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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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道東書院), 서사의 공백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3. 8. 20:50
요즈음 한동안 풀렸던 날씨가 다시 추워지면서 두 번째 겨울을 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내 안에서 굴러가던 시계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잠시 멈춰버린 것 같다. 그 사이 나는 주말을 껴서 부산과 포항으로 한 차례 출장을 다녀왔고, 마침 출장 전날밤 집에 난방이 작동하지 않은 까닭으로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출장에서의 일정은 얼마나 빠듯했던지, 내가 여행하기 좋아했던 부산을 조금이라도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출장을 간 날은 더군다나 미세먼지가 자욱히 가라앉은 날이었고, 광안대교 위를 지나며 바라본 부산 해안가에는 몇 년사이 해안을 끼고 초고층 아파트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직선으로만 완성된 획일적인 건물들을 보며, 어쩐지 이 도시가 싫어질 것 같았다. 잃어버린 일상의 방향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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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고분군, 살아남은 네크로폴리스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2. 25. 18:39
인간은 거대한 상징 체계 안에서 살아간다.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에게 더 뛰어나고 남다른 상징을 두르기 위함이다. 인간만큼 많은 상징물을 만들어내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버스 정류장의 옥외 광고 속 모델, 고층 아파트에 장식적으로 붙여 놓은 근사한 영문명, 공원 가로등마다 알록달록 내걸린 도시의 엠블럼. 상징 체계 없이는 사고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내가 호흡하는 공간은 모두 상징물로 꽉 차 있다. 그러한 상징 체계의 거의 대부분은 가공된 것들이다.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미를 규정하기 위해, 부를 드러내기 위해. 태초에는 많은 상징물이 필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체(media)와 광고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수많은 이미지와 수많은 텍스트가 쉴새없이 상징을 실어나른다. 행복은 무엇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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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海印寺), 산 위에 새겨진 바다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2. 21. 18:56
요새 사소한 악취미가 생겼다. 일이 끝나고 나면 자잘한 보복소비를 하며 기분전환거리를 찾게 된 것.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갈 즈음에도 하지 않던 보복소비를 하게 된 발단은 잦은 야근에서 비롯된다. 작년 연말을 기점으로 밥먹듯 야근을 하다보니 소액이나마 야근수당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야근수당으로 평소 사지 않던 물건을 사는 것이다. 가령 꽤 값나가는 수첩이나 필기구를 사는 식이다. 원래도 문구류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만큼 사놓고 쓰지 않는 나의 성향도 잘 아는지라 쓸 것 같지 않은 물건이면 사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개성 있는 문구류를 쭉 구경하다가, 이따금 마음에 드는 것은 나중에 선물로 쓰든 필기에 쓰든 목적을 따지지 않고 대책 없이 사들이는 것이다. 여행도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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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고택과 용흥못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2. 19. 18:01
대구에는 못(池)이 많다. 오래 전 한 일본인 친구가 내게 한국에는 일본의 비와호(琵琶湖)―시가현에 자리한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같은 호수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인공 호수나 저수지야 많지만 떠오르는 거라곤 포천의 산정호수 정도여서 괜히 대결(?)에서 진 듯한 기분이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호수는 어휘상으로나 개념적으로는 존재해도 우리나라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고여 있는 물'―물론 완전히 닫힌 공간은 아니다―에 대한 심상은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구에 가면 거창한 호수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못(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흔히 내륙도시의 대명사로 알려진 대구에서 큰 면적의 수평(水平)을 발견하는 것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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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 뒷걸음으로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9. 12:34
주말 이틀 내내 출근을 하는 바람에 매우 피곤한 하루였던 것 같다. 또 그 짬을 내어 여행갈 생각을 하다니, 어떤 식으로든 쉼표를 제대로 찍고 싶었던 모양이다. 추사고택에 이어 내가 향한 곳은 백설농부라는 한 카페였다. 같은 예산이지만 다시 삽교천을 건너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카페에 도착한 뒤 나는 일에서 오는 피곤함을 누르고 카페에 앉아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요새 눈을 떼기 어려운 책이다. 이 카페를 찾은 이유는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 때문이었다. 나무로 지은 카페 일대에는 텃밭이며, 정원이며, 농원이 가꿔져 있지만 엄혹한 계절인지라 싱그러운 풀빛은 찾아보기 어렵다. 메말라가는 몇 가닥 억새들이 초라하게 부대낄 뿐, 멀리 바라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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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추사고택(秋史古宅)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8. 14:38
신리성지를 나설 때쯤에는 좀전보다 비가 더 내리기 시작했다. 훈풍이 가신 차 안에서 시동을 걸고 잠시 몸을 녹인다. 그리고 구글맵에서 찾아두었던 추사고택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11분, 그 시간의 차이에 의해 나는 당진에서 예산으로 월경(越境)하게 된다. 겨울철 입장마감 시간이 5시인 추사고택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좀 안 되었을 때로, 추사의 생애가 소개된 추사기념관까지 들를 생각은 못하고 고택과 묘소 일대만 거닐어보기로 했다. 필름카메라에 낀 희뿌연 성에를 외투 소매 끄트머리로 닦아내고, 가능하면 부슬비를 피해 처마를 따라 빈집에 잠입한 고양이처럼 고택을 살펴본다. 그리고 지난 여름 다산초당을 찾았던 때를 기억한다. 대나무가 자라나는 산길로 이어진 다산초당과 달리, 추사고택은 야트막한 솔숲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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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갯짓과 울부짖음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5. 18:21
당진에는 아마 지금쯤 많은 눈이 내렸을 것이다. 삽교천과 안성천이 커다란 하구를 만들며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이 일대는 예로부터 넓게 일컬어 내포(內浦)라고 불렸다. 지금의 예산, 아산, 서산, 홍성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그러므로 오늘날 홍성 지역에 만들어진 내포 신도시라 함은 상당히 좁은 의미를 띤다 하겠다. 여하간 두 물줄기가 만나는 아산만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구분짓는 지리적 경계인 동시에 문화적 경계이기도 하기에, 당진 부둣가를 활발히 메운 공업단지를 뺀다면 이미 서해대교를 지나는 순간부터 상당히 전원적인 풍경이 차창을 가득 채운다. 그 풍경에 하나의 이채로운 색깔을 덧입히는 것이, 이 지역에 스며든 카톨릭교회의 정취다. 당진은 한국사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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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곳에 서서여행/2024 함박눈 공주 2024. 1. 12. 13:26
이번 공주 여행에서 가장 와보고 싶었던 곳은 사실 외진 곳에 자리잡은 한 카페였다. 나는 지도를 보고 빨리 정보를 파악하는 편인데, 이 카페라면 딱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비가 숨어살며 복을 누린다'는 카페이름의 숨은뜻까지도 마음에 든다. 가끔은 마음에 드는 카페 한 곳을 가보고 싶다는 그런 미친 생각으로 먼 길을 떠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이 대체로 불가해하듯이.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산자락에 위치한 이곳 카페는 차량을 이용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카페 맞은 편 작은 절벽에는 저녁에 가까워진 햇살이 헐벗은 나뭇가지에 찌를 듯이 내리꽂힌다. 늘 시원한 음료를 찾는 나는, 조금 전까지의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실내에 들어서자 이내 자동적으로 차가운 음료를 주문했다. 짧은 시간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