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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추사고택(秋史古宅)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8. 14:38
신리성지를 나설 때쯤에는 좀전보다 비가 더 내리기 시작했다. 훈풍이 가신 차 안에서 시동을 걸고 잠시 몸을 녹인다. 그리고 구글맵에서 찾아두었던 추사고택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11분, 그 시간의 차이에 의해 나는 당진에서 예산으로 월경(越境)하게 된다.
겨울철 입장마감 시간이 5시인 추사고택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좀 안 되었을 때로, 추사의 생애가 소개된 추사기념관까지 들를 생각은 못하고 고택과 묘소 일대만 거닐어보기로 했다. 필름카메라에 낀 희뿌연 성에를 외투 소매 끄트머리로 닦아내고, 가능하면 부슬비를 피해 처마를 따라 빈집에 잠입한 고양이처럼 고택을 살펴본다.
그리고 지난 여름 다산초당을 찾았던 때를 기억한다. 대나무가 자라나는 산길로 이어진 다산초당과 달리, 추사고택은 야트막한 솔숲 밑 탁 트인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초당(草堂)에 고택(古宅)을 견주는 일이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은 쓰이지 않는 이 생활 공간의 인적 없음과 물러나 있음에 마음둘 곳을 발견한 듯하다.
20세기 초 촬영된 기록사진 속 추사고택은 지붕의 기와가 이지러져있고 한옥의 한켠은 쌓아올린 볏단으로 막혀 있지만, 그때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안도감보다 놀라움이 앞선다. 종종 우리나라의 오래된 건물을 볼 때, 무속(巫俗)에서나 접할 법한 신령스러움과 경외감을 품게 된다. 시간은 존재를 지워버릴 만큼 강력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백송공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추사고택에서의 여정은 마무리지었다. 공원에는 가지치기가 잘 된 올리브나무처럼 잔잔하고 우아하게 백송(白松)이 늘어서 있다. 그 단정함에 시선을 뺏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쩐지 높은 산 바위 틈새를 비집고 독야청청 자라나는 이름모를 소나무가 더 소나무답다는 생각을 한다. 비는 몸속 깊이 한기를 심어놓을 만큼 대기를 적셔서, 나는 이내 걷는 것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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