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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강을 따라여행/2024 함박눈 공주 2024. 1. 11. 19:48
공주는 작년 여름 수해를 크게 입은 지역 중 하나다. 수해는 유적지도 빗겨가지 않아서 공산성 역시 물에 잠기는 불상사를 피하지 못했다. 다행히 무령왕릉 매표소에서 확인해보니 공산성도 둘러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해서 무령왕릉 다음으로는 공산성을 가보기로 했다.
성(城)의 서문이자 정문인 금서루에 도착하자, 가파른 비탈 아래로 마흔세 개에 달하는 공적비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입구에서 회전교차로 쪽을 바라보면 가운데에는 무령왕의 거대한 동상이 있고, 그 뒤로는 무령왕릉을 닮은 아치형 관문이 서 있다. 원래는 공산정을 출발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걸으려 했지만, 공사구간이 있어 반시계 방향으로 성벽을 걸었다. 부소산성과는 다른 걷는 재미가 있고, 방위체계에 따라 성의 동쪽에는 청룡 깃발이, 서쪽에는 백호 깃발이, 남쪽에는 주작 깃발이, 북쪽에는 현무 깃발이 나부낀다. 성의 남쪽에 해당하는 진남루로 가는 길에는 눈길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공산성의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이내 깨닫게 되지만, 공주 지역 안에서도 이곳은 성벽을 치기에 참 알맞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북루와 만하루가 위치한 성의 북쪽은 금강과 맞닿아 있어 방어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 탈출로로 활용하기에도 좋다. 한편 금강과 면하지 않은 나머지 구역은 야트막한 산자락으로 에워싸여 있는데, 이 야산은 외부와 내부를 넘나들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높이이면서도 밖의 침입을 견디기에는 충분할 만큼 경사가 있다.
은개골 일대를 돌아나와 성의 동쪽에 이르면 비로소 금강 일대가 한폭으로 시야에 담긴다. 강을 기준으로 해서 공주 시가지의 신구(新舊)가 나뉘고 금강이 실어나른 모래밭에는 이따금 겨울을 타지 않는 이름모를 새가 방랑객처럼 공중을 맴돈다. 앞으로는 공주대교가, 그 너머로는 신공주대교가, 이들을 빈틈없이 에워싼 산줄기가 새하얀 민머리를 드러내며 어떠한 질서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을 사로 잡은 건 커다란 겨울나무에서 갓 떨어져나온 낙엽이었다. 허공에서 어찌나 파르르 떨리는지 낱잎 하나가 그토록 위태롭고 쓸쓸해 보인다. 낙엽은 나뭇가지에서 점점 멀어져서 전혀 가라앉지 않을 것처럼 진동을 더해갔다.
성의 북쪽은 눈이 거의 녹지 않은 채였다. 연지와 만하루를 지나 공북루로 향하는 길에는 강변에서 수면의 한기와 그대로 부딪치는 거목들을 네 그루인가 다섯 그루 지나치는데, 벌써부터 신록이 올라온 봄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앞서 오르지 못했던 공산정은 이제 대나무숲이 빽빽한 언덕 위에서 아주 선명한 선을 남기고 있었다. 대나무숲은 어떠한 성김도 없이, 이 세상에서 찾아낼 수 있는 진짜 검정은 바로 저 숲이 품고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불러킨다. 대나무 사이사이로 비져나온 숲 내부의 어둠에서 이내 정체불명의 짐승을 마주한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시선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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