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한훤당 고택과 용흥못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2. 19. 18:01
대구에는 못(池)이 많다. 오래 전 한 일본인 친구가 내게 한국에는 일본의 비와호(琵琶湖)―시가현에 자리한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같은 호수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인공 호수나 저수지야 많지만 떠오르는 거라곤 포천의 산정호수 정도여서 괜히 대결(?)에서 진 듯한 기분이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호수는 어휘상으로나 개념적으로는 존재해도 우리나라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고여 있는 물'―물론 완전히 닫힌 공간은 아니다―에 대한 심상은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구에 가면 거창한 호수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못(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흔히 내륙도시의 대명사로 알려진 대구에서 큰 면적의 수평(水平)을 발견하는 것은 아이..
-
한 발짝 뒷걸음으로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9. 12:34
주말 이틀 내내 출근을 하는 바람에 매우 피곤한 하루였던 것 같다. 또 그 짬을 내어 여행갈 생각을 하다니, 어떤 식으로든 쉼표를 제대로 찍고 싶었던 모양이다. 추사고택에 이어 내가 향한 곳은 백설농부라는 한 카페였다. 같은 예산이지만 다시 삽교천을 건너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카페에 도착한 뒤 나는 일에서 오는 피곤함을 누르고 카페에 앉아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요새 눈을 떼기 어려운 책이다. 이 카페를 찾은 이유는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 때문이었다. 나무로 지은 카페 일대에는 텃밭이며, 정원이며, 농원이 가꿔져 있지만 엄혹한 계절인지라 싱그러운 풀빛은 찾아보기 어렵다. 메말라가는 몇 가닥 억새들이 초라하게 부대낄 뿐, 멀리 바라다보..
-
겨울의 추사고택(秋史古宅)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8. 14:38
신리성지를 나설 때쯤에는 좀전보다 비가 더 내리기 시작했다. 훈풍이 가신 차 안에서 시동을 걸고 잠시 몸을 녹인다. 그리고 구글맵에서 찾아두었던 추사고택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11분, 그 시간의 차이에 의해 나는 당진에서 예산으로 월경(越境)하게 된다. 겨울철 입장마감 시간이 5시인 추사고택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좀 안 되었을 때로, 추사의 생애가 소개된 추사기념관까지 들를 생각은 못하고 고택과 묘소 일대만 거닐어보기로 했다. 필름카메라에 낀 희뿌연 성에를 외투 소매 끄트머리로 닦아내고, 가능하면 부슬비를 피해 처마를 따라 빈집에 잠입한 고양이처럼 고택을 살펴본다. 그리고 지난 여름 다산초당을 찾았던 때를 기억한다. 대나무가 자라나는 산길로 이어진 다산초당과 달리, 추사고택은 야트막한 솔숲 밑..
-
어떤 날갯짓과 울부짖음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5. 18:21
당진에는 아마 지금쯤 많은 눈이 내렸을 것이다. 삽교천과 안성천이 커다란 하구를 만들며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이 일대는 예로부터 넓게 일컬어 내포(內浦)라고 불렸다. 지금의 예산, 아산, 서산, 홍성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그러므로 오늘날 홍성 지역에 만들어진 내포 신도시라 함은 상당히 좁은 의미를 띤다 하겠다. 여하간 두 물줄기가 만나는 아산만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구분짓는 지리적 경계인 동시에 문화적 경계이기도 하기에, 당진 부둣가를 활발히 메운 공업단지를 뺀다면 이미 서해대교를 지나는 순간부터 상당히 전원적인 풍경이 차창을 가득 채운다. 그 풍경에 하나의 이채로운 색깔을 덧입히는 것이, 이 지역에 스며든 카톨릭교회의 정취다. 당진은 한국사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그래..
-
너는 그곳에 서서여행/2024 함박눈 공주 2024. 1. 12. 13:26
이번 공주 여행에서 가장 와보고 싶었던 곳은 사실 외진 곳에 자리잡은 한 카페였다. 나는 지도를 보고 빨리 정보를 파악하는 편인데, 이 카페라면 딱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비가 숨어살며 복을 누린다'는 카페이름의 숨은뜻까지도 마음에 든다. 가끔은 마음에 드는 카페 한 곳을 가보고 싶다는 그런 미친 생각으로 먼 길을 떠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이 대체로 불가해하듯이.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산자락에 위치한 이곳 카페는 차량을 이용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카페 맞은 편 작은 절벽에는 저녁에 가까워진 햇살이 헐벗은 나뭇가지에 찌를 듯이 내리꽂힌다. 늘 시원한 음료를 찾는 나는, 조금 전까지의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실내에 들어서자 이내 자동적으로 차가운 음료를 주문했다. 짧은 시간 제..
-
나는 금강을 따라여행/2024 함박눈 공주 2024. 1. 11. 19:48
공주는 작년 여름 수해를 크게 입은 지역 중 하나다. 수해는 유적지도 빗겨가지 않아서 공산성 역시 물에 잠기는 불상사를 피하지 못했다. 다행히 무령왕릉 매표소에서 확인해보니 공산성도 둘러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해서 무령왕릉 다음으로는 공산성을 가보기로 했다. 성(城)의 서문이자 정문인 금서루에 도착하자, 가파른 비탈 아래로 마흔세 개에 달하는 공적비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입구에서 회전교차로 쪽을 바라보면 가운데에는 무령왕의 거대한 동상이 있고, 그 뒤로는 무령왕릉을 닮은 아치형 관문이 서 있다. 원래는 공산정을 출발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걸으려 했지만, 공사구간이 있어 반시계 방향으로 성벽을 걸었다. 부소산성과는 다른 걷는 재미가 있고, 방위체계에 따라 성의 동쪽에는 청룡 깃발이, 서쪽에는 ..
-
오래됨의 새로움여행/2024 함박눈 공주 2024. 1. 10. 23:01
즉흥적으로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 이번에는 공주다. 공주는 개인적으로 낯설지 않은 도시지만 한번도 여행을 위해 들른 적은 없는 곳이다. 근래에 제민천 일대를 중심으로 도시 재생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얼핏 들어서, 백제의 옛 수도가 아닌 새로운 도시공간으로서 공주를 찾게 되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첫 공주 여행이었던 만큼 유적지를 주로 둘러보게 되었지만. 이동수단은 KTX 산천. 내가 탄 열차는 익산에서 여수와 목포로 분기하는 열차였다. 내 자리는 오른쪽 창가석이었고 시야가 탁 트인 창문 바로 옆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다.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는 용산역에서 잠시 정차한 뒤 한강철교에 올라선다. 그러면 저 먼 발치에서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강철교를 건널 때마다 항상 ..
-
셋째 날. 다산초당(茶山草堂)여행/2023 늦여름 목포 2023. 9. 3. 11:17
짧은 목포 일정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한 끝에 가기로 마음먹은 곳은 강진군의 다산초당이다. 목포는 목포를 기점 삼아 주변 지역을 둘러보기 좋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이 일대가 넓어서 이동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다산초당을 가는 데에는 차로 1시간 여가 걸렸는데, 목포에 머무른 3일 중 날씨가 가장 좋아서 부족한 시간만 아니었다면 한적한 길가 아무곳에나 차를 세워두고 산과 들판, 바다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기의 열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산등성이의 몇 곱절은 되어 보이는 뭉게구름들이 기세 좋게 튀어오르고 있었다. 다산초당은 영덕의 월송정만큼이나 한적하고 고즈넉해서 마음이 느긋해지는 공간이었다. 정약용은 유배생활 11년간 이곳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집필했다.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