수 없도록 출입문이 봉쇄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우리 일행이 오아후 섬으로 넘어가는 날 저녁 일정으로 예약해두었던 루아우 공연은 우천으로 인해 취소되었고, 그 덕에 오아후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는 아무런 일정이 없게 되었다. 빅 아일랜드에서 하와이 여행일정을 시작했던 우리로서는 이 지역을 사람은 어쩌다 나타나고 우림이 끝없이 펼쳐진 넓은 섬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호놀룰루 공항에서 와이키키의 숙소로 들어가는 길은 서울에 진입하는 고속도로를 방불케 할 만큼 도시적인 느낌이었다. 이날 우리는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에서 저녁을 해결한 뒤 호놀룰루의 시내를 쏘다녔다. 명품 가게가 늘어선 대로변은 내게는 몰개성하게 보였지만, 엄마는 관심있게 쇼윈도를 구경하셨다.
내 취향을 적극 반영하여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에 묵기는 했지만, 여행을 다녀오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모아나 서프라이더에 얽힌 옛 일화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에 남는 건 호텔의 본관 앞 파티오에 치렁치렁 우거졌던 반얀트리들. 이 거대한 반얀트리는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의 상징이다. 호텔이 1901년에 세워졌으니 이 반얀트리들의 수령도 기껏해야 100년을 좀 넘기지 않았을까 싶은데, 얼마나 생육이 빠르면 우리나라에서 600년 되었다는 웬만한 은행나무보다도 위세가 등등하다.
제 몸집보다 무성한 공기뿌리들이 중력을 따라 땅으로 흘러내려와 파티오의 이곳저곳에 아늑한 그늘을 드리운다. 밤이 깊어질수록 나무는 하늘보다 더 깊은 어둠을 품고 수평선에 검은 상처를 냈다. 거대한 땅구멍이 그렇듯 반얀트리는 한여름 밤풍경에 무자비하게 공백을 파헤쳐 놓았고, 두려움에 떠는 소년의 마음에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여행 > 2024 미국 하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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