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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 무지개(虹)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4. 9. 11. 17:41
새들(Saddle), 우리말로 하면 '말의 안장(鞍裝)'이라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새들로드는 빅 아일랜드의 큰 쌍봉을 이루는 마우나케아와 마우나로아 사이 움푹한 지대를 관통하는 길다란 차도를 가리킨다. 이날은 와이피오 계곡을 빠져나와 와이메아로 가는 길에 만난 갑작스런 호우와 뒤이어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낸 쨍쨍한 햇살로 인해 기억에 남을 순간이 만들어졌다.
새들로드는 마우나케아 전망대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고, 우리의 최종목적지도 처음에는 마우나케아였다. 하지만 와이피오 계곡에 도착했을 즈음, 마우나케아까지 갈 만큼의 시간적 여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나는 새들로드를 드라이브 하면서 숙소로 복귀할 구상을 했다.
그런데 중간지점인 와이메아로 가는 길에 비가 너무 크게 쏟아지는 바람에 잘못된 선택이었나 후회하던 중, 마침 아주 큰 주차장이 달린 대형 야외매장을 발견, 일단 이곳 스타벅스에서 커피라도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릴 생각이었다. 비는 꽤 잦아들어서, 먼지처럼 아주 곱게, 그렇지만 사방에서 물보라치는 것처럼 내렸다. 와이메아까지 온 이상, 왔던 길(마마라호아 하이웨이)을 그대로 따라 돌아가는 일은 영 아쉽기만 하다.다시 차를 움직여 와이메아를 빠져나오자 확연히 날씨가 개였고, 장대비에 보이지 않던 주위 풍경도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주위로는 황야가 물결을 이루고 있었고, 가끔씩 봉긋하게 솟아오른 오름들이 지평선을 바꿔놓았다. 라만차의 벌판을 달리던 돈키호테가 보던 광경이 이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텍사스와 멕시코의 접경지대가 이런 허허벌판의 모습일까?
비온 뒤 해가 내리쬐는지라 우리의 왼편, 그러니까 지도상 동쪽으로 무지개가 떴다. 밤하늘의 초승달이 내 뒤를 따라오는 것처럼, 무지개는 달리는 차에서 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중간에 차를 세웠다. 눈앞에 펼쳐진 황야에는 듬성듬성 자라난 앙상한 나무와 빼곡히 자라난 들풀이 석양을 받아 가을걷이한 곡식처럼 샛노랗게 익었다. 지평선을 가까운 곳부터 먼 곳으로 시선으로 훑다보면 이윽고 코나 위로 떨어지는 해가 보인다.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기분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모자가 날아갈 정도였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을 아래에서 관목들 뒤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풀을 뜯는 염소의 것이다. 그만큼 새들로드의 풍경은 변화무쌍한 것이어서, 우리는 이름도 없는 갓길에 서너 번이고 정차하며 새들로드의 풍광을 만끽했다.'여행 > 2024 미국 하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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